소설리스트

〈 17화 〉17 (17/94)



〈 17화 〉17

수현의 일주일은 꽤 평범하게 지나갔다. 목요일 전까지는.

목요일의 수현은 2층의 거실로 올라갔다. 3주뿐이지만, 무언가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만큼. 문제는 그들의 수업이 후반부로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아...씨... 시끄러...”

산발인 노란 머리의 양아치가 눈을 찌푸리고 방을 나와 중얼거렸다.


“야, 사람 자는데, 딴데 가서 해.  오늘은 여기서 지랄이냐...”

그녀는 달콤한 잠이 방해받은 것이 매우 짜증났는지 욕을 중얼거리며 말했다.

“오늘은 쌤 점심 드시고 가서 부엌 쪽은 요리하느라 여기서 하는 거야. 그리고 시간이  신데  일어나.”

소현이 불만스런 얼굴로 말했다.

“점심? 나는? 아니, 뭐 그래. 그렇다 치고. 네 방이나 아래 거실에서 하면 되잖아.  여기서 이래.”


소향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죄송해요. 조용히 할게요. 우리 좀 옮겨서 하자. 그럼.”

수현이 대답했다. 저런 타입은 말싸움을 시작하면 한 쪽이 쓰러져야 했다. 적당히 넘어가주는 게 나았다.

“아래는 부엌소리도 나고, 여기가 의자랑 탁자도 공부하기 더 편하고!”


소현은 맺힌 것이 있는지 쏘듯이 말했다.


“아니, 그럼 방에 가서 하라고, 둘이 몰래 뭐하냐?”


소향이 그녀의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야!”


소현이 외쳤다.


“...뭐, 뭐? 야? 오늘 따라 이년이 미쳤나...!”


소향이 분노하는 소현을 처음 봤는지 약간 물러서다가 욱하며 말했다.

“그만! 그만. 저희가 갈게요. 더 자요. 내려가자.”


수현이 그들을 말렸지만 이미 늦은 것 같았다.

“잠 다 깨워 놓고 뭘! 언니한테 야? 너 이리 와 봐.”

소향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뭐! 맨날 지 맘대로에, 사람들이 기분 맞춰주니까 지랄만 해대고!”


소현이 으르렁거렸다. 두 자매가 붙으려 하는 것을 수현이 말렸다. 잠시 후, 안주인과 여사님이 나타나 둘을 뜯어낼 때까지 수현은 한참 진땀을 빼야했다.

둘은 서로를 보고 씩씩거렸다. 그러다 눈물이 핑 돈 소현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계단을 내려갔다.

“제가 따라 가볼게요.”


수현이 여사님께 말하고는 재빨리 패딩을 들고 내려갔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소현아!”


수현이 소현을 잡았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수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일단 패딩을 걸쳐주었다.

“죄송해요...”


소현이 울먹이며 말했다.


“아니야. 근처 카페라도 갈래?  들어가긴 싫지?”


수현이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고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바람이 안 불어서 다행이지, 추위는 여전했다. 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은 추위를 참으며 소현과 가까운 카페로 향했다. 작은 카페는 아직 오전이라 그런지 사람이 없었다. 수현은 소현을 자리에 앉히고 소현 몫의 핫초코 한 잔과 자신 몫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자리로 돌아갔다.

소현은 오는 길에 울음 그쳤으나, 새빨개진 얼굴로 테이블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현은 조용히 그녀를 기다려 주었다. 그는 주문한 음료를 받아 소현 쪽으로 핫초코를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소현은 중얼거리듯 모기 목소리로 말했다.


“쌤도  솔직히 궁금하셨죠.”


소현이 한참 만에 내뱉듯 말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좀 그렇긴 했지. 워낙 첫인상이 강했잖아.”

수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소현이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눈물을 닦으려는 듯 안경을 벗었다. 수현은 티슈를 건네주다가  모습에 잠시 멈칫 놀랐다. 소향도 그렇고, 그녀들의 어머니를 봐도 그렇고 소현 또한 안경을 벗으면 기대 될 만한 미모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의외로 언니와  빼닮은 수준이었다. 얼굴형이 약간 더 동글해서 순해 보이는 점만 빼면.


“걘 진짜 이기적인 년이에요.”

소현이 욕을 내뱉었다. 그녀는 코를 풀고는 간단하게 자신의 언니를 소개했다. 저번에 말한 아버지의 미국 파견으로 온 가족이 혼란을 겪던 차에, 제일 겉돌던 사람이 바로 소향이었다고 한다. 제일 사춘기가 시작된 민감할 시기였기도 했고, 어른들도 너무 정신이 없어서 결국에는 1년을 조금 넘게 있다가 혼자 한국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검정고시만 겨우 통과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살고 있다고 한다.

“뭐, 걔가 제일 힘들만 하긴 했어요. 그렇다고 아직도 지 혼자 그러고 다닌다니까요? 솔직히, 엄마랑 아빠도  눈치만 보고...”


아마 부모들 입장에서는 아픈 손가락인 소향에게 더 신경을 썼을 가능성이 높았다. 소향은 신경질적이고... 소현의 유난히 주눅든 듯한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그래서 오늘 결국 참다가 폭발했구나.”


수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게 쌤한테까지 막 그러잖아요... 지는 나 잘  쾅하고  열고 나가고 들어오고 해놓곤.”

소현은 분이 덜 풀린 듯 말했다.

“난 괜찮아. 아니, 솔직히... 나도 화났긴 했지만.”


수현이 말했다. 소현이 그거 보라는 듯이 바라보았다.

“음, 일단...대신 화내줘서 고마워. 그리고 내가 가르치는 입장에서 이렇게 말하는게 맞는지는 모르지만, 먼저 사과할 필요는 없을  같다.”


수현은 그냥 터놓고 말했다. 소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그쪽에서 진심으로 사과하면 받아주긴 해. 가족끼리 너무 척 지는 것도 좋을 건 없으니까.”

수현이 뒷말을 덧붙였다.


“걔는 평생 살면서 남한테 사과 해본 적도 없을 걸요?”


소현이 그럴 일은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니까, 네가 참고 숙여줄 필요는 없다는 거지. 대신, 상대가 숙이면 그건 받아주라는 거야.”

수현이 얼른 말했다. 소현은 코웃음첬다.

“걔가 그러기만 하면 얼마든지 받아주죠! 그럴 일이 있을까 싶지만!”

소현은 장담하듯 말했다.

“그래. 그 정도면 돼. 부모님한테도 그런  맘이랑 서운했던 거 말하고.  말처럼, 언니가 그런  네 잘못은 아니잖아. 네가 언니 때문에 집에서 피해  이유는 없어.”


수현이 수긍하며 말했다. 수현은 소현이 조금  진정할 동안 카페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일어났다.


“들어가자.”


수현이 집 앞에서 말했다.

“오늘 말씀 감사해요...”


소현이 대문에 들어서기 전에 말했다.

“뭘...”


“다들 참고 넘어가라고만 했거든요. 쌤처럼 말해준 사람은 없었어요.”

소현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마음에 들었으면 다행이고.”

수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들어선 집안은 조용했다. 수현은 소현을 방으로 들여보내고 짐을 챙겼다.

“참 못 볼꼴을 많이 보이네요...”

안주인이 피로한 얼굴로 일어나 말했다.

“아닙니다.”

수현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번주 과외비에요...그리고 이거.”

안주인은 봉투  개를 그에게 건넸다.


“나머지 하나는, 원래 명절 맞춰서 드리려고 했던 건데...미리 드리려고요. 오늘 일도 있고. 감사해서...”

안주인은 뒷말을 얼른 덧붙였다.


“아, 아니...”

그녀는 얼떨떨하게 거절하려는 수현에게 단호하게 봉투를 내밀었다. 수현은 결국 봉투  개를 받아 들고 나왔다. 봉투는 오히려 보너스 쪽이 더 두둑했다. 수현은 상반된 감정을 가지고 은행을 향했다.

“일단 자본금이 늘었으니 좋긴 한데...”


수현은 찌뿌둥한 느낌에 괜히 몸을 움직였다. 이럴 땐, 운동이 좋았다. 그는 머리를 흔들고 집으로 향했다. 땀을  빼고 연희를 만나면 마음이 차분해질 것이었다.


*


“음, 뭔가 뿌듯하다.”


연희는 같이 만든 시간표를 들고 뿌듯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둘은  가지 수업을 제외하고는 상당수의 수업을 맞췄다.


“이제 좀 대학생 같아?”


수현이 귀엽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응!  수업 내가 짜는 거, 넌  신기해?”


연희가 풍부한 표정으로 말했다. 수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신기했다. 어떤 감정은 무뎌져 있었고, 어떤 감정은 새로웠다.

“신기하긴 하지.”

수현은 ‘표정이 풍부한 네가’라는 주어를 빼고 말했다.


“음, 근데 이것도 마냥 좋은 건 아니다. 난  마음대로 짠다고 좋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만 삐끗해도 골치 아프겠다.”

연희가 현실을 알아채고는 말했다.

“뭐 다 좋을  없지.”

수현이 말하고는 자리 정리를 시작했다.

“그렇긴 하지...”


연희와 수현은 천천히 한강공원을 걸었다. 연희의 친구가 노량진에서 재수를 해서 만나러 온 김에 여의도를 잠깐 들른 것이다.

“진짜 건물들 큼직큼직하다. 멋있기도 하고, 뭔가 좀 답답해보기도 하고... 그렇다.”


연희는 한강 주변을 쭉 둘러보며 말했다.


“신촌 쪽이랑은 또 느낌이 다르지.”

수현이 난간에 기대 강 건너를 보며 말했다.


“응. 학교나 자취방 근처는 그래도 우리 동네랑 비슷한 느낌이 있는데, 여긴 완전 다른 세상 같아.”

연희도 수현과 같은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둘은 잠시 그렇게 서로에게 기댄 채 강 건너를 바라보았다.


“내일은 우리 소고기 먹으러 가자.”


수현이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응? 소고기?”


연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응. 오늘 명절 보너스 받았거든. 내가 쏠게.”


수현이 연희를 팔로 좀 더 단단히 안으며 말했다.

“와, 진짜? 그럼 우리 소고기 말고 마장동 가서 대창 먹으면 안돼?”

연희가 좀더 수현의 옆구리에 파고들며 말했다.

“마장동?”


수현이 뜬금 없는 대답에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응. 마장동. 거기가 우시장 있다던데? 그런 곳이 신선하고 맛있어.”


연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그런 건 또 어떻게 알았어?”


수현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물었다.

“그냥 안 그래도 며칠 전에 대창 먹고 싶어서 찾아봤어.”


연희의 말에 수현이 웃음을 터뜨렸다. 도회적 외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답이었다.

“진짜... 소고기 먹고 싶다고 우시장 찾는 건 너뿐일 거야...”

“치, 우리 동네에선 소싸움도 하고 그랬어.”

연희의 말에 수현이 다시 웃었다.


“그래. 가자. 대창 사줄게. 배터지게 먹자.”


수현이 말하며 연희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뭔가 그 알 수 없는 갭이 참을 수 없게 귀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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