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11
*
수현은 결국 다시 정모에 합류하지 못했다. 차 시간 때문도 있었고, 애들도 파하는 분위기라고 했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그 사태가 터지고 인원도 반절이상줄었으니...
수현은 20살의 음주 다음날 치고는 굉장히 멀쩡히 일어났다. 아무래도 일찍 술자리를 끝낸 것이 원인인 것 같았다. 그는 하품을 하며 방을 나왔다.
“일어났니?”
거실에서 그의 어머니가 책을 읽다가 그가 나오는 것을 보고는 말했다. 수현이 작게 움찔했다.
“네... 오늘은 집에 계셨네요.”
“응. 오늘은.”
둘은 간단한 대화를 했다.
“수현아, 20살도 되고 대학도 갔으니 술 마시는 건 이해한다만, 그래도 과하면 안 된다. 알겠지? 입학하면 공부도 열심히 하고, 그래야 해. 요즘은 대학만 잘 갔다고 해서 끝나고 그런 세상이 아니야. 알겠지?”
그의 어머니가 말했다. 담담하게 말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은 말들.
“네. 걱정마세요.”
수현은 답답함에 갑자기 토를 할 것 같았다. 없던 숙취가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그래. 들어가서 착실히 하나 하나 쌓아가는 거야. 엄마를 밟고 딱 일어서면 돼. 알겠지?”
“네.”
수현은 부엌으로 들어갔다.
“콩나물국 끓였다. 먹어라.”
“네...”
해장은 라면인데.... 수현은 콩나물국을 떠서 밥에 대충 말았다. 숙취가 있는 것처럼 목넘김이 좋지 않았다. 그는 꾸역꾸역 먹었다.
“거 봐라. 술 많이 마셔 봐야, 속만 안 좋지.”
그의 어머니는 기어코 한 마디를 더 하고는 커피를 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의 기분은아침부터 가라앉았다.
*
수현은 밤 운동과 샤워 까지 마치고, 책상에서 공책을 펴두고 펜을 굴려가며 고민을 했다.
향기라....생각해보니, 4명한테나 비슷한 소리를 들었다.
그는 공책 중간에 향기를 써두고 마인드맵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으나, 회귀하면서 받은 어떤 또 하나의 선물이나 부수 효과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사실, 그것 말고는 달리 떠올릴 것이 없기도 했다. 그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바뀐 것이니까. 그래, 시간도 건너뛰었는데, 몸에서 향 좀 나는 거면 충분히 가능한 범위 아닌가?
그는 마인드맵을 완성하고 한 번 둘러보다가 각자가 다르지만, 공통적일 수 있는 부분을 생각해냈다. 그건 그들이 느낀 향기가 자신이 그들에게 보이고 싶어 한, 혹은 그들이 자신에게 느낀 느낌과 유사한 부분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향이라는 부분이 워낙 추상적이다 보니, 끼워 맞추기식인 것 같기도 했다. 일단, 관찰 된 수가 너무 적었다. 그는 톡톡 공책을 두드리다가 표본 수를 늘려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만났던 사람들한테 대뜸 묻기는 좀 그랬고...
그는 내일부터 여러 명을 만나볼만한 곳을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징-.
그가 그렇게 정리하고 침대에 눕기 위해 공책을 덮을 때, 그의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거기에는 약간은 예상 못한 이름이 떠 있었다.
-수현아. 혹시, 다음주 중에 시간 있어?-연희
수현은 순간 멈칫했다. 온갖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는 머리를 저었다. 반한 20살 남자의 판단력은 흐려지기 마련이다. 이건 호르몬의 문제이다. 그는 심호흡을 살짝 하고 핸드폰을 들었다. 무난한 답장... 오바하지 않는 답장.
-왜?
“이건 완전 아니지...시비도 아니고.”
수현이 썼던 것을 지웠다.
-다음주? 무슨 일 있어?
“이것도 아닌 것 같은데....”
-다음주? 아무 때나?
“이것도 아닌 것 같은...헐.”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던 그가 실수로 전송 버튼을 눌렀다. 생각보다 답장은 빠르게 왔다.
-응. 너 시간 괜찮을 때. 어제 고마워서 내가 밥 사고 싶어서!ㅎㅎ-연희
이거...그린라이트인건가? 맞나? 20살 말고 29살 나오라고! 수현은 객관적으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무진장 노력을 해야 했다. 그는 잠시 생각했다.
향기...
월요일, 아니 넉넉히 화요일까지는 향에 대해서 알아낼 시간이 필요했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것이지만, 그녀 또한 향기가 난다고 했고... 자신의 목덜미에 깊은 호흡을 했던 것이 생각이 났다. 그녀와의 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수요일이나 목요일 1시 이후면 다 괜찮아.주말도 좋고.
수현이 문자를 보냈다.
-그럼 수요일에 1시에 보자! 신촌 괜찮아? 내가 신촌 밖에 몰라 ㅠㅠ-연희
연희의 답장은 빨랐다.
-응. 나도 서울은 신촌이 제일 좋아.
수현의 답장도 이번엔 빨랐다.
-응! 그럼 수요일 1시 신촌에서 보자!ㅎㅎ-연희
-응. 수요일 1시 신촌. 지금 뭐해?
수현은 망설이다 뒷말을 붙였다.
-그냥, 씻기 전에 너랑 문자 중? ㅎㅎ 너는?-연희
약간 늦게 답장이 왔다.
-난 자려다 딱 문자 받아서 문자 중ㅋㅋㅋ 감히 날 깨웠어
수현이 장난스레 문자를 보냈다. 둘은 한동안 실없는 문자를 주고받았다. 가볍지만 담긴 마음만큼은 가볍지 않은 그런 문자들이 밤새 쌓였다.
*
월요일의 과외가 끝나고 수현은 두 모녀에게 향기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물었다.
“음, 부드럽고 달달한 향인데...약간 포근한 카페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달달한 게 좀 안 맞긴 한데... 그런 느낌이에요.”
수업이 끝날 때 물어본 소현의 말이었다.
“아, 향기요? 약간 시원시원한... 아, 예전에 우리 잘생긴 과외 선생님 생각나게 하는 향이네! 어쩐지 뭔가 기억 날 듯 말 듯 했는데!”
“그럼, 아빠. 읍!”
“아빠?”
집을 나올 때의 일이었다.
수현은 좀 더 데이터를 뽑기 위해 수업이 끝난 후, 대흥을 불렀다. 둘은 점심을 먹고 카페로 이동했다.
“야, 내 향수 냄새 좋냐?”
수현이 카페에 앉으며 일부러 코트를 조금 펄럭이며 앉고는 물었다.
“아, 너 향수 뿌린 거 맞냐? 은은하니 좋네. 별 거 다하고 다니네...”
대흥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은은해?”
“엉. 적당히 시원하고 안 쎄서 좋다. 요 얼마 전에 정현이 새끼가 클럽가자고 꼬시더니 향수를 들이 붓고 와서 택시 탔는데 옆에 있다가 코 썩는 줄 알았잖아. 너랑 잘 어울리는 듯?”
대흥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다가 간단하게 말하고는 문자에 집중했다.
“여친? 이번에 사귄?”
수현이 물었다.
“엉.”
“뭐하다 사귀었다고 했지?”
“술 게임 하고 놀다가... 막 분위기 타서. 그 뒤로 몇 번 만나다가 마음 맞는 것 같아서 사귀기로 했지.”
대흥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왜? 너도 요 번에 여자랑 뭐 있었음?”
대흥이 흥미롭게 말하며 핸드폰을 놓았다. 친구 무리 대부분이 고등학교 시절에 연애를 한 번씩은 했는데, 수현만 한 번도 한 적이 없었기에 흥미가 발동한 것이다.
“아니...그냥그렇게 만나는 게 신기해서 그렇지.”
수현이 연희일을 숨기며 말했다. 진짜 신기하기도 했다.
“너도 금방 사귈 걸... 게다가 sky에 신촌에 근처에 홍대 아니냐? 크...”
대흥이 생각만 해도 신이 난다는 듯이말했다. 그가 말을 하다가 뒷 쪽을 보고 멈칫했다.
“헐. 저기 다 개이쁘다!”
대흥이 슬쩍 그를 향해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수현이 몸을 돌려 대흥이 말하는 쪽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상당히 예쁜 여자 한 명과 그녀 정도는 아니어도 예쁜 여자 두 명이 있었다. 수현과 제일 예쁜 여자가 잠시간 눈이 마주쳤다. 수현이 갑자기 연희가 떠올라 슬쩍 웃음을 지었다. 상대도 그를 향해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수현이 살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야, 야. 너 보고 웃은 거 아닌가?”
대흥이 호들갑스럽게 속삭였다.
“개소리는...야, 너 문자 왔다.”
대흥은 얼른 핸드폰을 다시 잡았다.
“어, 야. 나 오래는 못 있겠다.”
대흥이 문자를 보고 말했다.
“왜? 여친 만나?”
수현이 물었다.
“응. 알바 시간 갑자기 바뀌어서, 시간 남는다고 놀아 달래.”
대흥이 약간 미안한 듯 말했다.
“아냐. 야, 나 그럼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온다.”
“오키여.”
수현은 조금 더 이런 저런 걸 알아봤으면 싶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화장실로 향했다. 그는 ‘예쁜 여자들’테이블을 지나치며 다시 한 번 아까의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들이 화장실 바로 옆 쪽 테이블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혹시 싶어서 그들을 스쳐지나가면서 코트 자락이 조금 펄럭이게 했다.
그는 화장실에 들어오자마자 거울을 보는 척하며 밖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야, 방금 들어간 훈남한테 섹시한 향 나지 않았어?”
“응? 누구? 아까 네가 눈 마주쳤다는 훈남? 지나갔으면 말 좀 해주지.향은 모르겠는데.”
“난 보긴 했는데, 얼굴은 그럭저럭인데, 향은 전혀.”
“진짜? 나 완전 찐하게 맡았는데.”
“얘 또 발동 걸린 거 아니냐? 딱 봐도 어린 애던데?”
수현은 그녀들의 말에 뭔가 수확을 얻은 듯 했다.
“저기 손 좀...”
“아, 죄송합니다.”
수현이 얼른 세면대를 비켜주었다. 그는 대충 머리를 매만지고 소변기로 향했다. 그는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세 여자의 다른 점. 눈이 마주쳤다?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그럼 눈이 마주쳐야 하나? 그는 어떻게 해야 더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아!”
그는 생각을 정리하고 손을 씻은 뒤에 거울을 보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첫 번호 따기를 이런 방식으로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수현은 심호흡을 하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가 나오자 동시에 세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래도 그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던 것 같았다. 수현은 그녀 중 처음에 눈이 마주치지 않았던 여자 중 한 명에게 다가갔다.
“저기, 아까 보고 마음에 들어서 그런데, 혹시 번호 좀 주실 수 있을까요?”
생각보다 말은 떨리지 않고 잘 나왔다. 여자는 앞자리의 여자 눈치를 슬쩍 봤다. 곤혹스러울 것이다. 친구가 마음에 든다고 한 남자가 자기 번호를 물어봤으니.
“죄송합니다. 남자친구가 있어서요.”
결국 여자는 수현의 핸드폰을 밀어냈다. 수현은 아쉬운 듯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처음 눈이 마주쳤던 여자의 표정은굉장히 좋지 않았다.
“야, 뭐야. 방금. 번호 딴거야?”
대흥이 놀란 얼굴로 그를 보며 물었다.
“실패임...”
수현이 간단하게 말했다.
“뭐?”
대흥이 놀란 얼굴을 유지한 채로 물었다.
“야. 너화장실 가서 저 여자들이 뭐라고 하는 지 좀 들어보고 와주라.”
수현이 급하게 말했다.
“야...그걸 꼭 들어야겠냐?”
대흥이 질색인 표정으로 물었다.
“응... 피드백 하려고... 부탁 좀 하자.”
수현이 대충 지어내며 말했다.
“아씨...알았다.”
대흥은 눈치를 보다가 화장실로 후다닥 들어갔다. 남자 화장실 안에는 아무도 없으니 잘 듣고 나올 것이다. 수현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아들이며 느긋하게 기다렸다.
“야...보니까, 네가 번호를 잘 못 딴 것 같은데...”
대흥이 와서는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라는데?”
수현이 급하게 물었다.
“아니... 정확하진 않은데, 누군 여전히 자긴 얼굴도 그렇고 향도 그렇고 다 별로라고 위로하고. 한 명은 보니까 괜찮긴 했다고, 뭐 향도 좋았다고 하고... 한 명은 자기가 잘 못 봤다고 생긴 것도 별로고, 생각해보니까 좋은 향이 아니라 냄새도 시궁창 냄새라고 막 짜증내던데...”
대흥이 약간 우물거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친구 욕하는 걸 전하기가 맘에 들지 않는 듯 했다.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흥이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야, 걍 지금 나가자.”
수현이 말했다. 대흥이 얼른 트레이를 들고 일어섰다. 그들은 카페 앞에서 헤어졌다. 대흥은 몇 번이고 괜찮냐고 물었다. 좋은 친구였다.
“야, 시도해보는거지. 나 간다!”
수현은 화창하게 말하고는 뛰듯이 걸었다. 그는 대흥과 멀어진 후 잠시 거리 구석에 멈춰 생각을 정리했다.
확실하려면 더 표본이 필요하지만...
1번. 감정이 동할 정도로 뭔가 컨텍이 있어야 향이 느껴짐.
2번.컨택의 정도나 향은 사람마다 다름.
3번.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가까운 향일 가능성이 높음. 좋으면 좋은 향. 싫으면 싫은 향.
4번. 느끼는 향이 변할 수도 있음.
5번. 특히 이성일수록 더 강하게 반응하는 것 같음. 언급을 꼭 해야 할 정도로 강렬한 듯함.
수현은 차례로 정리를 한 뒤에 핸드폰으로 간단히 내용을 작성했다.
그는 주변의 카페를 찾았다. 사람 마음을 가지고 노는 거라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비슷한 케이스를 몇 번 만들어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