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화 〉10 (10/94)



〈 10화 〉10

“아, 씨발아!  얘기가 여기서  나오는데?”

“뭐, 병신아. 내가 없는 얘기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웃자고  얘긴데,  그렇게 오바야?”

“아니, 시발년이 말 개좆같이 하네? 그게 그럼 할 말이냐? 그리고 맞는 말이야? 나 그냥 좆되라고 하는 말이지?”

보자하니, 한 녀석이 연희 앞에서 자기 가오도 살릴 겸,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옆 아이의 흑역사 같은 이야기를 주절댄 것 같았다. 그러다 예쁘고 마음에 드는 여자 앞에서 계속 흑역사가 털리던 아이 쪽이 빡쳐서 일어난 것이고.

“얘, 얘들아... 왜,  그래.”

“야, 애, 왜들 그래? 좋은 날인데. 둘다 참아~.”

여자 아이들은 놀라서 몸을 잔뜩 움츠렸고, 근처 몇 남자 아이들이 그 둘을 타일렀다. 다만, 싸우는 두 아이가 키가 약간 크고 인상이 강한 편이다 보니, 적극적으로 말리는 모습은 아니었다.

수현은 점점 긴장이 고조되는 것을 느끼고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향했다. 특히, 그가 빠르게 행동한이유가 있었다. 둘이 누군지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흑역사를 털린 쪽은 김민형. 판사 출신 대형 로펌의 변호사 아버지가 있다고 알려진, 청담동 부자로 통하던 아이였다. 평소에는 큰 문제가 없다가도, 술을 마시고 흥분하면 눈이 좀 돌아버리는 전형적인 ‘술이 웬수’인 타입의 아이였다. 특히 술을 마시면 연장을 드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도 돈많고 외제차 몰고 다니면서 돈도 잘 풀다보니 주변에 친구는 항상 많던 아이였다.

상대는...강종현. 강남에 있는 성형외과에서 대표원장을 하는 아버지를 둔 아이였다. 약간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아이여서 종종 선을 넘기는 해도 그렇게 모난 구석이 있는 아이는 아니었다. 문제는 그 잘난 척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종종 선을 넘는 것으로 보이는 아이였다. 오늘도 그 선을 넘는 경우인  같았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상대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이다.

김민형은 반성의 태도가 전혀 없이 도발하는 강종현의 모습에 제대로 눈이 돈 것 같았다. 그가 술병을 집어들었다. 동시에 수현이 그의 뒤에서 몸과 팔을 함께 포박하며 그를 뒤로 물렸다. 문제는 민형이 연장을  것을 보자, 상대도 흥분했는지 민형을 향해 선을 날리기 시작한 것이다.

다행히 조금 뒤늦게 달려온 병훈이 강종현을 뒤로 잡아끌어서 민형이 맞는 일은 없었다. 민형은 수현의 품에서 발버둥쳤다.

“얘 소주병부터 뺐어!”

수현이 옆에서 허둥거리고 있는  남자아이에게 말했다.

“야!”

수현이 다시 부르자, 그제야 그 아이는 억지로 민형에게서 소주병을 빼앗으려했다.

“시발! 안 놔? 개새꺄 저리 꺼져! 야! 시발 이리 와! 이리 오라고!”

민형은 난폭하게 수현과 옆의 아이, 그리고 강종현에게 외쳐대며 날뛰었다. 병훈 쪽도 힘겹게 강종현을 잡고 있었는데, 그도 무어라 외치고 있었다. 민형이 날뛰다가 의자를 걷어찼고, 소주잔이 떨어지며 깨졌다. 연희가 놀라며 어깨를 움츠렸다. 수현이 이를 악물고 그를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강종현도 의자를 걷어찼다. 다행히 그쪽은 의자만으로 끝이 났지만, 테이블에 있던 연희는 몸을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병훈아, 걔 데리고 아예 나가! 밖으로 나가!”

수현이 병훈에게 외쳤다.

“니들도 좀 병훈이 도와!”

수현이 병훈이 주변에서 애매하게 있는 애들에게 화가 나서 외쳤다.  명이 그를 도와 강종현을 끌고 나갔다. 수현은 혼자서 민형을 잡고 제일 안쪽의 빈 공간에 붙었다.

“김민형, 심호흡해.”

“이, 씨발... 놔봐.”

민형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꿈틀거렸다.

“민형아. 빡친 거 알겠는데, 좀만 침착하자.”

수현은 민형을  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수현은 운동을 배우기 전에도 그런대로 힘이 좋은 편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운동도 하고, 전생에서는 격투기도 수련한 상태였다. 민형이 빠져나올 방법은 없었다. 수현은 민형이 진정할 동안 조금 기다렸다. 민형의 숨이 조금 침착해지기를 기다렸다.

“야, 야. 무슨 이제 20살이 빨간  그으려고 그러냐?일단 소주병부터 놓자. 소주병부터.”

수현이 차분하게 말했지만, 아직 흥분이  가셨는지 민형은 병을 놓지 않았다. 수현이 억지로 병을 뺏어서 옆쪽으로 치웠다.

 순간, 강종현이 다시들어왔다. 민형이 일어나려고 했고, 수현이 그를 다시 잡았다.

“미친놈들아, 끌고 나가! 제대로 잡고 있으라고!”

수현이 외쳤다. 아이들이 다시 우당탕 소리를 내며 강종현을 끌고 나갔다. 문소리가 요란하게 났다가 조용해졌다. 사위가 고요해지고 음악소리만이 들려왔다.

“후, 야, 민형아 참어. 참어. 심호흡하고. 야, 좋은 날 이게 뭐냐. 여자애들도 놀랐잖아~.”

수현이 민형을 억지로 앉혀놓고 토닥이며 말했다. 민형은 조금 정신을 차리면서, 수현에게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튀어나가려 하지 않았다. 그는 수현의 말에 여자애들을 힐끔 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밖으로 나가지 않은 여자애들 몇 명이 얼어서  쪽에서 움츠리고 있었다. 특히, 같은 테이블에 있던 연희는 그대로 굳어있었다. 수현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작게 그를 토닥였다.

“그래, 진정하자. 진정. 야, 다 초면인데 이러면 너한테도 안 좋아. 걔가 아무리 개소리를 했어도 네가 좀만 참자.”

수현이 타이르듯 말했다. 사실 반쯤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아니... 시발 그 새끼가 없는 소리까지 하잖아, 병신이...”

민형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래, 보니까, 네가  빡치긴 했겠더라. 근데 걔도 술 들어가고 그래서 그런거지. 많이 먹는 거 처음이고 그러니까~.”

수현이 대충 동조해주며 말했다.

“아니, 그래도 시발, 친구 팔아서 지 가오 살리겠다고 하는 게... 시발이...”

“그건 걔가 잘못하긴 했지. 그건 네가 빡칠만 하긴 해. 팔 게 없어서 친구를 파냐. 그래도 응? 저기 여자애들 봐서라도 진정하자. 애들 놀랐잖아.”

그렇게 짐시 수현은 민형의 이야기를 받아주며 진정을 시켰다. 민형은 어느샌가 술이 오른 건지 힘이 많이 빠져 있었다.

“좀만 앉아있어. 알았지.”

수현이 조심스레 말하자, 민형이 고개를 끄덕이고 의자에 기댔다. 수현은 민형을 두고 일어나 상황을 정리했다.

“자, 자. 다들 일어나자. 여기 더 있으면 안 되겠다.”

숨죽이고 있던 여자 아이들 몇 명이 민형을 슬금슬금 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놓고 가는 짐 없는 지 잘 챙기고, 아까 급하게 나간 애들   챙겨줘.”

그제야 아이들은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짐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수현은 말을 마치고는 제일 상태가 심각한 연희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여전히 반쯤 얼어있었다. 불과 수십분 전만해도 맑게 웃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연희야.”

수현이 그녀를 부르자 연희는 눈알만 굴려 그를 바라보았다.

여자애들은 남자애들의 힘을 평소에는 잘 인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기껏해야 자기가 힘들어하던 짐을 번쩍 드는 정도에서 힘 차이를 느끼지만, 사실 그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는 것을  모른다. 그래서 가끔 코앞에서 그 폭력성을 마주하게 되면, 상당히 놀라거나 무서워서 굳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남자들의 정제되지 않은 폭력성은 자신들의 상상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수현은 골치가 아팠다. 자신이 주도한 드라이브로 전보다 분위기가 훨씬 좋아진 술자리라 생각했는데, 이건 오히려  안 좋은 상황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연희야, 괜찮아?”

“아...”

그제야 연희는 적게 몸을 움직이며 입을 뗐다. 손과 입술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참...이 상황에서 한심하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수현은 그 모습마저 참 예쁘다고 느꼈다. 아니, 더 여리게 보이는 것이 어쩌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많이 놀랐구나. 애들이 술이 들어가서 흥분해서 그랬나봐.... 물 한잔 줄까?”

수현이 최대한 침착하고 다정한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어...어. 아...아니.. 이, 이거  마시면 될 것 같아.”

연희가 소주잔을 들고 작게 떨며 소주를 입으로 가져갔다. 수현이 얼른 손을 뻗어 그녀의 잔을 잡았다. 연희가 움찔하자, 수현이 손에 힘을 빼고 부드럽게 잔을 쥐었다.

“아냐.  지금 취했어. 그거보단 물이 나을 거야. 기다려봐.”

수현은 조심스레 잔을 뺏어서 내려놓고, 제일 미지근해보이는 물통을 찾아왔다.

“원래 좀 따뜻한 게 나을 텐데, 일단 이거라도 천천히 마시고 있어.”

수현은 물을 따라 연희에게 주고는 다시 민형에게 돌아갔다. 민형은 정말 제대로 취기가 오른 듯, 완전히 뻗어 있었다. 마치 마취제를 맞은 동물처럼 팔다리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수현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몰래 술을 더 마셨나 싶을 정도의 변화였다.

“민형아. 괜찮아? 많이 취했어?”

수현이 민형을 작게 흔들며 물었다.

“어...어...”

민형이 풀린 눈으로 수현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무슨 약이라도 빤 느낌이었다. 수현은 머리를 긁적이며 먼저 나가있던 어아둘 몇 명에게 도움을 구했다.

몇 명의 아이들은 사장과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 변상이나 그런 것 때문일 것 같았다. 뭐 사실 소주잔 정도야  배달 올 때 가져다 달라고 하면 얼마든지 가져다주기도 하고, 미래의 단골 고객을 잡는다는 차원에서 사장이 선심을  가능성도 있었다. 부서진 것들이 그렇게 많지도 않고.

뭐, 어쨌든 그건 저기 있는 대한민국의 차세대 엘리트들이 알아서 사장과 쇼부를 볼 일이고.

“연희야, 일어날  있겠어?”

수현은 적당히 민형을 처리하고 연희에게 다가갔다. 연희는 아직도 컵을 잡은 손을 조금 떨고 있었다.

“으, 응. 이제 나가는 거야?”

“응. 여기 있긴 좀 그렇지. 2차로 다른 곳을 갈지 어떨지는 모르겠네. 일단, 나가긴 해야 할  같아.”

“응. 잠시만.”

연희는 물컵을 내려두고, 조심스레 일어나려 했다.그러나 아직 긴장이 풀리지 않은 그녀는 결국 테이블을 잡고 휘청였다.

“자. 일단 여기 겉옷부터 입고.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일어나도 돼. 힘들면 애들 먼저 보내고 나가도 되니까.”

수현은 연희의 짐들을 챙겨서 그녀가 나갈 준비를   있도록 도왔다. 연희는  번의 심호흡 끝에 스스로 일어났다.

“핸드폰이랑 지갑은 다 들어있지?”

수현이 핸드백을 들어보이며 물었다. 연희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걸을 수 있겠어? 좀 부축해줄까?”

수현이 다른 의도 없이 물었다.

“아냐. 괜찮을 것 같아.”

연희가 억지로 옅은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몇 걸음을 떼었다. 그러나 역시 술기운과 하이힐, 그리고 긴장이 풀린 다리로는 무리였다. 그녀는 휘청거렸고, 수현이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 연희가 약간의 미안함과 고마움 그리고 민망함으로 수현을 바라보았다. 수현이 괜찮다는 듯이 가볍게 웃어주었다.

수현은 천천히 그녀를 부축해 나오면서 사장을 항해 살짝 고개를 숙여 미안함을 표했다. 사장은 장사 베테랑답게 해탈했다는 표정으로 인자하게 그들을 보내주었다.

밖으로 나오자, 상태가 아주 메롱이던 민형은 외고4인방 중 다른 한 명과 떠났고, 종현만이 저 멀리서 다른 외고4인방 한 명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릭 다른 아이들은 수현과 연희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연희야, 괜찮아?”

여자애들이 다리 풀린 연희에게 다가와 걱정스레 말하며 부축했다. 연희는 여저들의 손에 이끌려 근처 계단에 앉았다.

“아씨, 좋자고 모인 일인데 이게 무슨 일이냐~.”

병훈이 난감하다는 얼굴로 머리를 굵적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어쩄든 이 정모를 추진한 사람은 그였다. 그러니 이 사태에 대해 그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의 눈길이  가능성이 있었다. 왜 아무것도 아닌 애가 정모 추진을 해서 일을 벌이냐는 등의 말이 돌 수 있다는 의미다.

“음, 어떻게 할까? 2차 가기도 좀 그렇지? 너희는 어떻게 하기로 했어?”

수현도 약간 난감한 말투로 말했다.

“그래도 아직 10시도 안  시간인데, 솔직히 집가기에는 너무 이른 것 같아서, 그냥 몇 멍은 가볍게 호프나 노래방 갈까 그러고 있고, 몇 명은 집 갈  같고...”

남자 애 한 명이 툴툴 거리며 말했다.

“하, 시벌. 아니 갑자기왜 싸움질인거야.  새끼들은.”

다른 아이가 바닥을 툭툭차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의 눈빛이 강종현에게 날카롭게 날아가 꽂혔다.

술 마시고 말이  헛 나왔나봐.“

수현이 씁쓸하게 말했다.

“아, 일단 쟤네 보내고, 생각햅자. 어디를 가든.”

키가 작고 뿔테 안경을 낀 남자 아이가 뒤의강종현 쪽을 힐끗 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전보다 저들의 이미지가 더 안 좋아질 것 같았다.

“저기, 수현아. 잠깐 와봐!”

소영이 남자무리로 다가와 수현을 불렀다.

“나? 지금?”

“응. 지금.”

수현은 약간 어리둥절해 하며 그녀를 따라갔다.

“연희 집 보내줘야 할 것 같은데, 연희가 힘이 없어서. 우리가 부축하긴 힘들고, 네가 좀 도와주라.”

소영이 말했다.

“...내가?”

“응. 연희 저런 데 혼자 보낼 수는 없잖아.”

소영이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이 말해서 수현이 되려 할 말이 없었다.

“그렇긴...하지... 알았어.”

수현이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럼  데려다 줘야 한다? 알았지?”

소영은 웃으며 수현을 연희 앞으로 떠밀었다.

연희는 그를 보고 약간 힘없이 웃었다. 눈가가 살짝 부어있는 것을 보니, 그 사이 좀 울었던 것 같았다.

“못 일어나겠으면 업어줄까?”

수현이 말했고, 분위기를 환기 시키려는 듯이 소영이 오~남자다~라며 분위기를 띄웠다.

연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데려다 주고 올게.”

수현은 연희를 업고 길을 걸었다.

“어휴, 연희  오늘 액땜 많이 했다. 일찍 와서 욕보고, 싸우는 것도 보고, 올해 되게 잘 풀리려나보다.”

수현이 어색하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수현이 괜한 말을 하는 이유가 있었다. 연희가 가는 내내 그의 목을 꽉 안은 채로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고 있자, 몸이 반응해 오는 것을 이겨내기 위해서였다.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만 했다.

얜 왜 이렇게 목덜미에 파고드는 거야... 여기서 더 서면 진짜 안 되는데....

20살 남자의 육체를 너무 모르는 거 아닌가싶었다. 그는 욕망과 불편함과 주위의 시선과 싸우며 걷고 있었다.

문제는 다른 생각을 하려고 노력해도 목덜미에 닿는 그 숨결 때문에 죽을 맛이었다. 솔직히 자신이 지금 신촌의 버뮤다로 가지 않고 있는 것만 해도 스스로를 대견하다고 칭찬하고 싶을 만큼의 욕망이 차올랐다. 그의 몸은 말 그대로 불과 얼음의 노래를오가고 있었다. 이 정도면 담금질이었다. 뭘 그렇게 단단하게 만드려고 그러는지 모를.

수현은 끈질기게 버티며 연희를 등에 업고 대로변으로 나왔다.

“연희야, 택시타고 갈래? 아니면 지하철로 갈까?”

그는 땀을 흘리며연희에게 말했다.

“지하철... 타면 돼.”

연희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수현은 연희를 업고 계단을 내려왔다. 밝은 곳에서 보니 취기가 많이 올라와 얼굴이 새빨갛고 눈이 살짝 풀려 있었다.

“너, 혼자 못갈 것 같은데... 집이 어디야?”

“나...봉천역... 서울대입구 바로 전 역...”

연희가 약간 풀린 발음으로 말했다.

“한...30분 걸리겠네. 가자. 데려다 줄게.”

수현이 연희의 손을 가볍게 끌며 말했다. 연희는 거절하지 않고 그의 손에 이끌려 개찰구를 통과했다. 토요일의 2호선은 붐볐지만, 다행히 홍대입구에서 많은 사람이 내려서 그들은 운 좋게 자리에 앉아서 갈  있게 되었다. 연희는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수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수현은 그녀의 숨결을 실시간으로 느꼈다. 그는 솟아오르려는 20살의 자신과 싸워야만했다. 주변의 부러워하는 시선도 신경 쓰였다. 바지가 툭 튀어 나온 게 보일까봐.

전철은 구로디지털단지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수현은 새근거리는 연희를 조심스레 깨웠다.  늦게 깨우면 자신의 문제 때문에 같이 내릴 수 없을  같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진정시키려면 이쯤에서 그녀를 조금 떨어뜨려 놓아야 했다.

“연희야.”

수현의 목소리가 조금 갈라져서 나왔다. 그는 목소리를 조금 가다듬고 다시 연희를 깨웠다.

“연희야. 이제 다 왔어.”

수현이 조금 흔들어 깨우자 연희가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아...미안. 많이 무거웠지.”

연희가 약간 수현의 눈치를 보며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아냐... 피곤했을 텐데. 정신  들어? 정신 들라고 일부러 좀 일찍 깨웠어.”

수현이 괜히 도둑이 제 발 저리듯이 궁색하게 말을 더했다.

“응...고마워.”

둘은 내릴 때까지 잠시 말이 없었다. 봉천역에 가까워지자 연희가 일어나려다 휘청였다. 수현이 얼른그녀를 도왔다.

“데려다 줄게. 같이 가.”

수현이 말하자, 연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봉천역에 도착하자 둘은 마치 연인처럼 붙어서 내렸다. 누구든 그들을 본다면 사귄지 얼마 되지 않은 커플이라고 생각할 만큼 다정해보였다.

“이쪽 길이야.”

연희가 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거리는 연희의 힐이 엉성하게 또각 거리는 소리로 작게 울렸다.

“수현아.”

얼마쯤 걸었을까, 꽤나 또박또박해진 말투로 연희가 그를 불렀다.

“응?”

“오늘 내내 고마웠어.”

연희가 그에게 생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약간은 어둑한 가로등의 빛을 받은 그 미소는 더할 나위 없이 밝았고, 아름다웠다. 수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 내가 뭘...”

수현은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큼, 가자. 피곤할 텐데...”

수현이 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말했다.

“응!”

연희가 대답했다. 둘은 조금 전 보다 조금 더 박자를 맞춰서 걸음을 옮겼다.

“여기야.”

그녀는 산 바로 아래 있는 건물에 도착해 말했다.

“좀 머네...”

수현이 약간 걱정이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긴 한데, 그래도 여기가 고시촌이고 해서 의외로 방범은 괜찮대.”

연희가 작게 웃어보이며 말했다.

“그리고 여기 여자 전용이기도 하고.”

연희가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둘은 잠시 어색하게 우물쭈물 거렸다.

“그럼... 가볼게.”

수현이 먼저 말했다.

“아! 응! 그렇지.”

연희가 대답했다.

“오늘 힘들었으니까, 푹자고.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수현이 당부하듯 말했다.

“응. 이제 괜찮아졌어.”

연희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다행히 억지로 짓는  같은 웃음은 아니었다. 수현이 마주 미소지어주었다.

“그럼 간다. 잘 자!”

수현이 손을 흔들었다. 연희가 작게 입을 벙긋거리다가 마주 손을 흔들었다.

“응. 조심히 가.”

둘은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수현이 뒤를 돌아 걸었다. 연희는 잠시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수현은 가로등 아래에서 보았던 연희의 미소가 계속 떠올라 미칠 것 같은 기분으로 언덕을 내려갔다. 무슨 정신으로 지하철을 다시 탔는지 그는기억이 없었다. 정말 20살짜리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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