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70 대한제국-118화 (118/131)

〈 118화 〉 Ep12. 배신자의 밤 (8)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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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같은 어둠 속이었다.

며칠 째 잠을 자지 못한 김진혁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이 돌처럼 굳은 기분이었다. 잠을 자고 싶었다. 그저 잠을 자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독방에 같힌 채로 의자에 묶인 남자 앞엔 깜빡깜빡 정신사납게 구는 밝은 전구가 있었다.

"이 새끼 조는구만. 뿌려!"

그러자 양복을 차려입은 백인 남성이 김진혁 중령의 얼굴에 냉수를 뿌려버렸다. 꾸벅꾸벅 잠을 자려던 그는 충혈된 눈을 부릅뜨며 오한을 느낀다. 이 빌어먹을 독방으로 말할 것 같으면 에어컨이라도 틀어놓은 건지 5월인데도 늦가을 저녁처럼 추워서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떨게 만들었다.

"남의나라에서··· 군인을 잡아다가 수면고문을···."

몇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시간 감각을 상실해버린 남자는 오늘로 며칠째 잠을 못 자고 있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인간은 3일만 잠을 자지 못해도 미쳐가기 시작하는데 허공에 별이 보이는 걸 보면 이미 미쳐버린 거 같다.

그들은 김진혁 중령의 팔뚝에 주사바늘을 꽂았다. 정신이 흐리멍텅해지며 겪어보지 못한 쾌락이 느껴진다. 비유를 하자면 술이 한번에 10병 분량으로 들어가 뇌가 거꾸로 뒤집힌 거 같은 기분. 이것은 자백제였다.

"난 진짜 아무것도 몰라···."

"그럼 아는 거라도 털어놔야죠. 김진혁 중령님."

익숙한 조선말이 들렸다.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아마 덕수궁의 배신자일테다. 박진희. 천하의 죽일년.

"당신 진짜 크게 실수하는거야··· 난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고···."

"황제 폐하를 알현해서 핵무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셨죠? 다 알고 데려온거에요."

진희가 테이프 하나를 틀었다. 라디오처럼 생긴 물건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대화 내용이 덕수궁에서 나눈 폐하와의 밀담이었다.

<그럼 방법이 없는 거 아닙니까?>

<핵무기를 용인받으려면 발상을 전환시켜야 해. 형과 아우가 아니라 동등한 친구로 인정받아야 하지.>

<하지만 생각해봐. 동생이 형과 맞먹으려 들잖아. 어느 형이 이런걸 가만두겠나? 서열관계를 확실히 정리하려 들겠지. 국제사회에서 이런 상황은 목숨을 걸어야 해.>

천천히 소리를 경청하던 김진혁이 실소를 하며 말했다.

"황제 폐하의 집무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했다고? 미친년··· 넌 지옥에 떨어질거야."

"잔말 말고 핵시설에 대한 모든 걸 불으시죠."

"너 지금 크게 실수하는거야. 나한테 의존하면 안돼. 난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고. 바보처럼 나 하나 잡아다 고문해봐야 정보로서 얼마나 가치가 있겠어? 안 그래?"

"그건 저희가 판단할 문제구요. 핵시설에 대한 모든걸 불으시죠."

"정말 모른다니까? 같은 질문을 몇 번이나 반복하는거냐고···."

"핵시설에 대한 모든 정보를 불으세요."

"몰라, 모른다고!"

자백제가 한번 더 들어왔다. 이번엔 반대쪽 팔이었다.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은 쾌락이 환각을 일으켰다. 눈앞에 보이는 배신자가 덕수궁의 비서실장님으로 보일 지경이니 분명히 미쳤다.

<진혁군? 어서 저에게 핵시설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세요. 얼마나 정확히 알고 있는지 검증을 해봐야죠.>

"저는···."

그럴리가 없다. 이분이 비서실장 이화일리 없다. 분명 배신자인데 나를 속이고 전하를 속이고 자기 남편까지 속인 미친년인데···.

<진혁아~♥>

그래, 비서실장님일리 없다. 눈앞에 앉아있는 여인은 황태녀 전하셨으니까. 이은서. 나의 주군, 나의 사랑, 이곳이 칠흑같이 어두웠던 이유는 달빛아래 고고히 서있는 경회루. 둘만이 데이트를 즐기던 술자리였으니까. 어질어질했던 것도 실은 술 때문이었다.

<왜 그래 진혁아? 어디 아파?>

<내가 또 어명이란 걸 내려야 알아듣겠니? 우리 진혁이. 귀 틀어막지 말고 눈 뜨고. 어명이다?>

"황태녀 전하는 임금이 아닙니다."

진혁이의 말에 은서가 답했다.

<어허. 내가 이 나라의 유일한 계승권자인데. 고귀하신 몸이 내리는 명령을 거부할 셈이야?>

황태녀 전하가 명령하셨다. 이 나라 유일한 계승권자이자 고귀하신 몸이 내리는 명령이 김진혁 중령의 경계심을 무너뜨린다.

"그래, 전하는 알고 계셔야 해. 핵무기에 대한 것들을···."

그러자 은서 옆에 서있는 배신자 박진희도 속삭이듯 유혹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요, 진혁씨. 전하도 알고 계셔야 하잖아요? 모든 것의 진실을. 대한제국의 핵무기가 어디에 있을까요?"

"하지만 전 핵무기가 어디있는지 모릅니다."

"아직도 숨길 셈이에요? 전하가 궁금해하시잖아요."

"정말로 모릅니다. 그곳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은 눈이 가려지거나 창문이 없는 버스로 이동하니까요.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걸 아는 사람은 운전사뿐이겠죠."

"아는걸 털어놓으세요. 아는 것만 말씀하시면 돼요."

"엄청나게 추웠습니다. 이상했죠. 그 때는 겨울이 아니었을텐데··· 전하께서 평양에 근무하시는 동안 휴가를 썼었거든요. 비서실장님이랑 차를 타고 핵시설을 방문했는데··· 왜 겨울처럼 추웠을까?"

"그래서 거기가 어디일까요? 당신은 알고 있을거에요. 비서실장님이랑 황제 폐하랑 핵개발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직간접적으로 들은게 많았을거에요. 어디였을까요? 그곳이."

김진혁은 말했다.

"냉동창고."

"냉동창고?"

"핵시설이 냉동창고 안에 있다고 한 거 같군요."

그러더니 진희를 포함한 모든 CIA 요원들이 어처구니 없는듯 웃어재꼈다. 그러자 진희가 강조하여 말했다.

"핵시설을 어떻게 냉동창고 안에 집어넣어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죠. 황태녀 전하께 거짓말을 하실 셈인가요?"

그러자 약에 취한 김진혁도 웃어재끼며 말했다.

"당연히 사실이 아니겠죠."

"그래요, 거짓말하지 말고 진실을 이야기하세요."

"비유일테니까. 직접적으로 위치를 말하긴 뭐하니까 암호 같은 걸로 부른 걸겁니다. 냉동창고라··· 조선반도에서 그렇게 비유할 만한 곳이··· 느낌이 오지 않나요? 한 여름에도 냉동창고처럼 시원한 곳. 척하면 척이죠. 개마고원일테니까."

"개마고원?"

"사실 저도 궁금했습니다. 핵시설이 어디에 있을까? 50년대부터 핵개발을 한 거 같은데 그 시절은 가난했죠. 돈도 없는 나라가 시설을 짓고 핵무기를 연구하려면··· 개마고원입니다. 개마고원엔 금이며 구리며 마그네사이트며 지하자원이 즐비해서 광산이 많았죠. 광산 시설 하나를 개조해서 쓴다면··· 핵시설로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러자 진희를 포함한 CIA 요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꽤 믿을만한 정보였고, 이걸 토대로 기관이 항공 정찰과 지상 정찰을 병행한 결과 유력한 시설 몇 곳을 찾아내는데 성공한다. 이것이 수면고문과 자백제를 병행해 얻은 정보였다.

김진혁 중령은 황태녀 전하께 진실을 털어놨다는 해방감에 젖어 웃고 있었다. 하지만 취조실을 나가려던 진희가 바라보기에 그것은 자백제에 취해있을 뿐인 미친놈이었다.

그런 남자를 불쌍히 내려다보며 진희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미안해요. 대한제국을 지킬려면 이 방법 뿐이라···."

***

6월 6일. 김진혁의 실종이 2주가 되도록 계속되고 있었다.

대한제국의 현충일. 황제는 이범석 총리를 비롯한 내각 인사들과 함께 서울국립현충원을 찾아 향을 올리니 그곳엔 서북방위사령관의 제복을 차려입은 은서도 있었다. 신랑이 도망을 가버려 결혼도 못하고 평양으로 돌아갔던 황태녀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실연에 잠겨 있었다.

'진혁아···.'

언론에서도 그렇고 내각 인사들도 그렇고 철썩같이 붙어있던 동갑내기 남자가 사라져있으니 이상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나이 30세. 혼기가 한참 지나버린 황태녀의 후사 문제가 모두를 불안하게 하기 시작했다.

<이거 아무래도 관계가 틀어진 거 같지 않은가?>

<이러다 황실이 단절되겠어. 다른 신랑감이라도 알아봐야 하는거 아닌가 모르겠군.>

<큰일이야. 큰일.>

언젠가 은서가 했던 말처럼 황태녀와 결혼하겠다며 줄을 선 남자들이 이 나라에 잔뜩이다. 황태녀의 결혼 상대로 점쳐지던 장교가 사라지니 가장 먼저 대기업 관계자들이 덕수궁의 경제수석인 최 수석을 찾았다.

<혹시 괜찮으시면 우리 아들을 한번···.>

<저희 아들은 어떠십니까? 이 나라 전자 산업을 주도할 저희들이 황실과 힘을 모으면 강력한 추진력으로 대한의 경제가···.>

제계만 반응한 게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 군부에서도 동요가 일어났는데 그들은 서북방위사령부 부사령관 전 장군의 아들을 유력한 후보로 예상했다. 황제로부터 큰 신뢰를 받고 있는 39만 장병의 부사령관은 평양 사령부를 안정적으로 지휘하고 있었고, 이런 지휘능력이 혼사 문제에도 영향을 줄거라 여겼다.

<우리가 믿을 건 전 장군님 뿐이야! 이분과 함께라면 우리의 출세길도 탄탄대로지!>

이렇게 자신의 신랑감을 놓고 벌이는 각계각층의 분위기를 뒤로한 채 리무진을 타고 평양에 돌아가는 은서는 서글픈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진혁아 미안해···."

그런 은서의 옆자리엔 아버지인 이연이 앉아 딸의 손을 꼬옥 잡아주고 있으니 등을 토닥여주는 거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진희가 최선을 다해 찾고있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찾아주면? 화가 엄청 났을텐데 용서해줄까?"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거야. 만약 정말로 화가 났다 하더라도 내가 잘 설득해볼테니까. 너무 상심하지 말고."

"아빠···."

"애비만 믿어. 평양에 돌아가거든 의연하고 씩씩하게 굴고. 알았지?"

"근데··· 아빠는 왜 평양에 가는거야?"

"평양이 아니라 백두산에 가는거야. 현충일이잖냐? 추운 곳에서 고생하는 장병들도 격려해야지. 널 사령부에 바래다주고 곧바로 올라갈거니까 신경쓸 필요 없어."

"응···."

6월 6일 현충일. 이연의 마지막 일정은 리무진을 타고 백두산에 가는 것이었다. 동북지역을 지키는 사령관들과 함께 전방부대를 시찰하며 장병들을 격려하고, 백두산 천지에 올라가 풍경을 감상하니 그곳엔 별을 달고 있는 장군들이 한가득이었다.

"자네들이 이 나라의 핵심이야. 국가와 국민을 지키는 국군으로서 항상 최선을 다해주게."

"예, 폐하!"

하지만 백두산에 온 이유는 따로 있다. 미국의 CIA로부터 황제의 동선을 숨기기 위해짠 위장 전술이었기 때문이다.

장군들을 태운 지프차 행렬과 황제의 리무진 행렬이 복잡하게 얽혀 터널 속의 어둠에 이르렀을 때, 황제는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선글라스를 쓴 채 리무진에서 내렸다.

그의 앞엔 정장으로 바꿔입은 4성 장군이 서있었다.

"자넨 지금부터 내 리무진을 타고 눈속임을 하게. 알았나?"

"예, 폐하!"

그렇게 말하는 이연은 장군이 타던 지프차에 올라 터널을 빠져나왔다. 지프차 뒷자석에 타고 있는 이연 옆에는 남장을 하고 있는 이화가 중령 계급장을 달고 부관 시늉을 했다. 그렇게 차량 행렬들이 터널을 빠져나왔을 땐 구불구불한 산길 속 고속도로에서 갈림길이 나왔다. 리무진을 태운 가짜 황제의 행렬과 지프차를 타고 있는 진짜 황제의 행렬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갈라져나갔다.

수풀 속에 숨어서 감시하던 CIA 요원들이 무전을 날렸다.

"리무진이 터널을 나왔습니다."

[터널 안에서 차를 바꿔탔을거야. 지금부터 제3야전군 사령관의 행렬을 추격한다.]

"예!"

이 정도로 속을 미국이 아니다. 황제를 추격하는 CIA의 요원들이 차를 타고 미행을 시작하니 황제를 호위하게된 제3야전군사령관의 경비대 트럭 뒤로 흑색 미니밴이 17m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붙기 시작했다. 그런 미행이 장장 2시간동안 이어져 구불구불한 산길을 오르내리고, 무수히 많은 터널을 지나 광산 2개 정도를 지나쳤을 때, 황제를 태운 위장 행렬이 버려진 탄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황제가 터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지점은?]

"예측하신 그곳이 맞습니다."

[됐어! 수고했어!]

황제의 은밀한 핵시설이 미국의 정보망에 의해 최종 포착됐다. 시설을 확보하고 황제까지 암살하고, 그러면서도 누구에게 걸리지 않은 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기회가 CIA에 들어왔다.

거리낄 게 없어진 화이트 지부장은 CIA 직속 비밀 특수부대인 태스크포스 75에 명령을 내렸다. 붉은 군대의 군복을 입고 AK-47 소총을 들고 있는 그들이 소련군 특수부대로 위장한채 헬기장으로 향하고 있으니 이곳은 평양에 위치한 주한미군의 기지였다.

헬기장에서 화이트 지부장이 말했다.

"소련에 스페츠나츠라는 비밀 특수부대가 있다더군. 오늘 황제의 죽음은 그들 짓으로 알려질거야. 자네에게도 기회를 주지. 어떤가?"

하지만 진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전 황태녀 전하의 비서관입니다. 제 손으로 직접 그 남자를 죽였다간···."

"흠··· 역시 그런가? 알겠네. 그럼 안가에서 기다리게."

"예, 지부장님."

진희는 다시 한 번 취조실로 향했다. 별 이유는 아니었다. 그냥 김진혁씨와 대화를 하면서 황제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 모두 한가지 사실을 경시하고 있었다. 자백제는 진실을 말하게 하는 약이 아니다.

이것이 재앙이 될거라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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