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 Ep8. 한국식 입헌군주제 (3)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https://t.me/NovelPortal
1974년 2월 10일.
덕수궁 비서실장 이화가 국회 하원의 호출을 받았다. 언론탄압에 대한 황실의 입장을 밝히라며 신민당 대표 김영현이 강력히 요구한 탓이다.
"차라리 황제를 부르지 그랬습니까?"
중앙청 회의실에서 부총재 김대정의 물음에 김영현은 이렇게 답했다.
“맘 같아선 그러고 싶은데 그래도 입헌군주제잖습니까? 우리 모두 명목상으론 신하들이에요. 신하가 군주를 오라가라 하는 건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이 나라의 주인은 국민입니다. 황제는 민족의 대표일뿐. 국민이 부르면 응해야 맞지요."
"그랬다간 역풍이 불 수도 있어요. 대중들의 황실 지지도 고려해야지요."
그렇게 지도부가 직접 출석한 회의실에서 오른쪽엔 한국독립당이 앉고 왼쪽엔 신민당이 자리하니 황실을 상대로 한 국회 하원의원들의 투쟁이 시작됐다.
김영현이 물었다.
“한일수교 당시 각 신문사마다 중앙정보부의 요원이 파견되어 있었다. 그들은 신문사 직원들에게 어떤 기사를 실어야 하고, 어떤 기사를 실으면 안되는지 간섭을 하고 있었다는 폭로가 있었습니다. 이에 황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화는 당당하게 말했다.
“사실입니다.”
"그건 누구의 지시였습니까?
"제가 지시했습니다."
"예?!"
의원들이 술렁였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오만방자할만큼 당당한 태도. 짧고 간결한 이화의 대답에 김영현 총재가 당황하듯 물었다.
“지금 인정하신겁니다?”
“예, 폐하를 보좌하는 덕수궁 비서실장으로서 맹세합니다. 제 말엔 한치의 거짓도 없을 것입니다.”
"허 참···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불법 행위를 아주 당당히 인정하시는군요?"
"불법은 아닙니다. 중정에서 요원을 파견하여 신문사에 간섭했던 것은 강제성이 없는 '조언'이었으며, 실제로 당시 신문3사의 편집자들은 중앙정보부의 권고를 무시. 한일간에 발생했던 일련의 사건들을 자유롭게 보도했습니다."
"하지만···."
이화는 분명히 강조하여 말했다.
“작년에 보도된 일련의 기사들을 똑똑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언론은 자유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감놔라 대추놔라 언론장악을 시도한 건 사실 아닙니까?”
“권고랑 명령은 다릅니다. 중앙정보부는 국내외 모든 정보를 수집 관리하는 곳이고, 이에 국가 안보 차원에서 조언을 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김영현은 떠올렸다. 당시 신문사 기자들이 자신들에게 한 증언. 그것을 토대로 상상하는 당시의 모습.
<누구 맘대로 이딴 기사를 실어!>
<쪽바리들한테 우리 동포가 구타를 당했는데 보도관제가 대수야? 넌 씨발 애국심도 없어!? 책임은 내가 질테니까 당장 기사 실어!>
그 때의 일이 정말 ‘권고’라 할 수 있었나? 김영현은 의구심을 갖고 재차 강조하여 물었다.
“기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건 명령이었고 강요였습니다. 보복도 있었죠? 지금 독립신문에 기업들 광고가 한푼도 안 들어오는거 황실이 관여한 거 아닙니까?”
“추측성 질문일 뿐입니다. 합당한 증거를 가져온 다음 질의 부탁드립니다.”
김영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옆자리에 앉아있는 김대정 부총재와 의논을 해본다.
“이거 분명 황실이 관여된겁니다. 이것만 밝혀내면 황실의 위법행위를 입증할 수 있어요.”
그러자 김대정 부총재가 말했다.
“저도 황제의 소행이라 봅니다만, 결정적인 증거가 없으니···.”
그리곤 헛기침을 하며 김대정 부총재가 바톤을 넘겨받아 말했다.
“애초에 중정이 왜 황실의 지시를 받는겁니까? 정부조직법상 총리의 지시를 받는 구조일텐데요?”
이화는 말했다.
“대한제국의 법률은 황실의 정치 관여를 금지하지 않습니다. 이에 따라 정당한 통치행위를 했을 뿐입니다.”
영국, 일본과 다른 ‘한국식 입헌군주제’의 결정적인 특징. 군주가 직접 정치 의사를 밝히고 국정운영에 개입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이연이 혁명을 빙자한 친위쿠데타로 권력을 틀어쥔 다음부터 생긴 일이었다.
그리고 이건 신민당이 제일 싫어하는 것.
“황제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 세습직 군주가 국정운영을 좌지우지하는 것. 그것 자체가 독재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한국독립당은 황제 폐하의 정치 참여를 지지하는 정당입니다. 공정한 선거로 국민의 선택을 받아 이루어진 행위를 독재라 표현하시는군요.”
이화의 물음에 김대정은 물러섬 없이 당당히 반박했다.
“이 나라는 입헌군주제입니다. 국민의 손으로 선출된 총리와 내각이 통치를 해야지 황제가 해선 안된단 말입니다!”
그러자 이화는 냉소적으로 답했다.
“누가 안된다던가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조선황실법 어디에도 황실의 정치참여를 금지하는 내용은 없습니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생각하면 이건 명백히···.”
“조선황실법에 황실의 정치참여 금지 조항이 사라진건 63년 12월의 일이었습니다. 총선에서 한국독립당이 과반수 승리를 거두면서 국민의 뜻에 따라 폐지했죠. 제 말 틀린가요?”
이화의 물음에 김대정 부총재가 불편한 침묵을 지켰다.
“대한제국 황제는 국군통수권자이며, 법률안거부권을 가지고, 국회의 해산권을 갖습니다. 국회가 해산되면 가까운 시일 내에 재선거를 실시하게 되죠.”
“그건 잘못된 악법입니다.”
“국민의 뜻에 따라 정당한 입법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법률입니다.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권에 진절머리 난 국민들의 염원이었죠.”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를 개혁했으면, 이제 그만 권력을 돌려줘야 맞지 않겠습니까?”
이화는 당당히 말했다.
“법이 마음에 안드시면 바꾸시면 되겠죠. 국회의원이 하는 일이 그런 거 아닌가요?”
이화의 말에 한국독립당 의원들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들의 자신만만한 표정, 그에 대비된 신민당 의원들의 불편한 기색.
<법을 바꾸고 싶어도 힘이 없다.>
한국독립당 부총재 김종규는 속으로 생각한다.
‘국회 300석 중 과반이 넘는 185석이 우리 당이야. 놈들은 법을 바꿀 능력이 없지.’
그리곤 입밖으로 말했다.
“건수 하나 잡았다고 물고 늘어지는 거 같은데, 김대정 의원 그리고 김영현 의원. 분명히 합시다. 폐하의 직접 통치를 지지하는 건 국민이고, 그렇게 만들어준 것도 국민입니다.”
그러자 대화를 듣던 신민당 총재 김영현 의원이 삿대질을 하며 반박했다.
“당신들이 60년에 쿠데타를 일으킨 덕분이겠지.”
그러자 김종규는 비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혁명을 일으킨 건 맞지만, 63년엔 국민의 뜻을 묻는 총선을 했지요. 국민 여러분들의 현명한 판단으로 우리가 이겼구요.”
“......”
“혈기왕성한 젊은 기자들이 전면에 나서서 집단행위 좀 했다고 뭔가 착각하시는 모양인데, 대한제국의 국민들은 신민당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욱 당당하게 말했다.
“자유당 정권이 얼마나 무능하고 부패했으면 황제 폐하의 친정을 바랬겠습니까? 우리 대한제국. 공산주의 세력과 국경을 맞댄 위태로운 나라입니다. 언제고 전쟁이 날지 모르는 우리 실정에 맞는 한국식 입헌군주제. 마땅히 필요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엄숙히 선언하듯 말했다.
“우린 권력에 눈이먼 것도 아니고, 자본에 눈이 멀어 부정하고 부패한 짓을 한 것도 아닙니다. 우린 오로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을 뿐.”
그리고 감히 말했다.
"우리가 뇌물을 주고받았다거나, 사적인 권력 유지를 위해 국민의 인권을 탄압한다거나, 선거에 부정을 저질렀다면 얼마든지 책임을 지겠지만 부총재로서 분명히 말하지요. 우린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악법도 법이다.
그렇게 한국독립당과 신민당간의 치열한 설전이 2시간 37분 정도 지속되었을 때 회의는 끝을 맺었다. 국회 의석이 95석에 불과한 소수 야당은 법률적으로 해볼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음을 절감한 채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회의실을 빠져나오는 복도에서 김영현 총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무리 정의롭고 올바른 소리를 해봐야 국회 내에 힘이 없으니 원···."
그러자 김대정이 말했다.
"역시 국회 내에선 해볼수 있는게 없어요. 투쟁의 대상이 이곳 중앙청이 아니라 거리의 시민이 되어야할거 같아요."
"국민을 설득하는 게 먼저인가?"
그렇게 방향을 고민하는 사이 반대편 복도로 걸어가는 이화에게 김종규 부총재 겸 국방부장관이 말했다.
"저놈들 아마 길거리 투쟁으로 노선을 바꿀거야."
"그래봐야 소용 없을거에요. 우리에게 권력을 준건 시민들이니까. 게다가 얼마전 대마도 정벌로 지지가 더 굳건해졌죠."
김종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물었다.
“그나저나 황태녀 전하 말이야.”
“예.”
“계속 물어보고 싶었는데 도저히 만나뵐 엄두가 안나서 그렇거든.”
그러자 이화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황태녀 전하의 머리를 잘라서요?”
“......”
“그 때 일을 용서하셨는지 안하셨는지 여쭤봐드릴까요?”
그러자 김종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것보다 더 궁금한 일이야. 정치성향. 좌파이신가? 우파이신가?”
뜻밖의 질문에 이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정치성향이요?”
“내각에서 많이 궁금해하거든. 지도자 수업을 시작하신 거 같은데, 정작 어떤 나라를 이끌고 싶어하시는지 속을 모르니까 말이야.”
“조선황실법 개정 때 말씀하셨을텐데요. 민주국가면서 법치주의 국가인 대한제국을 만드시겠다고.”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는 수단에 불과해. 그걸로 어떤 나라를 만들지는 별도의 문제지.”
종규의 말에 이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의도는 알겠는데 대답은 못해드리겠네요.”
“어째서?”
“황태녀 전하도 모르시거든요.”
“모르신다? 자신이 우파인지 좌파인지 알지 못하신단 말인가?”
“예.”
“아니 어째서?”
“민주국가 대한제국을 만들고 싶어하시니까.”
“......?”
“황태녀 전하의 논리는 이래요. 자신은 민주주의 대한제국을 만들 것이다. 국민의 손으로 뽑은 총리가 민의를 대변하여 정치를 한다.”
“그 다음엔?”
“자신은 민족의 대표로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거죠.”
“중립???”
“예. 정치는 민의의 대변자들이 해야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라, 자신이 정치에 관여하는걸 염두하지 않고 계세요. 그러니 자신의 정치성향도 굳이 알려하지 않으시죠.”
“허허 참···.”
“평소 말씀하시는거나 행동하시는거나 어렴풋이 성향이 있긴 한 거 같은데 이것도 상황따라 왔다갔다 하는 거 같고···.”
“아니, 아무리 민주주의고 입헌군주제라 해도 아예 정치를 안하시겠다면··· 황실이 존재할 이유가 없잖나?”
“그래서 폐하와 제가 열심히 부채질해보고 있는데요. 언제 마음을 바꾸실진···.”
“역시 내가 만나뵙고 청을 올려야겠어. 더는 이렇게 피해 다녀서는···.”
“그러다 저처럼 수라상으로 얻어맞으면 책임 못져요."
"수라상으로···?"
그리곤 미소지어 갈길을 걸어나갔다. 또각또각 중앙청의 로비를 걸어가는 이화에게 수행원이 달려와 유인물 하나를 보이며 말했다.
"비서실장님! 이걸 좀 보셔야겠습니다!"
"이게 뭐죠?"
"학생 한명이 이걸 꼭 전해달라며 난동을 피우는 통에··· 뭔 내용인지 봤더니 편지였습니다."
이화는 무심한 표정으로 편지를 읽어봤다. 그리고 천천히 표정이 굳어졌다.
"전태일?"
이화는 편지를 구기며 말했다.
"친위대랑 중정에 연락하세요. 황태녀 전하의 경호를 강화하라고."
"예."
"이걸 줬던 학생은 잡아다 중정에 보내시구요."
그러자 수행원이 놀라며 물었다.
"예? 하필 중앙정보부는 왜···."
"시키는대로 하세요. 나머진 김부장이 알아서 할테니까."
이화는 구겨진 편지를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런 악질적인···."
그 편지의 내용. 젊은 청년의 편지. 대학생들의 염원.
<3월 17일. 이 편지가 황태녀 전하께 무사히 전달되어 평화시장에서 알현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