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 Ep8. 한국식 입헌군주제 (4)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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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서가 휴가를 나왔다.
3월 7일. 군인이 아닌 황태녀로서의 일정이 시작되는 순간, 부사령관 전장군이 업무를 대행하는 10일간의 일정.
근데 이런 젠장 맙소사.
진희 언니와 훈이 오빠가 결혼식을 올린댄다. 덕수궁 제2부속비서관과 친위대 장교가 비밀 연애를 한 것도 모자라 이 나라 최고 지존의 딸인 황태녀를 들러리로 세우다니···.
검은 양복의 황태녀가 도착한 곳은 늘 그렇듯 고급 이미지가 필요하면 항상 함께하는 호텔 이화. 황실이 지분을 가진 곳.
"언니 진짜 대박이다···."
은서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호텔의 고급스러움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서 웨딩드레스를 입고 신부 대기실에 앉아있는 여인이 놀라서워서다.
순백의 신부 박진희.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누리고 있는 35세의 노처녀. 아니 이젠 노처녀도 아니군. 아무튼 그런 언니를 바라보고 있는 은서는 검은 정장을 입고 있는게 꼭 상복 같아 애처롭기만했다.
그래서 진희가 물었다.
"근데 왜 하필 검은 정장을 입고 오신 거에요?"
“아니 그냥... 내가 좀 슬퍼서 그래.”
“흠··· 이거 나 없는 사이에 사고치시는 거 아닌가 몰라.”
"난 아직도 안 믿겨져. 언니가 결혼을 안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뒤에서 비밀 연애를? 그것도 훈이 오빠랑? 이야··· 이건 아니지.”
"뭐 그럴수도 있죠··· 얼마나 멋진 남자인데."
"머, 멋진 남자···."
입을 다물지 못한 채로 허망한 웃음을 짓는 은서의 마음 속엔 월남전 시절에 보아온 훈이 오빠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대위 김훈과 소위 이은서간에 이루어진 정글 속 갈굼의 기억들.
<너 때문에 3km를 해멨어. 믿고 맡겼더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넌 나 죽으면 부하들 어떻게 통솔할래? 부하들 보다 뒤쳐지고, 부하들 보다 못 싸우고, 부하들보다 지휘도 못하는데. 도대체 육사는 어떻게 졸업한거야? 너 진짜 낙하산이냐? 특전사가 만만해보여?>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삼키는 이은서 소위가 월남시절 내내 했던 대답.
<죄송합니다.>
그렇게 어리버리했던 소위 시절을 지나 중위, 대위, 소령을 거쳐 단숨에 5성장군 원수까지 뛰어오른 황태녀. 하지만 호텔 이화에서 들러리나 서고 있는 불쌍한 여인은 이렇게 회고했다.
“언니가 월남전 때 훈이 오빠를 봤어야 하는건데. 이야··· 어떻게 그 인간말종한테 멋지다는 수식어가 붙을 수 있지?”
그러자 진희가 반응했다.
‘풋.’
옆에서 묵묵히 각목처럼 서있던 은서의 수행원 김진혁 중령도 이렇게 반응했다.
‘훗.’
둘은 생각했다.
‘그야 공주님이 무능했으니까.’
하지만 두 사람의 마음 속 소리는 은서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그저 세상 억울하기만 한 노처녀 이은서가 눈앞에 불쌍하게 있을뿐. 그런 그녀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난 아직 남자친구 한 번 사귀어 본 적 없는데···.'
모태솔로 이은서. 김진혁 만큼이나 연애 경험이 없는 여자. 하지만 훨씬 더 절박한 마음을 품고 있는 29세 여인. 옥류관에서 아버지가 부추기던 거 만큼이나 은서도 급한 마음이 피어나고 있었다.
29세는 소녀로 불릴 수 있는 마지막 나이니까.
지금은 1974년. 세기말까지도 30여 년이 남은 시대. 가정집마다 흑백 텔레비전이 돌아다니는 고전의 향기.
이 시기 여성들의 결혼 적령기는 25세인데 은서는 벌써 29세다. 노처녀의 단계에 접어들어 곧 있으면 아줌마라 불릴 수 있는 영역에 돌입한다.
그래서인지 은서는 74년 새해 무렵 부터 자신의 29세를 젊은이로 불릴 수 있는 심리적 마지노선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결혼식장의 모든게 부러웠다.
진희 언니와 훈이 오빠의 행복한 결혼식. 그곳에 하객으로 찾아오는 수 많은 친구와 가족, 동료들이 축하를 보내는 모습. 결혼식장 본관의 입구에는 꽃으로 장식된 화환이란 물건이 한 가득 세워져 있다.
덕수궁에 돌아오기 전까지 커리어 우먼으로 화려한 경력을 쌓고 있던 진희 언니 답게 양복을 차려입은 수 많은 비즈니스맨들이 하객으로 찾아왔고, 김훈 중령의 경우 군인들이 찾아왔다.
특히 병사들이 많았다. 월남전 시절부터 서북방위사령부, 친위대까지 수 많은 부대를 옮겨다니며 만난 부하들이 전역한 민간인이 되어 자신의 옛 상관에게 경례를 올렸다.
그렇게 빼곡히 들어찬 하객들이 연신 박수를 치며 축복했고, 그 사이로 턱시도 차림의 김훈과 드레스 차림의 박진희가 만나 반지를 교환하고 키스를 나누며 인생의 가장 찬란한 순간을 보냈다. 그런 모습이 은서의 눈에 촉촉하게 들어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나도 결혼하고 싶다···."
그 중얼거림은 단순히 '결혼'으로 끝나는게 아닐 것이다. 옆자리에 앉아서 박수를 치고 있는 김진혁은 그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20대의 끝자락.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여자로서의 모든 행복이 담겨있는 상징적인 단어라고 그는 이해했다.
'20대 청춘을 여자다운 삶도 못 누려보고 전쟁터에서 보내셨지···.'
그것이 안쓰러웠다. 진혁이 이해하고 있는 이 나라 여성들의 20대 시절은 이렇다.
대부분의 여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직한다. 그 중 학업에 뜻이 있거나 부유한 집안의 딸들은 대학에 간다. 누군가는 캠퍼스 라이프를 즐기고 누군가는 오피스 라이프를 즐기며 틈날 때마다 짝을 찾아나선다.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데이트도 해보고 알콩달콩 미래도 그리다보면 20대 중반에 결혼을 한다. 행복한 신혼여행이 잠깐 이어지면 그 뒤로 고달픈 시집살이가 시작되는데, 시어머니의 구박 속에서도 자신의 아들딸들이 귀엽기만 하다. 그래서 얼굴에 행복의 미소가 떠날줄을 모른다.
'이쁜 내 새끼.'
그렇게 20대 후반이 되면 세상 귀엽기만 하던 녀석이 아장아장 걸어다니고 유치원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국민학교(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무럭 무럭 씩씩하게 자라나는 모습에 부부가 나란히 앉아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은서의 20대는 어땠나?
20대 초반을 육군사관학교에서 보냈다. 엄격한 군기 속에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강인한 여전사로 키워졌다. 사관학교에서 연애는 금지되어 있다.
20대 중반. 월남전에 파병되어 전장을 누볐다. 이역만리 떨어진 베트남의 정글에서 총을 쏘고 누군가를 죽이며 또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할 뻔한 위기의 순간들이 숱하게 지나갔다. 그것은 피를 뒤집어 쓴 여전사의 삶이다. 연애 같은걸 할 수 있을리가 없다.
나중에 밝혀지기론 그녀의 20대 전장 생활은 '장렬하게 죽어서 아버지 가슴에 대못을 박겠다'는 자살에 기반한 복수심이 불타고 있어 부하들과도 연신 마찰을 빚었다.
20대 후반. 월남의 마지막 전투에서 모든 부하를 잃었다. 정신병원에 입원해있다가 덕수궁에 돌아왔고 폐인처럼 보낸 것이 1년이었다. 술과 약에 취해서 가출까지 했던 위기의 소녀는 연애는 커녕 자살만 안해도 다행이었다.
또래 여자들이 오피스 라이프를 보내고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까지 하는 동안 그녀는 때리고 맞고 죽이고 죽을뻔하고. 증오의 시간을 지나 29세 황태녀로 돌아오고나니 갑자기 자유가 찾아왔다.
<나도 결혼하고 싶다···.>
자유, 쇼핑, 연애, 결혼, 신혼여행, 육아까지. 여자로서 상상해볼만한 모든 삶의 키워드가 '결혼'이라는 한 단어에 담겨 자기도 모르게 입밖으로 흘러나왔다.
‘정치같은 걸 생각할 겨를이 없으시겠지···.’
진혁은 그렇게 이해했다.
결혼식을 마치고 하객들의 축복 속에 신혼여행길에 오르는 남녀를 보면서도 은서는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모습이 얼마나 뻔히 보였으면 차에 오르던 김훈 중령이 도로 내려 은서에게 물었다.
"부럽냐?"
과거엔 선배였고 지금은 부하지만 은서에겐 오빠로 불릴 뿐인 그 남자 김훈의 질문에 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입술은 삐죽 내밀고 고개는 열심히 끄덕이는 ‘마음만은 소녀’인 그녀의 모습이 너무도 귀여워 훈이 오빠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남자 공략하는 법 알려줄까?"
"엥? 오빠가?"
"내가 어떻게 공략당했는지 그대로 알려주면 참고가 될거 아냐?"
"오··· 알려줘! 알려줘!"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는 은서에게 훈이 오빠가 속삭이듯 말했다.
"밀어붙여."
그리곤 어깨를 토닥이고는 손을 흔들며 차에 오른다.
"나 없는 동안 사고치지 말고!"
훈이 오빠의 조언에 은서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밀어 붙이라고?"
유부남이 노처녀에게 가이드를 주었다. 도움이 될려나?
***
은서가 휴가를 나온 건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일전에 아버지가 말했던 팔도유람 때문으로, 20대 시절을 사회에서 격리되다 싶이 지내던 은서를 위해 이연이 준비한 일정이었다.
과거 경부고속도로로 불리던 넓직한 대로를 수십 대의 리무진이 질주하는데 이런 기초적인 산업기반조차 은서에겐 신선하기만 했다.
“와 도로 진짜 넓어!”
근데 이연에겐 이상하다. 이 녀석 고속도로를 분명 타봤을건데. 리무진에서 똘망똘망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는 은서에게 물었다.
"너 몇번 타봤잖냐?"
“그래도 자주 타본건 아니잖아.”
이번엔 은서가 이상함을 느꼈다.
"근데 잠깐. 고속도로 이름이 낮선데? 우리 지금 다른 길로 가는거야?"
그러자 아버지가 말했다.
"경부고속도로 맞아. 이름이 바뀐거지. 네가 평양갈 때 탔던 도로랑 지금 이 도로랑 한 몸이야. 신의주부터 평양, 서울, 대전, 울산, 부산까지 이어져서 신의주-부산간 고속도로로 부르는 거 뿐이지."
"아 서울에서 이북으로 연장한 거구나? 이야··· 북쪽에서 남쪽까지 일직선으로?"
"일직선...은 아닌거 같다만 뭐 그런셈 치자. 하하."
그렇게 고속도로를 타고 리무진 행렬이 도착한 곳은 포항이었다. 포항의 영일만. 허허벌판에 지어졌던 제철소는 은서의 옛날보다 규모가 더 커졌고 주위에도 관련 기업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대규모 산업단지로 탈바꿈 되어 있었다.
항구에선 대형 선박이 바쁘게 오가며 철광석을 가져왔고, 그렇게 받아온 원석은 집채만한 용광로에 들어가 붉은 쇳물이 되어 강철로 단련되고 있었다. 그것은 산업의 쌀. 현대 인류 산업의 모든 재료가 되는 핵심.
하지만 은서에게 있어 포항제철소는 악연이 깊은 곳이다. 친위대장에게 강제로 머리가 잘리고 사관학교로 던져질 때 까지 아버지가 있던 곳이기 때문이다.
<포항 내려갔다며.>
<제철소가 더워서 말이지요.>
하나밖에 없는 딸내미가 군대에 던져지고 월남전까지 일정이 잡히는 동안 아버지는 포항제철소를 보겠다며 내려가 코빼기도 안보였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이곳이 참 재수없다.
<바쁘다>
그 시절 그 남자는 이런식으로 핑계를 댔겠지. 그야말로 매정한 아버지. 딸보다 산업의 쇳물이 더 좋았던 남자. 그래서 은서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나 사관학교 갔을 때 아버지는 여기에 있었던거지?”
딸의 안좋은 기억을 떠올린 아버지가 정곡이라도 찔린듯 면목없는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그건··· 입이 열 개라도 한 말이 없구나."
그 남자의 힘없는 모습에 승리의 기분을 느낀 은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올만했네. 이렇게 멋진 광경이 있는데 딸내미가 눈에 들어왔겠어? 인정! 다 지난 일이니까."
인정할리가. 하지만 은서는 마음에도 없는 비즈니스적인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를 다음 장소로 이끌었다.
철이 만들어지는 걸 봤으니 그것이 쓰이는 곳을 만나볼 차례. 울산에는 자동차 공장이 있다. 넓직한 평지에 끝없이 펼쳐진 공장은 노동자들의 구슬땀 속에 자동차가 조립되고 있었다.
이 공장도 60년대 중반에 세워져 가동되고 있었는데, 처음엔 미국의 포드사와 기술제휴를 맺어 단순 생산만 했다. 국산화율은 20%대. 하지만 1974년 현재는 90% 이상이 국산화되어 대한제국 고유의 모델인 포니가 생산되고 있었다.
철은 자동차에만 쓰이는 게 아니다. 좀 더 거대한 곳에서 좀 더 막대한 양의 철이 바다에서 쓰이고 있었다.
<우리가 만드는 물건은 우리가 만든 배에 실어서 우리 손으로 수출을 해야한다!>
그런 목표아래 세워진 조선소가 있었다. 대한제국에서 추진한 수 많은 중공업 육성책 중 가장 막바지에 빛을 본 산업이다. 조선업은 수만 톤의 거대한 쇳덩이를 배 형태로 조립하여 바다에 띄워야 하는 고난이도 산업이다.
자동차 수리소로 시작했던 회사는 건설사가 되었고, 다시 자동차 제조업에 뛰어들더니 조선업까지 성공시켜 거대한 재벌기업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26만톤급 쇳덩이가 유조선이란 임무를 부여받아 천천히 바다로 나아갔다. 오색빛깔 풍선이 날아오르고 모두의 박수 속에 대한제국의 산업이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순간이었다. 그 진수식이 훤하게 보이는 VIP들의 단상에서 은서는 그저 박수를 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대단해! 이렇게 큰 배를 우리가 직접 만들다니! 진짜로 나 군대갔던건 안중에도 없을 규모잖아?’
이런 장대한 플랜을 60년대부터 짜고 진행하고 있었을 아버지를 떠올리니 은서는 경외감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바쁘다는건 핑계가 아니었어! 아버지는 대단해!’
딸이 그렇게 경외감에 빠져있는 사이 아버지는 단상 앞에 서서 연설을 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 땀흘리고, 피흘리고, 목숨을 바쳐왔을 수 많은 영웅들을 잊지 말자. 산업의 현장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그대들 역시 한국전쟁의 영웅들 못지 않으며, 독립전쟁의 영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위대한 산업전쟁의 영웅임이 틀림없다.>
그렇게 연설을 하면서도 이연은 은근슬쩍 딸의 모습을 쳐다보곤 생각했다.
'잘 봐둬라. 이 나라가 곧 네 나라가 될테니까.'
참 귀엽고 사랑스러운 딸이었다. 민주주의 같은 것만 포기해주면 참 좋을텐데. 직접 정치할 마음만 가져주면 더할나위 없이 완벽한 후계자였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부산 바다에 위치한 원자력 발전소를 방문했다.
고리 1호기, 1974년 대한제국의 핵발전소다. 석유 파동으로 온 나라 경제가 혼란스러운 시기. 하필이면 전력의 대부분이 석유를 떼는 화력발전에 의존하고 있던 시기. 원자력은 이 나라 전력 생산의 최후의 보루가 되어주었다.
그래서 사실 고리 1호기를 방문한 건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다.
<우리에겐 핵발전소가 있으니 안심해도 된다.>
국민들 사이에 암암리에 퍼진 전력난의 걱정을 잠재우고, 경제난으로 불안불안한 지지율을 다시 굳건하게 만들 비책. 발전소가 최대한 잘 보이도록 카메라 각도까지 신경쓰는 이연의 모습이 노련하기만하다.
그 남자의 정치적 계산엔 딸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한제국 황제 이연.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북진통일까지 이룬 전쟁영웅. 그것도 모자라 한강의 기적까지 일궈 가난한 조선을 부강하게 만든 경제 영웅. 그 옆에 자신의 딸인 황태녀를 세워서 함께 사진을 찍는다.
<이 녀석이 바로 내 뒤를 이을 후계자다>
그것을 공고히 선포하는 미디어 전략이었고 정치적인 계산이었다. 이런 모습을 칼라 TV나 신문으로 보게 될 국민들은 이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경제와 산업에도 관심이 많으신 황태녀 전하!>
남자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이승만 총리와의 정쟁에서 이기고 권력을 틀어쥔 독재자. 절대권력의 황제는 1974년 현재 노련한 정치9단이 되어 있었다.
한편, 두 사람이 원전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이 두 명의 대학생이 종이뭉치를 들고 부산 시내의 한 건물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100장이 넘는 유인물을 들고 낑낑대는 고려대학교 학생의 표정에 집념이 서려있었다.
“1시간 뒤라고 했지?”
고려대학생의 말에 안경잡이 연세대학교 학생이 답했다. 그의 손에도 100장이 넘는 유인물이 들려 있었다.
“신문에 나온 정보니까 확실해! 1시간쯤 뒤에 황제 폐하와 황태녀 전하가 리무진을 타고 부산시내를 방문하신댔어. 거기서 시민들과 악수도 나누고 격려도 하고 그런다니까···.”
“그래서, 이 10층이 넘는 빌딩을 계단으로 올라가서는 황태녀 전하 머리 위로 편지를 뿌리자?”
“200장이 넘는걸 머리위로 뿌리면 최소한 하나는 읽으시지 않겠냐?”
"아니 근데 왜 엘리베이터는 고장나고 난리야!"
그들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낑낑대며 10층 건물을 계단으로 올라왔을 때 옥상문을 열고 나가니 그곳엔 낮선 사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 선글라스에 검정 양복을 차려입은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뻐끔뻐끔 담배를 피며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제 왔냐? 언제 오나 한참을 기다렸다."
"누, 누구세요?"
"누구긴 너희들 잡으러 왔지."
그들은 알지 못했다. 신문기사에 실려있던 황태녀 전하의 일정은 거짓이었다는 걸. 중앙정보부의 음모에 걸려든 고려대 학생과 연세대 학생은 그대로 끌려가 납치되듯 승용차에 태워졌다. 같은 시각 부산 시내엔 황제 폐하와 황태녀 전하의 일정이 20분 늦게 조정되어 방송되고 있었다.
전태일의 편지는 아직도 황태녀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