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70 대한제국-54화 (54/131)

〈 54화 〉 Ep6. 위화도 위기 (6)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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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한 여자가 나타났다.

장군들의 윽박지르는 소리와 스파이들의 소근거리는 소리가 복잡하게 오가는 사령부에서 정처없이 떠도는 여자가 은서말고도 더 있었다.

덕수궁 제2부속비서관 김진희. 은서의 비서가 풀죽은 눈으로 자신의 공주님에게 질문을 던졌다.

“여기서 뭐하세요?”

“그러는 넌 뭐해?”

은서도 풀죽은 눈으로 물었다. 진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전쟁나면 어쩌나 그 걱정하고 있죠···.”

“맞다. 그런 걱정을 하는게 순서였지···.”

은서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모습이 진희가 물었다.

“걱정··· 안되세요?”

“걱정이 되긴 하는데 왠지··· 내가 지금 이런 상황에 아무 도움이 안된다는게 더 무서워서···.”

“그게 무서운건가요?”

“그럼, 나는 이 나라 황태녀잖아. 언젠가 황제가 될 몸인데 28살씩이나 먹은 애가 바보처럼 복도를 떠돌고 있다고.”

“......”

“......”

두 여자가 모두 한숨을 쉰다.

"아버지 진짜 대단해. 아무리 위기가 닥치고 생각치도 못한 상황이 도래해도 의젓하게 사태를 수습하잖아."

은서는 고개를 저었다.

"난 절대 그렇게 못 할거야."

"아직 젊으신데요 뭘."

"아버지의 반에 반도 못 따라가는 황제가 되면 어쩌지?"

무거운 책임감이 어깨를 짓누르는 거 같았다. 그런 소녀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주고자 진희가 각오를 담아 말했다.

"그럼 우리가 잘하는 걸 하러 가실래요?"

"어떤 일?"

"여론전."

"여론전?"

"예전에 부대찌개를 먹었던 것처럼 시민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거에요."

은서가 애써 웃는 척하며 말했다.

"그게 정말 도움이 될까?"

"지금 평양엔 이북지역에서 내려오는 피난민들로 북적이고 있어요. 모두가 저처럼 두려움에 떨고 있죠. 그들을 살피러 가는거에요. 그리고 메시지를 전하는 거죠."

"메시지?"

"우리가 지켜주겠다."

"우리가 지켜주겠다?"

"대한제국 황실이 이곳에 있다. 이 위기가 끝날 때까지 절대로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봤던 논리 같아···."

진희가 환히 웃으며 말했다.

“혜조 대제(의친왕)께서 하신 말씀이세요. 그 날이 1950년 6월 25일 새벽. 한국전쟁이 터졌던 날이었죠.

선제께선 전쟁이 터졌다는 말을 듣자마자 마이크를 잡으셨어요. 전쟁이 터졌으니 피난가라고, 군이 최선을 다해 막아볼테니 어서 도망치라고. 나는 너희들이 모두 도망치면 마지막으로 떠나겠다고.”

"맞아, 할아버지가 그런 방송을 하셨댔어···."

"덕분에 서울 시민들은 북한군이 오기 전에 무사히 피난을 마쳤어요. 공주님과 황후마마, 황태후마마는 미리 기차를 타고 부산에 가셨지만, 황제 폐하는 서울에 남아 피난 작전을 지휘하고 계셨죠."

"무사히 도망치셨고···."

"예, 북한군이 서울에 진입하기 7분 전에 가까스로 한강다리를 건너셨대요.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미담이잖아요?"

"응!"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진짜라구요. 저희 아버지도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폐하를 칭찬하셨으니까. 정말 멋진 영웅이라고. 너도 그런 사람이 되라고."

은서는 용기를 담아 결의에 찬 마음으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영웅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책임은 다하고 싶었다. 대한제국의 가장 높은 자리에서 좋은 핏줄을 타고났다는 이유 만으로 공주 대접을 받는 자신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밥값은 해야지. 그런 쌩뚱맞지만 논리적인 이유가 28세 소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어머니의 유언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럼~ 우리 공주님 공부도 열심히 하고 착한 일도 많이 하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그래야겠지?>

덕수궁의 분수대에서 엄마와 바나나를 까먹으며 했던 약속. 소중한 어머니의 유언.

"그래, 이대로 바보같이 있을 순 없어. 황실은 민족의 상징이 되어야 하잖아. 힘이 돼야지."

"예!"

그렇게 두 사람은 지휘통제실의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말했다. 자신들에게 헬기를 빌려달라고. 사정을 들은 아버지는 흔쾌히 승인해줬다. 그 다음에 바빠진건 은서의 수행원인 진혁이였다.

***

저녁 10시 37분. 은서는 진희와 김진혁, 그리고 김훈 중령까지 대동하여 헬기에 올랐다. 월남에서부터 쭉 날개가 되어준 UH-1 휴이. 참 두고두고 쓸만한 좋은 헬기였다.

"근데 왜 굳이 헬기입니까! 차라리 리무진을 타고 가시지!"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에 뭍힐까 진혁이 큰소리로 외쳤다. 데프콘2의 상황이라 그런지 진혁이와 김훈 중령 모두 전투복을 입고 있었는데 친위대 소속이라 그런지 특임대랑 똑같은 검은색 전투복을 입고 있었고, 실탄이 장착된 M16 소총을 들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도 권총 한자루만 휴대한 채 5성장군의 전투복을 입고있는 은서가 외쳤다.

"일단 상황을 보려고! 평양에 얼마나 피난을 오고있나 봐야지!"

그렇게 네 사람을 태운 헬기가 하늘 위로 박차고 올라갔다. 이번엔 호위병력도 없었다.

깜깜한 저녁에 가로등 불빛이 아른거리는 평양시내는 차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시내가 자동차로 빼곡할 정도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난을 온 것일까?

"와 저기 고속도로에서도 차들이 한가득이네! 이런건 명절날에도 불가능한 규모잖아!"

진희가 말했다.

"자동차 보급률을 계산해보면 이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오고있을거에요. 걸어서 오거나 버스를 타고 오거나."

"걸어서 오는 사람들은···."

"아마 며칠 전부터 계속 오고 있었겠죠. 국경분쟁이 처음 시작된 백두산 분쟁 이래로 계속···."

김훈 중령이 말했다.

"뉴스에서 4자회담 소식이 계속 부정적으로 들렸으니까. 신의주 근방의 주민들이 두려움에 떨었겠지."

"정말 한국전쟁이라도 터진 기분이야. 이 정도로 두려워하고 있다고?"

"그래, 고작 20년 전이야. 한국전쟁을 몸으로 겪은 젊은이들이 누군가의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었을 시기지. 전쟁의 두려움이 몸에 밴 사람들이니까."

은서를 태운 헬기는 평양의 한 골프장에 착륙했다. 과거엔 장군들이 골프를 치고 다닌 군용 시설이었지만, 이용자 모두가 숙청을 당한 탓에 손님이 뚝 끊긴 그런 곳이었다. 인근 부대에 연락해 지프차를 징발한 김훈 중령이 몸소 운전석에 올라타니 은서가 놀라 물었다.

"오빠 운전도 할 줄 알아?"

"내가 말했지? 차 타고 탈영해서 현충원 왔다고."

"그게 설마 지프차? 군부대 차량으로?"

"그래."

은서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진짜 무식하게 탈영했구나···."

진혁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역시 감옥에 갔어야 할 양반입니다. 여러가지로."

뻑뻑한 핸들에 수동변속기. 바람이 몰아치는 탁 트인 오픈카. 한국전쟁부터 줄곧 쓰인 장교들의 지프차가 은서 일행을 태우고 평양 시내를 달리니, 정체현상을 빚고 있는 도로에 막혀 은서를 곤란하게 만든다.

"황태녀 전하다!"

"황태녀 전하께서 오셨어!"

이젠 곳곳에서 사람들이 은서를 알아본다. 처음엔 종로 거리를 돌아다녀도 못알아보던 자신인데 새삼 당황스러웠다.

그렇게 곤란한 상황을 여러차례 겪으며 은서가 도착한 곳은 터미널이었다. 버스를 타고 온 피난민들이 제일 먼저 도착해서 평양을 마주하는 곳이었다.

보따리를 한가득 짊어진 아주머니들과 아이들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터미널을 서성이고 있었다. 얼마나 겁에 질렸고 당황스러웠는지 코앞에 황태녀가 지나가는데도 못 알아볼을 지경이다. 평양 시내의 사람들보다 더 겁먹고 두려움에 떠는 문자 그대로 피난민들이었다.

터미널이랍시고 지어진 허름한 콘크리트 건물에서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떠들썩하게 들리고, 설치된 칼라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뉴스에 귀기울인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표정을 지으며 누구는 중국을 욕하고, 누구는 전쟁을 걱정하고, 북진하여 옛 고구려의 영토를 수복하자는 강경파까지 보였지만 그런 사람은 크게 호응을 받지 못하는 어수선한 풍경. 자정이 넘었건만 대한제국의 평양은 이렇게 떠들썩하고 어수선했다.

모두가 잠 못드는 밤.

전국의 모든 국민이 밤 잠을 설치며 TV에 나오는 긴급 뉴스에 몰두하는 지금. KBC 기자들은 터미널에 나타난 황태녀 전하를 보도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이대고 마이크를 바쳐 옥처럼 맑고 고귀한 연설을 고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지 않잖아."

은서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뜻인지 이해한 진희가 행동에 나서려 할 때 은서는 손을 붙잡고 고개를 젓는다.

"그런 의미가 아니야. 나를 주목하게 만들라는 뜻이 아니라, 내가 여기에 기자들을 이끌고 온 것 조차 모를 만큼 다들 겁에 질려있다는거야···."

"하지만···."

"얼마나 겁에 질렸으면 전쟁에 관한 소식을 보도하는 뉴스에 꽃혀서 나는 쳐다도 안보겠어? 그런데 무슨 말을 해야할까?"

은서는 허망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못 해, 무슨 말을 해야할지 까맣게 잊어버렸다고. 백지상태야 완전."

그러면서 고개를 젓는다. 기자들을 동원한 서북방위사령관의 모습. 그런 자신의 지금을 돌아보다 문득 깨닫는다.

"기자 아저씨?"

"예, 전하."

마이크를 들고 있던 고참 기자 한명이 답했다.

"아저씨 혹시··· 몇 달 전쯤에 경친왕 전하 곁에도 있지 않았어요?"

기자가 놀라 말했다.

"예, 단둥지역에서 포탄사격을 지휘하셨을 때 곁에서 취재하고 있었습니다. 헌데 그건 어찌 아셨는지요?"

"그냥 찍어봤어요. 전 운이 좋거든요."

"아하···."

은서가 고개를 들어 피난민들을 둘러보곤 말했다.

“완전히 이해해버렸어···.”

은서는 생각했다.

이 자리에 내가 아니라 경친왕 전하가 계셨다면 어땠을까? 삼촌 혹은 작은아버지. 내 아버지의 하나밖에 없는 친동생.

‘서북방위사령관 이열, 나의 선배님, 한국 전쟁의 또 다른 영웅. 경친왕 전하···.’

그가 만약 터미널의 이 자리에 서서 피난민의 모습을 바라보면 어땠을까? 그는 이 자리에서서 무엇을 봤고, 무엇을 느꼈으며, 무엇을 해야겠다고 다짐했을까? 은서는 떠올린다. 그 남자의 모든 어록을. 머리속에 짚이는 하나의 말이 있었다.

그것은 경친왕이 단둥지역 코앞에서 포탄 사격을 명령했을 때 외친 연설이었다.

<조선의 신민들이여! 대한의 국민들이여! 이북의 인민들이여! 우리의 힘을 보라! 대한제국 황실을 대표하는 나 경친왕이 서북방위사령관으로서 이 자리에서 선언한다! 조선에 1637년(병자호란)은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전 포대 사격 개시!>

그 말을 끝으로 70문에 달하는 견인포가 일제히 불을 뿜으며 단둥지역 코앞의 섬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그 일로 중국을 건드려 외교관계를 이 지경으로 만들긴 했지만.

"그 때 그 방송 TV에 나갔었죠. 대한뉴스랑."

"네, 하지만 그 이후로 반역죄를 모의했다는 뉴스가 나오면서 그대로 오명이 되었죠. 겉으론 애국자인 척 하면서 뒤에선 반란을 모의하고 있었다고. 저희가 사실 그렇게 포장을 하긴 했지만··· 아니! 분명 그건 반역이었을겁니다. 예···."

기자의 양심과 현실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그의 말을 들으며 은서가 피식 웃었다. 웃음 속에 눈물이 섞인 묘한 표정이었다. 그런 표정으로 은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반역이 아니었어요."

"하오시면···."

"우리 삼촌, 진짜 뼈속까지 애국자야. 미련할 만큼···."

눈물을 삼키며 애써 의젓한 척을 하며 은서는 담담히 말했다.

"삼촌. 처음엔 골수 친미주의자인 줄 알았어요. 덕수궁에 미국대사랑 주한미군사령관을 데려와서 시위질을 했으니까.

그랬던 삼촌이 백두산에서 국경분쟁이 터지자마자 단둥 앞바다에 무력시위를 하셨죠. 1년전 화기애애했던 미중관계를 생각하면 이건 분명 미국의 뜻에 거스르는 행동이었거든요.”

은서는 기자에게 선언하듯 말했다.

“그 결과 미국에게 버림받았죠. 반역죄로 선포되고 암살을 당했는데도 미국이 입도 뻥긋 안했잖아요. 이상하지 않아요? 골수 친미주의자였던 경친왕 전하가 왜 이런 선택을 하셨을까요?”

은서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여기 오니까 알 거 같아요. 피난민으로 북적이는 터미널에서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부모님들의 걱정소리를 듣고 나서야··· 진짜 미련한 인간··· 세상에 둘도 없는 바보 멍청이···.”

은서는 눈물을 쏟으며 상상했다. 경친왕이 평양의 버스터미널에 왔을 때의 모습.

터미널 구석에 쭈그려 앉아 공포에 떠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을 달래며 전쟁은 나지 않을거라고, 내가 지켜주겠다며 보살피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

겁에질린 국민들을 바라보며 주먹을 부르르 떠는 서북방위사령관 경친왕 이열. 39만 대한제국 국군과 경찰병력을 거머쥔 5성 장군의 사나이.

은서는 그 남자의 시점에서 그 남자의 마음으로 그 남자와 같은 계급을 달고 말했다.

"내가 이들을 지킬 것이다."

<내가 이들을 지킬 것이다.>

"나 이은서."

<나 이열.>

"서북방위사령관으로서 맹세한다."

<서북방위사령관으로서 맹세한다.>

은서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터미널의 피난민들을 향해 맹세했다.

"내가 지킬거야. 모두 나의 백성들이고, 인민이고, 국민들이니까! 국군은 국민을 지켜야하니까! 나는 그런 의무를 짊어진 39만 대군의 사령관이니까!”

하지만 이 선언은 틀렸다. 경친왕 이열은 터미널에서 이렇게 맹세했다.

<보여주지! 우리의 힘을! 조국과 국민을 지킬 충분한 힘이 우리 국군에 있다는 것을!>

둘의 다른 각오, 같은 판단이 서북방위사령관의 지휘봉에 깃들었다.

국군(國軍)은 국민(國民)을 지킨다.

경친왕이 그랬듯 은서의 발걸음도 서북방위사령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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