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 Ep5. 숙청의 밤 (1)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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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5월 10일. 은서는 아직도 황태녀가 못 되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국경 분쟁이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백두산에서 전차가 대치를 벌이고, 태평양에서 달려온 미국 7함대가 전투기를 띄워 서해상에서 무력시위를 벌이던 그 정도의 상황은 끝났다지만, 이북지역의 팽팽한 긴장감은 여전해서 신의주부터 나선까지 북방의 주민들이 평양까지 피난 와 난민촌을 형성하는 지경이었다.
현재의 대한제국 군사준비태세 데프콘 4. 군사준비태세가 평시 단계로 낮아진 상태지만, 한중간 국경선을 확정하는 미국, 소련, 중국, 한국간 4자회담이 계속 결렬되어 사람들을 불안에 빠뜨렸다.
결국 이 모든 평화는 핵무기. 970발에 달하는 미국의 전술핵이 한반도에 증강 배치되었고, 중국과 소련에서도 핵무기가 있는바. 공포에 의한 평화가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던 것이다.
황제의 집무실에서 이화는 담담하게 말했다.
"주한미군 철수. 그게 놈들의 진짜 요구 조건입니다. 장백산을 반환하라느니 간도협약 당시의 국경선으로 돌리라느니. 그런건 진짜 요구사항이 아니겠죠.”
그녀의 말에 이연이 신문지를 읽으며 답했다. 한쪽 다리는 편하게 꼰 채로 담배연기만 뻐금거리는 여유있는 남자의 한마디.
"장백산이 아니라 백두산이라고 해야지. 이 실장."
"중국 시점에서 말한겁니다. 그 자들은 그곳을 장백산이라 부르니까요."
"자네는 대한제국 덕수궁의 비서실장 아닌가?"
"......"
어쩐지 이 남자의 태도가 차갑다. 그래서 이화는 한숨을 쉬며 말한다.
"계속 절 괴롭히시는군요."
"뭘 말인가?"
"그 날 이후로 계속 제가 올 때마다 담배피며 신문만 읽고 계시잖습니까? 저는 쳐다보지도 않으시고, 사소한 거에 트집을 잡고 계십니다."
"그냥 신문을 읽고 있을 뿐인데?"
그렇게 허허 웃으며 오리발 내미는 이연에게 비서실장 이화가 하는 선언.
"아무리 괴롭히셔도 제 결심은 달라지지 않을겁니다 폐하."
"무슨 결심?"
"금연하시죠."
이화의 냉담한 요구에 이연이 웃으며 말했다.
"거 참 매정하구만. 하루 24시간 중 자는 시간 빼고 17시간을 근무하는 황제인데 유일한 휴식 시간을 뺏겠다니."
"쉬는 시간이 꼭 흡연 시간일 필요는 없습니다. 금연을 하지 않으시겠다면 저는 이번주 부터 토요일, 일요일 마다 휴가를 쓰겠습니다."
"허허 참. 한달에 8일이나 쓰겠다고? 세상 어느 근로자가 주 5일만 일한다던가?"
"옛날에 저랑 약조하셨죠? 평생 20대로 살게 해주시겠다고. 그럴려면 휴식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거 그래도 8일은 너무하잖나? 시대를 지나치게 앞서가는 기분인데."
"선진국형 근무제도입니다. 폐하."
"우리 개발도상국이야. 이실장···."
이화가 손에 들린 서류봉투를 이연의 책상에 내려놓는다. 상당히 두꺼운 영어로 된 논문 더미였다.
"64년도에 나온 논문입니다. 담배의 유해성에 대해 적혀있죠. 폐하의 옥체에 중대한 악영향을 줄 수 있음을 증명하는 근거 자료입니다."
"그래, 그 좋은 머리로 담배를 폈을 때 스트레스가 해소된다는 연구 자료도 찾아와봐."
"없습니다. 절대. 자신의 폐를 썩어 문드러지게 만드는 행위는 그만둬주시죠."
그렇게 냉전기 백두산 국경 마냥 대치하던 두 사람의 신경전이 17분 40초동안 계속된 끝에 이연이 대화의 주제를 바꿔버렸다.
"은서는 뭐하고 있나?"
"학부대신(교육부장관)을 만나러 가셨습니다."
"학부? 거긴 왜?"
"음··· 그게···."
이화가 뜸을 들이자 이연이 재차 물었다.
"이틀 전에도 만나더니 오늘도 만나고. 이젠 뭐 교육으로 민주주의라도 실천하겠다던가?"
"그게··· 제가 판단하기 힘든 문제인데···."
"무슨 일인데?"
"대한제국 공주가 황태녀로 책봉될 경우, 책봉식에서 무슨 옷을 입어야하냐고 따지고 계십니다."
"뭐?"
이화가 한숨을 쉬며 재차 말했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상 공주가 세자로 책봉된 사례가 전무하다보니, 전통 방식으로 책봉식을 할 경우 면류관을 쓰는게 맞는지 아니면 황후처럼 머리라도 올려야 하는건지. 의식은 경복궁에서 하는지 창덕궁에서 하는지, 종묘는 가는 건지 안 가는 건지. 이렇게 전통에 대한 모든걸 따지고 계십니다."
이연이 한숨을 쉬며 답했다.
"그런건 의전 실장한테···."
"그게··· 의전 실장도 모르고 전임자들도 아는게 없답니다. 일제강점기 35년동안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대부분 돌아가셔서 고문서를 찾아 읽는 상태죠.
혜조 대제(의친왕)님은 미국의 망명정부에서 독립운동가분들과 술잔을 나눠드시며 황위 계승을 선언하셨고 폐하께서도···."
"난 그 때 사관학교에서 편지를 받아 듣게 되었지. 너 오늘부터 황태자라고."
"폐하의 황위 계승은 1955년 부터였는데 중앙청 의회에서 국회의원들을 모아두고 하셨었죠."
"그래, 돈 쓰기 싫었거든. 돈이 없는 시대이기도 했고."
결국 한 평생 익선관과 황룡포를 입어보지 않았다는 실용주의적 남자의 결론. 면류관조차 써본적 없는 검정 양복의 황제가 하는 말.
"군복 입으라 그래."
그 여자의 대답.
"계급장도 준비해놓겠습니다."
그들의 진행.
"솔직히 이정도 했으면 크게 한 번 해볼 때도 됐잖아? 내 딸래미 인생에 한번 뿐인 황태녀 책봉식인데. 거창하게 해야지."
"최고중의 최고로 준비해보겠습니다."
"군대식 만큼 멋진게 또 없지. 대사들이랑 장군들까지 모아놓고 최신무기들 싹 다 전시시켜. 국민들 안보 의식도 고취시키는 현대식 책봉식을 열어보는거야."
"대한제국에 새로운 문화가 탄생할겁니다."
두 사람의 작당에 반짝이는 눈이 활활 불타고 있었다.
***
"그래서 자료 좀 찾아보셨어요?"
중앙청에서 은서가 물었다. 학부대신의 집무실에서 머리를 긁적이는 백발 남성이 이렇게 답했다.
"그게··· 무측천이 즉위식 때 면류관을 쓴 거 같긴 한데···."
"그쵸? 저 면류관 쓰는게 낫겠죠? 근데 저는 한복이 좋은데. 지금 입고 있는 이것처럼 이쁘장한 공주 한복. 황제 국가의 황태녀라면 음··· 황금색 한복을 입으면 좋으려나? 여기에 면류관은 좀 그렇겠죠?"
"그냥 면류관 쓰시고 곤복을 입으시지요 전하."
학부대신의 말에 은서가 화들짝 놀라며 눈을 반짝거렸다. 권력에 눈을 뜬 28세 공주님의 소감.
"전하? 전하라 하셨어요?! 저한테? 우와! 처음 들어봐! 마마란 호칭도 들어본 적 없는데 곧바로 전하라니!"
"허허허··· 그야 계승 서열 1위시니까···."
그러다 학부대신이 엄숙히 초치듯이 말했다. 은서가 오기 17분전. 덕수궁에서 온 연락 때문이었다. 딸이 귀찮게 할 듯하니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했던 황제의 충격적인 선언.
"쨌든··· 황제가 되시면 꼬옥 면류관 써보시고, 이번에는 다른걸 입으시옵소서."
"에? 왜요? 방금 전까진 면류관쓰면 된다면서요."
"공주님은 이번에 군인의 제복을 입으실겁니다. 최근까지 입으셨던 훈장이 달린 제복으로."
"네?!"
잠시 후 덕수궁. 석조전을 쩌렁쩌렁 울리는 대한제국 공주 이은서의 사자후.
"아버지!!!!"
집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은서가 숨을 씩씩거리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제복이라니? 5성 장군은 또 뭔소린데!"
공격적으로 노려보는 딸의 시선에 아버지가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축하한다. 이은서 원수."
"원수?! 날 더러 장군이 되라고? 미쳤어?! 황태녀 책봉식이 왜 군대식인데! 스무살에 군대를 보내더니 갔다와서도 군대를 가라고? 이런 거지 같은 일이 어딨어!"
그녀의 항변에 이화가 말했다.
"최고중의 최고. 한반도 5천년 역사상 가장 성대한 대관식이 될겁니다. 공주 전하."
"이 배신자!"
이화 옆에 안경잡이 의전실장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가 설명하는 유창한 명분.
"요청하신 전통입니다. 공주님!"
"전통 같은 소리 하네!"
"고종 황제 시절. 그러니까 조선 왕국이 대한제국으로 개혁했을 때 황제는 6성 장군에 해당하는 대원수 계급을 달았습니다. 그 밑으로 황태자가 5성 장군이었죠.
지금의 황제 폐하께서도 계급이 대원수이시니. 대한제국 전통을 참고할 경우 황태녀 책봉식은 공주 전하님께 별 다섯개의 원수 계급장을 달아드리는 것 입니다."
"아, 아니··· 전통대로 하자니까···."
"순종 황제께서 황태자 신분으로 5성 장군이 되신 것도 1900년대 초이니 이것 또한 전통입니다!"
"전통이면 그보다 이전 조선시대를 따져야지 이 바보야!"
울상짓는 은서에게 이연이 말했다.
"아무튼. 국경 분쟁으로 나라가 어수선한 상태다. 군사준비태세가 평시 단계로 낮아졌다지만 이북 주민들의 불안감이 가시질 않고 있지.
전통 방식의 책봉식은 무리가 있으니 이북 주민들께 강한 조국의 모습을 보여줄겸 국민들 안보의식을 고취시킬 수 있는 군대식으로 하자꾸나."
"이 독재자!"
"그래, 내 사랑스런 독재자의 딸. 애비가 최고중의 최고로 준비해주마."
이연의 화사한 아빠 미소였다.
***
그렇게 다시 일주일 하고도 하루가 지나 5월 18일 금요일. 임시공휴일로 지정된 이 날은 대한제국 공주 이은서가 황태녀로 공식 즉위하는 날이었다.
이 시기 대한제국에는 역사적인 전투기가 있었다.
'방위성금헌납기'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F-4 팬텀. 월남에서 활약하던 미국의 당대 최신예 전투기가 대한제국의 태극마크를 달고 서울 하늘 위를 아름답게 수놓으며 은서의 황태녀 책봉식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이 전투기가 대한제국에 들어온 것은 국방대신 김신의 작품이었다. 백범 김구의 아들이라는 명문 백작가의 배경, 그 자체로 독립운동가, 그 막강한 명성으로 육군 장성들을 제치고 올라온 공군 출신의 국방대신.
경친왕이 사라져 황제 다음의 군부 실세가 된 이 남자는 중국과의 국경분쟁을 빌미로 F-4 팬텀의 수입을 강하게 주장했고, 황제와 미국을 설득하는데 성공하여 당시 일본조차 수입하지 못한 최신 전투기를 들여온 것이다. 세계에서 네번째. 일시적으로 동북아 최강의 공군 전력이 탄생했다.
그 아래로 육중한 흑색 기갑부대가 시가지를 행진했고 그 뒤를 친위대 장병들이 군복을 멋지게 차려입고 행진을 이어갔다. 그들의 호위를 받으며 은서를 태운 리무진이 천천히 여의도로 향하니 공주의 황태녀 책봉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흑흑, 나쁜놈들···."
리무진 안에서 은서는 슬피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은서의 수행원인 진혁이 안쓰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면류관 못 써본게 그렇게 슬프십니까?"
"넌 조용히 해! 이 파시스트야."
"파시스트라니···."
지난번 도청 사건 이후로 계속 미움받다가 얼떨결에 파시스트까지 된 진혁. 다행히도 고자란 소리는 안 들었다.
"그래도 공주님 마음을 이해해주셨는지 이렇게 리무진까지 태워주셨잖습니까? 책봉식 날 국민들에게 보여준답시고 오픈카로 갔다간 전투기 소리 때문에 질겁을 하셨을텐데요."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이 고자야!"
"아니 좀! 그 소린 대체 언제까지 하실겁니까?"
"... 너 죽을때까지."
"나 원 참···."
그렇게 도착한 여의도 비행장에선 대한제국의 M48 전차나 장갑차, 미사일 등이 위엄찬 모습로 일렬 종대로 서있었고 그 앞으로 대한제국 친위대 장병들이 대열에 맞춰 서서 은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단상 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쭉 보니 아버지이자 대한제국 황제 이연이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별 6개가 달린 대한제국군 제복을 입고 있었고, 쾌차하여 오랫만에 모습을 드러낸 이범석 총리가 있었다.
그 옆으로 국방대신 김신, 합동참모총장 밑으로 각군 참모총장들. 별 4개가 달린 수 많은 장군님. 미국부터 영국, 프랑스, 서독, 스페인, 이탈리아, 일본 등 수 많은 대사들이 앉아 있었고 당연하게도 주한미군사령관이 참석해있었다. 친위대장 차지연은 어디갔는고 하니 단상 아래서 친위대의 대표로 늠름하게 서서 은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뜨아, 이 사람들이 다 28세 여자 한명 장군 만들겠다고 참석한거야? 아니지··· 지금 시국을 따지고 보면 공산국가들 보라고 일부러 모인건가? 동맹 과시 하려고?'
아무튼. 수 만명의 시선과 카메라들이 낮뜨겁게 바라보는 불타는 여의도에서 평소처럼 3개나 되는 훈장을 줄줄이 달고 있는 이은서가 단상 위로 올라가니 그녀의 한 손에는 장군을 상징하는 예식용 세이버가 들려 있었다.
아버지는 의젓한 28세 딸에게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칼에 붉은 수치(리본)를 달아주니 거기엔 이렇게 자수가 새겨져 있었다.
大韓帝國 皇太女 李銀誓
대한제국 황태녀 이은서
그리고 어깨에 아버지가 직접 별 5개의 원수 계급장을 달아주니. 이 순간 은서는 세상에서 가장 하기 싫었던 그 말을 해야만 했다.
허리와 어깨를 곧게 펴고, 오른쪽 팔을 45도로, 손은 곧게 펼쳐 눈썹으로 향하고, 전면에서 봤을 때 엄지 손가락이 보이지 않도록 날카롭게.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한치의 흐트러짐 없는 경례와 함께 우렁찬 목소리. 국가와 민족을 대표하는 대한제국 황태녀의 경례.
"충성!!"
그리고 속으로 울면서 던지는 마음속 공허한 메아리.
'이런 제기랄 아버지한테 충성이라니. 젠장···.'
그걸 알고 있다는 듯 비웃음 30%에 아버지의 뿌듯한 미소 60%, 썩은 미소 10%를 섞은 대한제국 황제 아버지의 격려.
"그래, 앞으로도 이렇게 쭉 애비한테 충성을 다하거라."
"예··· 아바마마···."
"그래, 내가 니 아바마마다! 하하하!"
'공산당보다 싫은 아버지'가 독재권력의 힘으로 '공산당보단 약간 나은' 아버지로 강제 변경되는 순간이었다. 하기 싫어도 해야지. 대한제국의 모든 우방국 대사님들이 지켜보시는데.
은서는 그렇게 속으로 울면서 아버지와 함께 검은색 오픈카에 올랐다. 대한제국 황제와 황태녀가 지나갈 때마다 장병들이 우렁찬 소리로 충성을 맹세했고, 이렇게 여의도 비행장을 한바퀴 돌면서 전세계에 자신의 모습을 과시하고 있었다. 공산당보다 약간 나은 아버지와 함께.
은서는 생각했다.
이런걸 책봉식이랍시고 하다니···.
대한제국 망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