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 Ep3. 애국자들 (3)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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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3월 4일.
공주는 또 다시 수라상을 받지 않았다. 이번엔 단식이 아니었다. 석조전 앞 분수대에 앉아 하루종일 바나나만 까먹으니 배가 부르단 이유로 먹지 못했던 것이다.
공주의 고운 한복을 입고 나와 댕기머리까지 딴 채로 눈이 반쯤 풀린 멍한 표정으로 바나나만 까먹으니 옆에 쌓인 껍질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이것도 투쟁의 일환일까요?”
막내비서가 수근거렸다.
“글쎄, 이건 뭐라고 해야하나... 바나나 투쟁?”
비서진들의 수근거림을 들으며 진혁은 한숨을 쉬었다. 딱 봐도 실의에 잠겨있으신 거 같은데 이걸더러 투쟁이니 뭐니 하는걸 보면··· 지난번 불꽃 축제 때 대응도 그렇고 덕수궁 제1부속비서실의 사람들은 공주에 대해 너무도 무관심했다.
“저, 궁금한게 있는데 말입니다.”
“예, 대위님.”
“덕수궁 제1부속비서실은 황제 폐하를 보좌하는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 공주님은 그동안 제2부속비서실에서 맡았을건데 그분들은 지금 어디 계신겁니까?”
진혁의 물음에 비서들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그, 그게···.”
막내 비서가 우물쭈물하자 선배로 보이는 비서가 답했다.
“공주님이 사관학교에 가신 뒤로 해체됐습니다. 황실에 남은 마지막 여인이셨으니까요.”
“해체됐다면···.”
“제2부속비서관님은 미술관 쪽으로 가신걸로 알고있고, 다른분들은··· 아마 잘들 가셨을겁니다.”
그 말에 진혁은 또 다시 한숨을 쉬었다.
“언제쯤 복구 되려나···.”
그렇게 또다시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공주는 그 뒤로도 바나나 10개를 더 먹어치웠다. 도대체 바나나에 무슨 원한이 꽃힌 건지 끊이질 않고 드셔댄다.
이 시기 바나나 가격은 낱개로 500원~1000원선. 버스 요금이 10원에 짜장면 가격이 100원인걸 생각하면 이분은 지금 엄청난 사치를 누리고 계신거다. 열대과일이라곤 한송이도 나지 않는 조선땅에서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바나나가 저렴할리 없다. 달러화는 소중하니까. 수입품은 늘 비싸고 비싸야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공주님 얼굴만 바라보다가 진혁은 떠올렸다. 요 몇일간 대한제국의 공주님이 흘려온 눈물의 양을.
장군님 앞에서 울고, 아버지 앞에서 울고, 혼자 울고, 내 품에서도 울고, 무덤에서는 울다가 졸도하고, 불꺼진 방에 틀어박혀 한참을 울고, 월남전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울었고, 병원에 입원해있을 때도 울었다.
자살하겠다며 매스를 훔쳐와선 소동을 벌이던 입원 첫날 밤에도 그녀는 울고 있었다.
<이거 놔! 놓으라고! 나같은 건 죽어야해! 놔!!!>
그렇게 친위대원들이랑 씨름을 하며 다투던 그녀는 1973년 3월 4일 현재. 멍한 표정으로 바나나만 드시고 계신다. 눈물조차 메말랐는지 멍한 표정이다.
<나랑 사귀어보지 않을래?>
딱 한번. 정말 환한 미소를 지은 때가 있었는데. 그 때 사귀자고 할걸 그랬나 하며 후회하는 진혁이었다.
<지켜준다며>
경복궁 근정전에서 황제 폐하와 싸운 뒤 했던 공주님의 말. 떨리는 손으로 진혁의 손을 잡으며 성큼성큼 걸어나가던 둘만의 시간. 그 때의 공주님은 아직도 진혁을 사랑하고 있었을까?
메마른 표정으로 바나나를 먹는 공주님을 보며 진혁은 결심한다.
‘이럴바엔 그냥 사귀자.’
적어도 고백할 때만큼은 웃으셨으니까. 어떻게든 마음을 추스르시게 하여 3월 7일까지 국회로 데려가야 하는 진혁 입장으로선 최후의 선택이었다.
그렇게 진혁은 친위대 장교의 제복을 가다듬고 공주님 앞으로 다가간다.
“공주님. 할 말이 있습니다.”
“말해. 듣고있어.”
“저랑···.”
헛기침 두번 해주고.
“저랑 데이트 하시죠!”
그 말에 뒤에 수근대던 비서들이 깜짝놀라 진혁을 쳐다보았다. 놀란건 진혁도 마찬가지. 자기가 고백해놓고 자기가 놀라는 세상 멍청이가 여기 있었다.
“당장 사귀는 건 어렵겠지만. 그··· 데이트 몇 번은 해드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귀는 건 그 뒤에 판단하기로 하고···.”
그 말에 은서가 무신경하게 답했다.
“내가 미쳤니? 너랑 데이트하게?”
은서는 그렇게 말하며 바나나를 하나 더 집어삼켰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놀란 진혁의 대답.
“아, 아니··· 지난번엔 분명 저한테 반하셨다고···.”
“버스떠났거든? 고자야.”
“고자라니···.”
“꺼져. 고자자식.”
그렇게 말하며 은서는 바나나 한개를 세번만에 씹어삼켰다.
태어나 최초로 여자에게 고백하고 최초로 차여보는 28세 모태솔로 김진혁 인생 최악의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고자가 되어버린 건 덤이었다.
***
"도와주십시오!"
이번에도 진혁은 비서실장실에 찾아와 머리를 숙였다. 숙이긴 했는데 비서실장님이 안보인다.
“비서실장님?”
“저 오늘 휴가인데요.”
대답은 뒤에서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소파에 누워 느긋하게 여성 잡지를 읽고 있는 이화가 보인다. 거기엔 여성들의 봄철 피부관리법이 소개되어있었다.
“휴가··· 맞으십니까?”
“보다시피 쉬고 있잖아요?”
“근데 왜 집무실에서 쉬고 계십니까? 휴가면 보통 집에 가시거나 멀리 여행을 가시는게···.”
“전 여기가 집이라서요.”
“네?”
한가롭게 소파에 누워 잡지를 읽으며 그녀가 먹고 있는 것. 당근, 당근, 당근··· 좀 더 많은 당근··· 공주님은 분수대에서 바나나를 드시던데 이분은 당근을 드시고 계신다. 바나나는 맛있기라도 하지 당근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선택이었다.
“전 폐하의 허락을 받아 덕수궁에서 지내거든요. 맞은편에 문 보이죠? 저기가 제 침실이고. 씻는곳도 여기. 자는 곳도 여기. 밥먹는 곳도 여기. 출근도 여기니까 휴가 때 쉬는 곳도 여기가 되겠죠?”
“그런···.”
“말했잖아요~ 폐하의 모든걸 보좌하는 자리라고. 언제 어디서 찾으실지 모르는데 24시간 대기는 기본이죠.”
“그럼 휴가가 아니잖습니까?”
“제 책상에 서류 하나 없는거 보이시죠? 오늘 업무처리는 수석비서관들이 알아서 해결할거에요. 그러니 업무 없는 날이 곧 휴가인거에요.”
어처구니 없는 논리에 진혁의 입이 벌어져 다물어지질 않았다. 조선 땅에서 시설이 제일 좋은 황궁에서 지낸다는게 부럽긴 한데, 여기가 직장이면 이야기가 다르지. 직장에서 먹고 자는건 세상 끔찍하지 않은가?
“아셨으면 돌아가시죠. 오늘은 업무 안 받을 거니까요.”
그 말에 진혁이 간절하게 답했다.
“공주님이 하루종일 바나나만 드시고 계십니다.”
“바나나는 피부미용에 좋다던데. 부럽네요. 나도 사먹어볼까?”
“그리고 전 오늘 차였습니다.”
“푸훕···.”
당근을 먹던 이화가 크게 웃어버리며 진혁을 바라봤다.
“차였어요? 지금? 공주님한테???”
“그러니까 뭐라도 조언좀···.”
“그러니까 그 때 진작에 받지 그러셨어요? 공주님도 용기내서 하신 거 같았는데.”
“아니 사실··· 지금도 좀 그렇긴 한데··· 당장 고백해서 데이트라도 해드리지 않으면 기분을 풀어드릴 방법이 없으니까. 저로서도 진짜 최후의 수단을 썼단 말입니다.”
“어이구 바보···.”
그 때 책상에 놓인 전화기가 울렸다. 잡지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난 이화가 성큼성큼 걸어가 당근을 먹으며 말했다.
“예, 비서실장입니다.”
[중정입니다.]
“말씀하세요.”
[보안사에 있는 우리 애들한테 연락이 왔는데, 경친왕 전하께서 서울 방문 일정을 잡으셨답니다.]
그 말에 이화가 진혁을 노려본다. 휘휘 젓는 그녀의 손짓이 어떤 뜻을 담고 있는지 진혁은 알 수 있었다. 엿듣는 애가 있는지 살펴보고 문이랑 창문을 모두 닫으라는 뜻. 눈치빠른 진혁이 비서실장님의 지시를 충실히 수행했다.
“서울이요? 누구랑? 어떻게?”
[내일이나 내일 모레쯤 방문하실 것 같고, 특이점으로는 현재 평양의 주한미군사령관을 만나고 계신답니다.]
“도널드 베넷 대장?”
[예, 어떤 대화를 나누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눈치깠네, 당장 덕수궁으로 와요. 비상사태니까.
[예, 비서실장님.]
통화를 끊었을 때 비서실장 이화의 눈에는 전투적인 감각이 활활 불타고 있었다. 그것은 비서실장 이전 중앙정보부 제1차장으로 근무하던 시절에 빛나던 요원의 눈빛이었다.
“진혁군, 비상사태에요.”
“무슨 일이시길래···.”
“권력다툼!”
이화는 그렇게 말하곤 황제 폐하의 집무실로 향했다.
***
황제의 집무실에서 이화가 올린 보고는 이랬다.
“경친왕 전하가 눈치채셨습니다.”
짧고 간단한 한 줄. 그것만으로도 이연을 깜짝 놀래키기에 충분한 정보였다.
“놈이 어떻게?”
“어떻게인진 확실하지 않으나 내일이나 모레쯤 서울에 오신답니다. 현재 주한미군사령관과 접견중인 것으로 보아 두분이 같이 오실 가능성은 70% 이상입니다.”
“70%?”
“제 추측입니다.”
이연은 잠깐 망설이더니 이내 물었다.
“추측의 근거를 말해봐.”
“중앙정보부와 보안사령부 라인은 제가 꽉 잡고 있습니다. 경친왕 전하의 눈과 귀가 막혀있는 지금 암살 시도라도 들어갔다간 꼼짝없이 당하시겠죠.”
이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라면 주한미군사령관을 만났을겁니다. 자신과 황제간에 권력 다툼이 벌어질거다. 내 밑에 군대도 수십만, 폐하 밑에 군대도 수십만, 남과 북이 내전이라도 벌였다간 중공군이 기회를 틈타 내려올거고 그러면 세계3차대전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이런식으로 겁을 줬을겁니다.”
“그래, 대한제국은 냉전기 동북아의 최전선에 위치해있으니까.”
“주한미군사령부가 경친왕 전하의 물리적 영향권에 속해있는 지금. 그분이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길은 미국의 보호를 받는 겁니다.”
“그래서, 주한미군사령관을 내 앞에 데려와 자신의 안전을 과시하겠다?”
“그렇습니다.”
“미친놈···.”
“그리고 이건 30%에 불과한 추측이온데···.”
“말해봐.”
이화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숨을 크게 내쉬며 말한다.
“정반대의 가능성도 있습니다.”
“미국이 경친왕에게 흘렸다?”
“예. 미국 CIA가 주한미군사령관을 통해서 경친왕 전하께 메시지를 전하는겁니다. 대한제국 황제가 당신을 노리고 있다고.”
“설마 그럴리가···.”
“CIA의 정보력은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불가능할 것도 없죠.”
“어쨌든 결론은 같군. 주한미군사령관이 경친왕과 함께 내 앞에 온다는 거 아닌가?”
“예. 폐하.”
“싸움질만 할 줄 아는 멍청이인 줄 알았더니 운까지 좋은 멍청이군. 그럼 할 수 없지.”
이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지금부터 공주의 목을 죈다.”
그 말에 진혁이 깜짝 놀라 황제에게 말했다.
“폐하!”
“어떻게든 3월 7일까지 내 딸을 국회에 세워놔. 거기서 황태녀가 될거란걸 선포해서 정통성을 과시해야지.”
이연은 중앙정보부장을 노려보며 말한다.
“김 부장은 이은서 대위에 관한 언론통제를 풀고 내일자 신문 1면에 실어놔. 공주란 사실은 숨겨놓고 활약상이란 활약상을 모조리 풀어버리는거야.”
“예, 폐하.”
“기사 내용은 이화 자네가 돕고”
“네, 폐하.”
“차 장군. 자네는 친위대를 동원해서 덕수궁의 경비를 모두 점검하고, 도청장치라던가 수상한게 없는지 싹 다 뒤져봐. 내 집무실까지 포함해서.”
“알겠습니다. 폐하.”
“양키들 끄나풀이 섞여있을지도 모르니까 친위대는 차 장군이 조사하고, 비서진은 이화 자네가 조사하고. 대가리부터 말단까지. 식당 출입인원부터 쓰레기 처리하러 오는 인원까지 덕수궁에 발 디디는 놈들은 싹 다 조사해.”
“예, 폐하.”
이연은 마지막으로 진혁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진혁이 넌 내 딸과 데이트를 해라.”
“네?”
얼떨떨한 표정으로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재차 물어본다.
“갑자기 데이트는 왜···.”
“3월 7일까지 어떻게든 기분 풀어서 국회에 세워놔야지. 바나나 좋아하니까 한송이라도 사들고 가봐.”
“바나나는 오늘 하루종일 드셨습니다.”
“이미 먹었냐? 그럼··· 흠···.”
“......”
“알아서 잘 해봐.”
여자 마음을 모르는 건 아버지도 똑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