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Ep2. 소년 이야기 (3)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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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장님! 저는요, 공주님이 행복하게 사셨으면 좋겠어요."
이승필 중위는 누가 볼새라 불꺼진 사무실에 숨어 친위대에 전화하고는 행복한 목소리를 하고 있었다.
"우리 공주님 겉으론 부하들 미워하고 원망하는 거 같아도. 속으론 걱정이란 걱정은 다 하는 분이시거든요.”
[넌 그렇게 시달리고도 공주님이 좋냐?]
진혁이 어처구니 없다는 투로 물었다.
“그럼요! 어제도 저한테 군홧발로 정강이를 차버리고, 박철민 상사한테 있는 욕 없는 욕 다 하셨는데, 제가 몰래 뒤따라가봤거든요? 어땠는 줄 알아요?”
[어땠는데?]
“헬기에서 눈물을 글썽이시더라구요.”
[뭐? 눈물?]
“네! 겉으로 그렇게 연기했던거지 속으론 진짜 좋은분이세요.
작전 나가가면 항상 앞장서서 싸우시고, 철수할 때면 부하들먼저 보낸 다음에 마지막으로 헬기에 탑승하시고.
작전 중 조금이라도 다치면 그분 눈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훤히 보이는데 혼자 모르신다니까요?"
[나 원 참···.]
“이번에 단독작전 끝나시면 채명진 장군님이 소령으로 진급 시켜주신댔으니까. 더는 위험할 일은 없으실거에요. 참모부에서 일하시면 우리도 한시름 놓을 수 있겠죠?”
[그래, 공주님도. 폐하도. 모든게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거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통화한 게 진혁과 승필이의 마지막이었다.
며칠 뒤 19번 도로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고, 대한제국의 공주는 거기에 휘말려버렸다. 박철민 상사가 어거지로 유서를 찾아 채명진 장군과 함께 읽으니 공주는 처음부터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고, 이승필 중위는 공수지구대 3팀과 함께 공주를 구하겠다고 출전했다.
그리고 전사했다. 대한제국 친위대 특임대 소속 5팀의 부중대장이었다.
***
박철민 상사도 말했었다. 공주로서 행복하게 살라고.
은서는 그 말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반쯤은 진혁의 강요 때문이었지만. 아무튼 목에 채워진 듯한 보이지 않는 족쇄는 전의 것보다 더 강력한 위력을 갖고 있었기에 은서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첫번째 행보는 수라상이었다. 아침은 간장을 풀은 심심한 잣죽으로 속을 달래고, 점심 때부터 이렇게 선언했다.
"수라를 대령하라. 가장 맛있는걸로."
그 말에 덕수궁 막내 비서가 환한 미소로 비서실로 돌아가 사방팔방 외치고 다니니 듣지 못한 이가 없었다.
"공주님이 수라를 드시겠답니다! 최고로! 최고로!!!"
이 말에 덕수궁의 주방이 비상에 걸렸다. 허겁지겁, 하지만 능숙하게. 조금의 실수도 없이 완벽한 손길로 최고의 정성을 담아 요리상을 차리니 공주의 첫번째 수라상은 갈비탕이었다. 그렇게 은서는 감동적인 첫 술을 뜨는데···.
"맛없어."
그리곤 숟가락을 던져버렸다.
'이럴수가···.'
과거 조선왕조였으면 대령숙수쯤 직위였을 덕수궁 주방장이 충격에 빠졌다. 과거 혜조대제(의친왕) 때부터 주방을 책임지고 있었고, 까다로운 입맛의 황제 이연도 만족시킨 대한제국 최고의 요리사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맛없다'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하하, 오랫만에 수라를 드셔서 그런가?"
그래서 이번엔 삼계탕을 준비했다. 심신의 안정과 회복이 필요한 공주님의 원기를 회복시킬 최고의 보양식이었다. 전국의 심마니들이 찾아 바친 7년산 산삼이 올라가 있었다.
"고작 이거야?"
이렇게 수라상이 두번 세번 바뀌자 화가난 주방이 싱크대를 내리치며 말했다.
"이런 젠장! 도대체 뭐가 문제인거야?"
"소금을 더 쳐보세요."
익숙한 여인의 목소리에 주방장이 고개를 돌렸다. 비서실장 이화였다.
"비서실장님?"
"공주님이 반찬투정을 하신다구요?"
"예. 어떻게 해도 공주님 입맛을 못 맞추겠습니다."
"공주님은 월남전에서 3년간 전투식량만 드셨어요. 그 중에 미군 전투식량이 많았을건데 미국애들 식단은 소금이랑 설탕이 우리보다 많이 들어가거든요."
"아, 그래서!"
"그리고, 이왕 반찬투정 들어드리는거 최고중의 최고로 대접해드리죠."
"최고라 하시면?"
"청나라 황실의 만한전석이 울고갈 만큼으로."
"그정도까지!?"
그렇게 덕수궁 주방이 총동원되어 백여가지 요리를 준비하기 시작하니 광복이래 가장 호화로운 수라상이 준비되기 시작했다. 요리가 하도 많아 공주 방에선 먹을 수 없어 비서진의 안내를 받아 자리를 옮겨야 했다.
이 때 은서는 복장조차 호화롭게 꾸미니 오색으로 수놓은 화사한 공주 한복이 입혀져 있었고, 댕기머리에 예쁜 장신구로 자신을 치장하니 8년 전 군대가기 전의 모습과 같았다. 그녀가 안내 받은 곳은 덕수궁의 정관헌.
조선 제26대 국왕. 대한제국 초대황제 고종이 음악을 즐기며 커피를 마셨다는 황실의 휴식처. 동양식 목조건물에 서구 양식이 어우러진 다채로운 문화가 섞인 탁트인 전각.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탁트인 공간에서 은서는 백가지 요리를 대접받으며 난생 처음으로 먹어보는 호화 식단을 즐기기 시작했다.
진혁의 눈엔 그게 즐기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우욱!"
"공주님! 괜찮으십니까?"
먹으면 반쯤 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은서는 꾸역꾸역 백가지 요리를 강박적으로 입에 쓸어넣었다. 배가 불러 터질 것 같으면 옆에 놓여져 있는 큰 통에 토해버리고 다시 입에 넣고. 그런 병적인 식사가 반복되고 있어 비서진들의 눈쌀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그정도로 맛있으신건가···."
"그, 그런 얘기 있잖아. 로마제국의 귀족들은 한창 사치부릴 때 입에 넣어 맛만 보고 뱉었다던데. 그런거 아닐까?"
"그렇겠지?"
숙덕숙덕거리는 비서진들을 바라보며 비서실장 이화가 헛기침을 하고 물었다.
"수라상은 마음에 드십니까?"
은서가 힘겹게 웃으며 말했다.
"맛있네. 역시 이정도는 되어야 대한제국의 수라상이지."
"황제 폐하조차 누려보지 못한 만한전석입니다. 청나라 황실이 망해버려 고증에 맞는진 모르겠으나, 대한제국 황실에 맞는 새 만한전석이라고 해두면 의미가 깊어지겠죠."
"의외네. 아버지라면 매일 같이 이런 식사만 할 줄 알았는데."
"황제 폐하께선 3첩 반상밖에 안드십니다. 국, 김치, 간장. 그 외에 세가지 반찬만 드시옵고, 주말이나 되어야 7첩 이상을 드셨죠. 조선시대 왕실이 먹던 정통 수라상은 특별한 날에만 드셨습니다."
그 말에 은서가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거짓말하고있네. 그 인간이 그렇게 먹었다고?"
“콜라랑 햄버거로 떼우실 때도 있으셨습니다.”
"비서실장 된지 얼마 안된 사람이 그런걸 어떻게 알아? 거짓말도 칠거면 타임라인을 맞춰서 쳐야지."
“황제폐하의 건강관리는 비서실 핵심과제입니다. 언제 어떤 식사를 하셨는지, 칼로리와 영양 구성은 어떤지. 기록에 남기는 건 당연하거니와 국가 기밀에 해당하는 사안이라 비서실장으로서 모두 숙지하고 있습니다.”
“......”
결국 은서는 아무말도 하지 못한 채 빵 한조각을 더 챙겨먹었다. 그 모습을 몰래 지켜보며 이연은 행복한 아빠미소를 짓고 있었다.
***
은서의 다음 행보는 쇼핑이었다. 한 나라의 공주이기 전에 28살 여자로서 인생 최고의 행복을 누린다면 어떤 것일까 고민한 끝에 내린 걸음이었다.
서울시 중구에 위치한 유서깊은 백화점에 사복차림으로 나타난 은서는 진혁을 데리고 쇼핑을 하기 시작하니, 조금이라도 예쁘게 보인다 싶은 옷이 있으면 쇼핑백에 담았고, 화장품이나 브로치, 반지, 목걸이, 머리핀들은 값비싼 보석이 박힌 것으로만 골라서 담았다.
"정말 이걸 다 사실겁니까?"
"왜? 안돼? 대한제국의 공주잖아. 나."
"그렇긴 합니다만···."
행복하게 살라니 행복하게 사는 듯 해 진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거울을 바라보며 립스틱을 발라보는 은서의 모습도 몹시 예뻐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는 28세 소년이었다.
무엇이든지 살 수 있었다. 손에 들린 백화점 신용카드 하나면 얼마가 되었든, 무엇이 되었든 살 수 있는 재력이 은서에 있었다. 그것은 대한제국 황실의 내탕금이었고 황제 이연이 준 선물이었으며 은서의 마르지 않는 호주머니였다.
대한제국의 귀족들조차 누려보지 못할 거 같은 엄청난 부가 그녀 손에 들려 가차없이 쇼핑백에 쓸어담기니 진혁은 점점 불안감을 느끼고 만다.
"공주님,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닌 거 같습니다."
"왜? 행복하게 살라며. 공주로서 사치 좀 부려보겠다는데 이게 행복 아니고 뭐야?"
"아무리 그래도. 이걸 다 사시겠다구요?"
진혁은 더 이상 남는 손이 없었다. 쇼핑백만 20개가 넘었기 때문에 직원을 시켜 덕수궁에 수행원을 더 데려와야 할 정도였으니까. 보석이나 장신구의 부피를 생각하면 실제 가짓수는 대한제국의 모든 귀족을 통틀어도 누려보지 못할 부와 예술이었을 것이다. 시대는 아직 1973년이다.
"우리나라 대한제국이 많이 성장하긴 했지만 아직은 가난한 나라입니다. 이제 막 빈곤에 벗어났는데 황실의 일원으로서 모범을 보이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은서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왜 이제와서 딴소리야? 밥도 제대로 먹고 쇼핑도 하고. 다음엔 맞선이라도 볼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맞선이요?"
"행복하게 살라며? 28살 여인이 행복하게 살 방법이 별거야? 맛있는거 먹고 사고싶은거 다 사고. 멋진 남자친구 만나서 데이트하는거. 그거 말고 더 있냐고."
"......"
"왜? 샘나? 너도 해보지 못한 부와 사치가 눈앞에서 벌어지니 배가 아파? 니것도 사줄까? 아니면, 네가 오늘 내 일일 남자친구 해줄래?"
"공주님!"
"안해줄 거면 좀 닥치고 있어 제발. 난 충분히 행복하니까."
"......"
진혁이 마른 침을 삼키며 담담히 물었다.
"근데 표정은 왜 그러십니까?"
"뭐가?"
"분노하고 슬퍼하고 계시잖습니까? 만한전석을 즐기시면서 반은 토해내셨고, 사치부린다며 백화점에 오셔선 옷 한번 제대로 입어보지 않고 쇼핑백에 마구잡이로 쓸어 담으셨습니다."
"예뻐보이잖아···."
공주는 쇼핑백에 담겨있는 옷가지와 장신구를 보며 억지로 웃어보였다.
"화장하실 때 빼곤 한번도 안 웃으셨습니다. 지금도 어거지로 웃고 계시지 실제론···."
"그야···."
"행복하게 사는 법을 모르시는거죠?"
은서는 쇼핑백을 떨궈버렸다. 그리곤 주위를 둘러봤다.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고 있었다. 엄마 손을 붙잡고 나온 꼬마 숙녀님. 결혼을 앞둔 청년이 큰맘먹고 반지를 고르는 모습. 딸아이 생일 선물을 사러 나온 중년 가장의 외롭지만 행복한 표정. 오만상이 백화점이란 공간에 섞여 은서 눈에 들어왔다.
그들이 사고 있는 모든 물건을 합해도 은서가 고른 것보다 적었을 것이다. 백화점의 직원들은 언제 저 무서운 여자(아마 공주인걸 모르는)가 자기 앞에 나타날까 노심초사하며 자세를 가다듬고 있다. 아마 VIP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행복한가? 한두푼짜리 작은 물건 하나를 고르는 저들과 수백가지 사치를 부리는 자신을 비교할 때 누가 더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가? 보석조차 안 박힌 싸구려 은반지를 사가는 청년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번져있는데. 직원조차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자신은 왜 웃지 못하는 걸까?
은서는 허망히 웃으며 진혁에게 말했다.
"그러네, 나··· 행복하게 사는법을 모르는구나."
주먹을 불끈쥐고 한숨을 쉬었다.
"이승필 중위만 그랬던게 아냐. 나한테 행복하게 살라던거. 박철민 상사도 그랬었지. 공주로서 행복하게 살라고."
"아마, 모든 팀원분들이 같은 생각을···."
"걔네들 고향 땅에 살아 돌아왔으면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 누구는 전역해서 가정으로 돌아가고, 누구는 군인 생활을 계속 하고 있었을텐데. 걔네들이라면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까?"
"공주님."
"나쁜마음 먹는게 아냐."
은서가 웃으며 말했다.
"정말로 궁금한거야. 걔네들이라면 어떻게 살았을까 하고."
"평범한 가정에서, 평범한 일자리를 구해서 열심히 살고 계셨겠죠."
"그러다 전우끼리 만나서 저기 보이는 다방에 앉아 하하호호 웃으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을거야. 그렇지?"
진혁은 은서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젊은 20대 청년 넷이서 모여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은서는 부러웠다, 전우들과 저렇게 커피를 마시고 싶은데.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됐다. 그것은 황실의 내탕금을 모두 털어내도 살 수 없는 불가능한 행복인 것이다.
"저게 바로 진짜 행복인데···."
결국 은서는 아무것도 사지 못한 채 덕수궁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