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 Ep1. 공주 이야기 (8)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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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상관의 방을 무단으로 뒤졌다?"
"네, 사령관님."
채명진 중장의 눈빛에 분노가 서려있었다.
"이은서 대위는 내가 딸처럼 아끼는 부하다. 그걸 알고서도 그랬단 말이지?"
"팀장님을 찾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꿇어라. 박철민 상사."
박철민 상사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무릎을 꿇었다.
"3년 전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넌 늘 사고만 치고 다녔지. 내 권한으로 널 즉결 처형을 시킬 수도 있어."
그 말에 이승필 중위도 무릎을 꿇었다.
"제가 허락했습니다."
"무슨 권한으로?"
"이은서 대위님의 유서를 관리하는 부중대장으로서 내린 결정입니다. 19번 도로로 단독작전을 나가셨는데 하필 그곳에 전투가 터졌으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유서를 들고 와선 장군인 날 더러 읽어달라?”
“저희는 찾았을 뿐 읽은게 아닙니다. 읽는 건 최선임자인 각하께서 해주시길 간청드립니다.”
"참나···."
이승필 중위가 채명진 장군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딸같은 부하가 단독작전을 나가 고립됐는데 너무 태연하신 거 같습니다만.”
“나도 걱정된다.”
“각하의 표정은 걱정하는 사람의 표정이 아닙니다.”
그 말에 채명진 장군이 노려보며 답했다.
“니들이 뭘 안다고 떠들어?”
“저희는 이은서 대위님의 부하입니다.”
박철민 상사가 무릎 꿇은 채로 호소했다.
“팀장님이 혼자의 몸으로 전장에 나가셨습니다. 다른 곳도 아닌 19번도로입니다. 그곳은 지금 피로 피를 씻는 치열한 전투의 현장입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팀장님을 구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넌 이제와서 그런 소리가 나오느냐?”
“완전 군장 차림으로 나가셨습니다.”
“거기에 초콜릿이 70개 쯤 들었을거다. 의료 물품도 있었을거고.”
“네?”
채명진 중장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은서 대위가 나간 단독작전은 대민지원이다. 베트남어를 익혀놔서 현지 주민과 원활한 소통이 되니까. 현지인으로 위장해서 정보를 수집하라고 보냈었지.”
이승필 중위가 놀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럴리가··· 팀장님은 분명 저희들에게···.”
“그야 니들을 신뢰하지 않으니까. 나갈 때마다 총을 들고 수류탄을 들고. 마치 죽으러 가는 것처럼 행세했던 거 아니냐?”
이승필 중위는 팀장님과의 마지막 대화를 떠올린다.
<if died,="" drawer="" general.="" give="" i="" in="" the="" to="" will="">
(내가 죽으면 서랍에 있는 유서를 장군님께 전해.)
<yes, ma'am="">
(예, 알겠습니다.)
그리곤 채명진에게 말했다.
“팀장님께선 자신이 죽으면 유서를 장군님께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냥 몇 달 전부터 써놓은 만약을 위한 장치겠지.”
채명진은 유서를 책상에 놓으며 말했다.
“알면 됐다. 이 유서는 읽지 않을테니 자리로 돌아가라. 니들한텐 내가 다른 임무를 줄테니까. 잠자코 기다려.”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박철민 상사가 말했다.
“납득할 수 없습니다!”
“뭐 또?”
“대민지원을 나가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어디서 베트콩이 튀어나올 지 모르니까요.”
“그러니 현지 주민의 복장을 입으라고 한 거 아니냐? 언어까지 베트남인의 말을 쓰는데 베트콩이 본다고 알아차리겠느냐? 무리하지만 않으면 돼.”
“저격 총을 들고 가셨단 말입니다!”
“총은 상관없어. 무리하지만 않으면 돼. 오히려 1,2,4 팀 처럼 670 고지로 가는 것보다야 대민지원쪽이 안전하지 않겠느냐?”
“월맹군으로부터 노획한 모신나강 소총을 들고 가셨는데도 말입니까?”
“호신용으로 필요할 수도 있겠지. 마침 월맹군한테 노획한 장비니 감쪽같겠구나.”
호신용이라는 말에 박철민 상사가 확신을 갖고 채명진 장군을 노려보며 말한다.
“대민지원 중 호신용으로 쓸거면 노획 장비 중 PPSh-41 같은 기관단총을 가져가셨겠죠. 연사가 되니까요.”
채명진 중장이 박철민 상사를 노려보며 물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거냐?”
“이은서 대위님이 들고가신 모신나강은 한 발씩 수동으로 장전하는 볼트액션 방식이라 근거리에서 불리합니다.”
“그럼 네 말은···.”
“예, 대위님은 처음부터 저격을 목적으로 가신겁니다. 거기 마침 스코프도 달려있었죠. 월남 사람들의 전통복을 입고 스코프 달린 모신나강을 들고 침투한다? 누군가를 암살하러 갔다는 게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그럴리가···.”
박철민 상사가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못 믿으시겠으면 이 자리에서 유서를 읽어보시죠.”
채명진 장군은 은서의 유서를 바라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
그 시각 은서는 150 고지에서 멀리 떨어진 정글 속 외딴 마을에 있었다.
허름하고 펑퍼짐한 베트남의 흰색 전통복을 차려입고 삿갓을 쓰고 있는 그녀는 영락없는 현지 주민 같았다.
"와! 누나다 누나!"
"오늘도 초콜릿 줄거야?"
꼬마 아이들이 은서 곁에 삼삼오오 모여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때묻지 않은 아이들의 환한 미소가 이곳이 전쟁터라는 것도 잊게 할만큼 편안함을 느끼게 해줬다. 은서는 이곳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힘차게 외쳤다.
"그럼~ 오늘도 잔뜩 가져왔지!"
"우와아!"
가방 속에 있던 사제 초콜릿을 뜯어 하나하나 나눠주었다. 아이들에게 답하는 그녀의 언어는 베트남어였다. 겉으론 웃으며 행복한 표정을 짓고 따뜻한 누나의 마음으로 먹거리를 나눠줬지만, 한편으론 씁쓸한 생각도 들었다.
‘마을에 성인 남자가 하나도 없어. 다들 전쟁터로 간거야···.’
슬픈 감정이 들었다. 아이들에게 보이기 싫어 고개를 휙 돌려버린다. 삿갓은 얼굴 가리기에 참 좋다.
은서의 다음 봉사는 마을의 어르신들로 이어진다. 가방에서 의료 물품들을 꺼내 집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아픈 분들을 찾아다녔다. 할머니 한 분이 팔에 붕대를 감고 계셨다.
"할머니 저 왔어요."
"아이구! 아가씨가 또왔네 그려"
"팔은 좀 어떠세요?"
그렇게 물으며 은서는 할머니의 손을 살포시 잡아드렸다. 그분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표정 하나하나를 살폈고, 말하는 것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 열심히 귀를 기울인다.
"아가씨가 치료해준 덕에 아픈건 나았으이."
할머니가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다.
"붕대 갈아드릴게요."
은서는 할머니의 팔에 감긴 붕대를 조심스럽게 풀어낸다. 둔기 같은걸로 맞은 타박상이 보였다. 군인이었던 은서는 그게 어쩌다 생긴 건지 이해하고 있었다. 총의 개머리판에 맞은 흔적이다.
"근데, 예전부터 물어보고 싶은게 있었는데 말여."
"예, 할머니."
"자네는 어디서 왔는감?"
은서가 난처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건 왜요?"
"그야, 아가씨 말투가 여기 사람은 아닌 거 같았거덩. 뭐랄까··· 타지 사람이 우리말을 쓰는 느낌이랄까?"
월남 정규군과 협동작전을 펼치며 완벽히 익힌 말투라 생각했는데. 역시 할머니의 감은 속일 수 없나보다.
“그게 구분이 돼요?”
“그럼. 공부를 아무리 해도 말 속에 묻어 있는 고향의 느낌은 따라할 수 없는 거거든.”
은서는 상처에 소독약을 발라드리며 고민했다. 어디서 왔다 말할까? 조선에서 왔다고 말할까? 중국에서 왔다 해볼까? 그것도 아니면 난 베트남 사람이에요 하며 뻔뻔하게 거짓말을 해볼까? 그렇게 고민하다 은서는 이렇게 답했다.
“싸우다 왔어요.”
"전쟁터에서?"
“전쟁터에서 싸우고, 아버지랑도 싸우고, 부하들하고도 싸우고. 그냥 모두랑 다 싸우고 왔어요.”
팔에 붕대를 감아드리며 할머니의 눈치를 본다. 살짝 어두워지신 거 같다.
"참 이상해요. 난 왜 항상 주위사람들이랑 싸우고 다닐까? 그러기 싫었는데. 싸우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어느 순간 보면 항상 싸우고 있다니까."
"세상이 그렇지 뭐. 내 자식들도 싸우다 나갔는걸."
할머니 말에 은서가 물었다.
"자식분들이요?"
"그래, 아들이라고 있는 두 녀석이 서로 싸우다 집을 나갔지. 한 명은 경찰이었고 한 명은 학생이었는디··· 둘 다 나가서 무얼 하고 있는지 5년 째 돌아오지를 않어."
그 말에 은서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한 때는 같은 밥을 먹고 같은 말을 쓰던 사람들이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를 죽이고··· 우리 나라도 그랬는데···.”
"아버지랑 싸운것도 그래서였는감?"
"아뇨, 그건 다른 이유였어요. 그냥 뭐랄까? 어머니 돌아가시고나서 서로 그랬던거 같아요. 나는 나대로.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서로간에 바라는 모습이 달랐던거 같아요."
"그래도 너무 미워하지 말어. 세상에 자식 미워하는 아비는 없으니께."
"진짜 그럴까요?"
할머니가 웃으며 말한다.
"안 그랬으면 아가씨가 아버지랑 싸운걸 후회하고 있겠어? 다 사랑하는걸 아니까 후회하고 있는거지."
"후회라···."
할머니의 팔에 붕대를 감아드리며 은서는 조용히 미소짓는다.
‘에이 설마.’
***
할머니의 치료를 마치고 은서는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많은 것이 비어있는 허름한 마을. 사람도 식량도 사랑조차도. 전쟁의 폭풍이 스쳐지나간 마을들의 모습은 대개 모든것이 비어보였다.
"저 가볼게요. 다른 마을도 돌아봐야 해서요."
"누나 조심해서가~"
"또 와!"
아이들이 환한 미소로 손을 흔들었다. 은서는 그 중 한 아이의 속을 꼬옥 붙잡으며 말했다.
"할머니 말 잘 듣고. 알았지?"
"응!"
은서는 한걸음 한걸음 텅빈 농촌 길을 걸어가며 멀어지는 할머니를 바라봤다. 한참을 떨어진 거리인데도 마치 오랫만에 만난 가족을 떠나보내듯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은서는 다시한번 멀리서 손을 흔들어주며 말했다. 들리지 않을 아주 먼 거리에서.
“미안해, 할머니.”
은서의 마음이 무거웠다.
그 후로 다섯개의 마을을 더 다녔다.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다친 민간인들을 치료해주면서 유창한 베트남어로 말동무가 되어주다보면 어느덧 친한 사이가 되어있었다.
많은 것을 나눠주다보니 군장 속 먹거리와 의료품이 텅텅 비었지만, 베트남은 한국과 같이 쌀을 주식으로 하는데다, 기후 특성상 3모작을 할 수 있는 나라라 이틀이고 사흘이고 농사일을 도울 수 있었다.
물론. 한 평생을 공주로 산 은서였기에 농사일을 도와봐야 민폐밖에 안됐겠지만 뭐··· 마음이 중요한거니까.
"헤헤··· 죄송해요."
"아휴. 젊은 처녀가 그럴 수도 있지"
낫질 조차 제대로 못하는 멍청이가 여기 있었다. 이은서라고.
어쨌든, 타지에서 온 젊은 처자 같은데, 베트남어도 능숙하게 하고, 간단한 의술도 가능하면서, 먹을것도 주니 19번 도로 인근에서 '정체불명의 의인'은 유명 인사가 되었나보다.
저녁무렵 마을을 떠나 10분을 걷는데 검은 옷을 입은 한 여자가 뒤에서 모신나강 총을 겨누고 말했다.
“손들어.”
베트남어였다. 비슷한 옷을 입고 있던 은서는 조용히 손을 들어 베트남어로 속여봤다.
“해방군(베트콩의 현지 명칭) 동지인가보네? 반가워.”
유창하게 속였다 생각했는데 총구가 내려오질 않는다. 통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70개나 되는 미제 초콜릿을 들고 다니는 해방군 동지도 있나?”
그 말에 은서가 헛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70개부터 센거야? 몇 일 전부터 계속 따라왔나보네. 무슨 해방군이 이렇게 한가해?”
“네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구분해야 했어. 어느 나라 사람이지?”
그러자 은서는 뒤돌아 말했다.
“유학 다녀온 베트남 지식인.”
"누굴 바보로 알아? 네 베트남 발음 엄청 부정확하거든?"
"할머니도 눈치 채시더니 대체 난 얼마나 못하는거니?"
은서가 한숨을 쉬며 영어로 말했다.
“사실 난 미국인이야. 베트남 전쟁의 참상을 취재하러 온 서방 국가의 기자지. 몇일동안 내내 마을 돌아다니며 미국 초콜릿 나눠주고. 의료 봉사도하고. 반전 기자인데 당연한 거 아니겠어?”
"뭐라고 씨부리는거야?"
“봐봐. 영어 잘하지? 베트남 전쟁의 참상을 취재하러 온 미국인 기자라고 했어. 초콜릿이랑 의료지원. 반전 기자면 당연히 할 수 있는거잖아.”
"카메라도 없는 주제에."
“잃어버렸는데.”
“거짓말.”
“에휴··· 의심 많긴···.”
그 다음엔 중국어로 말했다.
"거짓말해서 미안해. 사실 난 중국인이야. 너희들을 도우러 온 중화인민공화국의 여군이지."
"번역."
"중화인민공화국의 여군입니다. 니하오."
"더 해봐."
그 다음엔 프랑스어였다.
"이야, 넌 진짜 의심이 많은 아이구나? 그래, 난 사실 식민지 시절 베트남에 살던 프랑스인의 후손이야. 프랑스인과 베트남인 사이에 태어난 혼혈이지. 어때? 신빙성이 있지? 믿어줘 제발.”
"......"
은서가 성질을 내며 한국어로 말했다.
"에이씨, 그래 나 조선인이다! 됐냐?"
"역시 반동분자였구만."
"어? 우리말을 하네?"
"당연하지, 조선노동당의 요원인데."
은서는 깨닫지 못했다. 베트남 여자의 베트남어도 부정확했다는 걸. 자신이 '착각'한 여자는 손에 들고있던 모신나강 총을 격발했다.
</yes,></i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