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슈퍼볼 (1)
은우는 슈퍼볼 하프타임 공연을 맡아달라는 소식을 듣고 나서 제이슨이 떠올랐다.
‘제이슨의 버킷리스트에서 봤는데.’
버킷리스트의 여섯 번째 목록 슈퍼볼 결승전 보기를 은우는 기억하고 있었다.
‘제이슨과 함께 가야겠다. 그리고 제이슨과 같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어.’
은우는 이번 무대를 누구보다 멋지게 장식하고 싶었다.
길동이 은우에게 말했다.
“우리 은우 대단하다. 슈퍼볼이라니. 그거 월드컵보다 대단한 거 알아? 우리나라에선 비유할만한 게 없는 것 같아. 올림픽 개막식? 폐회식. 아, 모르겠다. 암튼 미국 사람들 말로는 정말 대단한 거라고 하더라고.
신문 헤드라인에 네가 나왔어.”
길동은 거리의 신문 가판대에서 사 온 신문을 펼쳐 놓았다.
[슈퍼볼 하프타임 축하 공연. 이은우. 동양인으로서는 최초로 무대에 서다]
“여기 네 사진이 있잖아. 다들 놀라던데. 무슨 말인지 알아듣진 못했지만.”
은우는 뿌듯하게 미소지었다.
‘나라의 이름을 걸고 열심히 해야 해. 잘못할 경우엔 욕을 먹을 수도 있으니까.’
은우는 강라온이 한 말을 떠올렸다.
“개막식 때 미국 국가를 부르다가 가사가 틀리는 바람에 크리스티나 아길렐라가 큰 욕을 먹었었어. 때문에 사과문까지 올렸다니까. 하프타임 무대는 미국 국가보다 오락성이 강하지만 그래도 많은 미국인들이 보고 있고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무대거든.
코카콜라와 디즈니에서 협찬을 해 주기로 해서 약간의 광고 효과를 넣어주는 게 좋을 거 같은데 그건 네가 무대를 짜면 우리가 넣어보도록 할게.”
은우는 자신이 불렀던 노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1. 겨울나라 OST
2. 위대한 목소리 OST – [음악의 신은 나와 함께]
3. 미니 앨범 1집 - [난 너무 귀여워]
4. 싱글 [아기로 살기는 너무 피곤해.]
5. 싱글 [첫사랑]
6. 블랙 레오퍼드 2 OST - [희망과 용기]
은우는 길동에게 말했다.
“횬아, 다른 가슈드리 공연한 거 트러 주떼요.”
길동이 너투브로 영상을 검색하여 틀어주었다.
화면 속에선 비욘세, 레이디 가가가 노래를 불렀다.
‘정말 화려하네. 무대 장치도 그렇고 하늘을 날기도 하잖아. 미술 재능을 살려서 남보다 멋진 무대를 꾸며봐야겠다.’
길동이 옆에서 탄성을 질렀다.
“진짜 네임드 가수들만 나오는구나. 미국에서만 유명한 가수가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수를 뽑는다는 게 정말 실감이 난다. 은우야 넌 고작 다섯 살 나이에 어쩜 그렇게 대단해졌니?”
“헤헤헤헤헤헤.”
은우는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내가 아프리카와 한국의 아이들, 그리고 미국의 제이슨과 같은 어린이들에게 꿈을 줄 수 있을 거야. 내 인생이 지금 힘든 사람들에게 큰 힘을 줄 수 있을 거야. 노래도 영화도 결국은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거니까.
난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전달할 거야.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용기와 희망일 테니까.’
은우는 파리넬리의 삶을 떠올렸다.
‘남성성을 잃는 대신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목소리를 가졌었지. 그 목소리로 인해 세상의 찬사와 부를 얻었지만 난 항상 외로웠어. 누군가를 사랑할 수도 가족을 만들 수도 없었지.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고 형은 끊임없이 내 목소리를 이용하고자 했어.
그래도 내가 그 삶을 견딜 수 있었던 건 노래에 대한 사랑과 희망이었지. 노래를 부르는 순간은 내 인생이 더 나아질 거라고 믿을 수 있었으니까.’
파드와의 삶이 스쳐 갔다.
‘파드와일 때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부터 정말 하루하루를 버텼지. 케미기샤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난 더 이상 살 수 없었을 거야. 케미기샤는 내 희망이었고 내 용기였지. 지금 이 순간 누군가 그때의 나만큼 힘들다면 그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싶어.’
***
마리는 제이슨에게 편지를 가져다주었다.
“제이슨 편지 왔다.”
“편지요? 은우인가?”
제이슨은 은우를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늘 혼자였던 제이슨에게 은우는 친구의 따뜻함을 일깨워주었다.
은우와 함께하고 나선 시력 저하도 멈추었다고 며칠 전 방문한 의사 선생님이 말씀해 주셨다.
‘아름다운 것들을 더 많이 보고 가고 싶어요.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제이슨은 자신도 모르게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부모님을 위해 은우를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조금만 더 세상에 머무르다 가고 싶었다.
편지를 뜯으니 안에선 슈퍼볼 초대장이 나왔다.
“엄마 슈퍼볼 초대장이에요. 제가 슈퍼볼에 가나 봐요. 두 장이나 있어요. 엄마도 가실래요?”
“그럼. 당연히 같이 가야지. 근데 슈퍼볼 초대장이면 비쌀 텐데. 누가 보냈니?”
초대장 옆엔 은우의 삐뚤빼뚤한 글씨로 [가치 가.]라고 쓰여 있었다.
“은우예요.”
마리가 오늘 자 신문을 제이슨에게 주면서 말했다.
“은우가 슈퍼볼 하프타임 축하 공연을 하게 됐다는 기사가 났던데 그래서 초대장을 보냈나 보다. 여기 읽어보렴.”
“정말요?”
제이슨은 신이 나서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2021년 슈퍼볼 하프타임 축하 공연 무대는 이은우가 맡게 됐다. 이은우는 [위대한 목소리]의 파리넬리 아역으로 오스카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면서 미국 팬들에게 이름을 알렸다. [블랙 레오퍼드 2]의 흥행행진과 함께 현재 미국에서 가장 비싼 몸값을 자랑하는 아역배우가 되었으며 [아기로 살기는 너무 피곤해]와 [난 너무 귀여워] 두 곡이 빌보트 차트에 랭크돼있는 가수이기도 하다.
또 카를로스라는 이름으로 뉴욕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한 전천후 아티스트다. 전시회 전액을 아프리카의 학교를 만드는 금액으로 후원하였으며 한국과 아프리카에서 후원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슈퍼볼 측은 긍정과 희망이라는 슈퍼볼의 슬로건과 이은우의 이미지가 잘 맞아떨어져 올해의 축하 공연 스타로 이은우 군을 선정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제이슨이 신문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정말이네요. 은우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공연을 할 거예요. 제 친구니까요.”
“그럼 슈퍼볼을 보러 온 많은 사람들이 용기를 얻어가면 좋겠구나.”
마리는 제이슨에게 은우라는 친구가 생긴 것에 큰 감사를 드렸다.
‘어느 날 갑자기 선물처럼 다가온 은우 덕택에 제이슨이 외롭지 않아서 다행이야. 제이슨이 커가면서 부모가 채워주기엔 부족한 부분들이 있었으니까.
학교에도 안 가서 늘 혼자 있는 제이슨이 안쓰러웠는데 은우를 만나고 나서 제이슨이 활기를 찾아가는 것 같아.’
제이슨이 신이 나서 외쳤다.
“슈퍼볼 때 뭘 입고 갈까요? 엄마. 모자를 쓰는 게 좋겠죠?”
“새 옷이라도 하나 사러 갈까? 아니면 인터넷으로 찾아볼까?”
제이슨은 요즘 들어 거울을 자주 보았다.
마리는 그런 제이슨의 변화가 기뻤다.
‘전엔 늘 조용히 숨어 지내려고만 하고 거울도 보기 싫어하더니 이젠 거울도 자주 보고 옷차림에도 관심이 많아졌어. 이제야 사춘기 아들을 키우는 거 같네. 제이슨 새 옷, 새 신발 많이 사 줄 테니까 행복하게 지내렴.’
제이슨이 컴퓨터 앞에 앉으면서 말했다.
“제가 장바구니에 넣어놓을게요.”
***
슈퍼볼 결승전 날 제이슨은 새로운 티셔츠를 입고 미식축구공을 안은 채 은우를 기다렸다.
제이슨의 집 앞으로 기다란 리무진이 멈춰 섰다.
정장을 입은 운전기사가 내리더니 제이슨과 마리를 에스코트했다.
“이 차를 타고 경기장까지 함께 가시죠. 은우는 경기장에서 기다린다고 합니다. 아마 준비할 게 많은 모양이에요.”
“네.”
마리가 제이슨을 휠체어에서 안아 들어 차로 옮기려고 했다.
운전기사가 제이슨을 대신 안으며 말했다.
“오늘 하루 동안은 제가 모든 걸 도와드릴 겁니다. 편안히 가시면 돼요. 차에 타시죠.”
운전기사가 제이슨을 차에 앉힌 뒤 휠체어도 트렁크에 실었다.
마리는 차에 탔다.
제이슨은 차를 보며 놀라고 있었다.
“엄마 차 안에 게임기도 있고 티비도 있고 냉장고도 있어요.”
“그래. 은우 덕분에 좋은 차도 타 보는구나.”
제이슨은 미식축구공을 든 채 신이 나서 외쳤다.
“축하 공연도 보고 제이제이 와트에게 사인도 받을 거예요. 너무 기대돼요.”
“그래 슈퍼볼 경기를 실제로 보다니 나도 기대된다.”
제이슨의 병원비를 대느라 일을 쉬어본 적이 없는 마리였다.
‘극장에 간 지도 공연을 본 지도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으니까. 티비와 맥주가 유일한 낙이었으니까. 그래도 제이슨 엄만 네가 웃는 게 가장 기뻐.’
차가 멈추고 운전기사가 말했다.
“도착했습니다. 기다리시면 제가 안으로 안내해드리죠.”
운전기사가 제이슨의 휠체어를 꺼내고 제이슨을 태웠다.
마리가 휠체어를 밀려고 하자 운전기사가 말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오늘 사람이 많아서 자칫 위험할 수도 있으니 잘 챙기라는 분부가 있었어요.”
제이슨이 운전기사에게 말했다.
“감사해요. 이름이 뭐예요?”
“전 마이클이라고 해요.”
“고마워요. 마이클. 그럼 오늘 하루만 부탁할게요.”
마리는 제이슨의 변화에 놀랐다.
‘남과 다른 외모 탓인지 처음 보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도 싫어하고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는데 정말 많이 달라졌구나. 제이슨.’
마리도 웃으면서 대답했다.
“고마워요. 마이클. 덕분에 저도 좀 구경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디 가든 마리는 제이슨을 돌보느라 마음 편히 쉰 적도 주변을 구경한 적도 없었다.
‘생각해보니 정말 오랜만이네. 이렇게 밖에 나와서 구경하는 거.’
슈퍼볼 경기장은 사람들로 꽉 채워져 있었다.
발 디딜 새 없이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친구와 연인들과 가족들과 휴일을 즐기러 온 그들은 응원하는 팀의 옷을 입고 응원 도구를 들고 있었다.
제이슨이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어떤 팀이 이길까요? 정말 기대돼요.”
“당연히 네가 응원하는 아틀란타겠지.”
마이클이 대화에 참여했다.
“나도 아틀란타의 팬이란다.”
제이슨이 마이클에게 주먹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제이슨이 마이클에게 주먹을 부딪쳐 주었다.
“나도 반갑다.”
제이슨과 마리는 마이클의 안내로 가장 앞자리에 배치되었다.
마리가 감탄했다.
“자리 정말 좋다. 진짜 잘 보이겠는데.”
마이클이 대답했다.
“축하공연자의 가족에게 배정된 표니까요.”
“정말요?”
제이슨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응. 은우는 가족들이 한국에 있으니까 대신 친구를 초대한 것 같아. 이렇게 좋은 자리에서 슈퍼볼 경기를 관람하는 건 나도 처음이야. 고마워. 제이슨.”
“재밌는 경기가 됐으면 좋겠네요.”
***
슈퍼볼 경기가 시작되고 경기장은 응원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제이슨도 목소리 높여 아틀란타를 응원했다.
아틀란타가 6, 뉴 잉글랜드가 10인 상태에서 하프타임이 시작되었다.
“아쉽다. 조금만 더 빨랐으면.”
제이슨과 마이클은 함께 아쉬운 마음을 토로했다.
경기장의 모든 조명이 꺼졌다.
“시작하려나 봐요.”
제이슨이 마이클과 마리에게 말했다.
경기장의 한쪽 끝에서 설룡을 탄 은우가 등장했다.
“와, 용이다.”
“[블랙 레오퍼드 2]에서 봤던 그 용 아니야?”
경기장 중앙에는 코카콜라의 빨간색 원이 새겨졌다.
설룡은 그 원의 중앙을 향해 걸어왔다.
빨간색 원은 꽃잎이 되어 경기장을 수놓았다.
“와, 영화 같아.”
“용이라니 정말 멋진데.”
용에서 내린 은우가 줄을 타고 하늘을 날아 무대로 내려왔다.
관객들은 은우의 모습에 열광했다.
“와아. 정말 와찰라 같은데.”
“진짜 영웅 같잖아.”
무대로 내려온 은우가 [블랙 레오퍼드 2]의 OST [희망과 용기]를 부르기 시작했다.
[두 누늘 크게 뜨고 세샤을 바랴뱌.
나를 조아하는 샤람들 희마을 가꼬 사라가길
내갸 너의 비치 대줄게.
힘드러도 포기하지 마라요.
내 이르믈 불러져요.
꾸믈 꾸듯 날개를 펼치고 살아가고 시퍼요.
이제는 진정한 용기갸 소사나네.
우리의 꾸미 피어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