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전시회 (1)
은우가 에릭의 손을 끌었다.
에릭은 고민했다.
‘이런 버스킹 무대에서 노래해도 되는 걸까?’
어딘가에 자신을 알아보는 팬이 있을 것만 같았다.
무명 가수 브랜든은 에릭을 알아보았다.
‘세상에 에릭이잖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수.’
브랜든은 신이 나서 에릭을 소개했다.
“여러분 포크송의 대부 에릭이 오셨습니다.”
거리에 서 있던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에릭, 브라보.”
에릭은 어쩔 수 없이 무대에 나갔다.
은우가 프링이를 어깨에 얹은 채 노래를 불렀다.
“프링, 프링, 프링이 냐의 비밀 칭규.
빨간, 노랑, 파랑, 초롱 매일매일 바끼는 색깔.
나는 춤을 추어요.
프링, 프링, 프링이 냐의 비밀 칭규.
외로운 냐른 파란색
시니 냐는 냐른 빨걍색
쓸쓸한 냐른 노량색
나는 춤을 추어요.”
은우가 프링이와 함께 추는 춤에 관객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에릭도 은우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너무 귀엽다. 은우는 노래의 기쁨을 알고 있는 것 같아. 제일 중요한 건데. 내가 잊고 살았던 것들.’
에릭은 은우를 보며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아버지가 처음 기타를 사 주셨던 날이 생각난다. 7살 때 처음 받았던 낡은 기타. 그 기타는 중고용품 가게에서 사 주신 거였는데.’
기타를 처음 받았던 날 설레서 하루 종일 기타를 쳤었다.
‘음계도 모르면서 하루 종일 기타를 쳤었지. 그땐 내 마음을 기타로 표현했었어. 기타가 나와 함께 울고 웃었지.’
에릭은 성공에 대한 불안감이 음악에 대한 열정을 짓누른 현실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음악은 행복한 거였는데.’
에릭은 프링이 노래를 부르는 은우를 보며 자신도 다시 일곱 살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겠다고 결심했다. 에릭이 기타에 손을 얹고 연주를 시작했다.
“어린 시절 나는 항상 혼자였어. 그런 나의 유일한 친구. 기타.
기타는 나와 함께 울고 웃었지.
파란색 목소리의 기타는 나와 함께 공을 차며 놀았어.
노란색 목소리의 기타는 엄마에게 혼난 나를 위로해 주었지.
빨간색 목소리의 기타는 나와 함께 놀이 공원에 가서 놀이 기구를 탔지.
초록색 목소리의 기타는 나와 함께 산책을 했어.”
에릭의 감미로운 목소리에 거리에 선 사람들이 천천히 리듬을 타며 몸을 흔들었다.
사람들은 모두 어린 시절로 돌아가 음악을 들었다.
‘어린 시절 엄마한테 혼나서 집 나가겠다고 막 울었었는데.’
‘처음 놀이 공원에 갔던 날, 이렇게 멋진 곳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어. 집에 가기 싫어서 울면서 떼썼었는데.’
‘해가 졌는데도 계속 공놀이를 하고 싶었던 날들이 떠올라.’
‘한겨울에도 친구만 있으면 너무 좋았었지.’
사람들은 모두 따뜻하고 행복한 기억 속에 서 있었다.
은우가 에릭의 기타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프링이의 칭규를 소개하께요. 설탕이, 카롱이, 사탕이, 제리.
설탕이는 달달해. 카롱이는 부드러어. 사탕이는 콤콤해. 제리는 말랑말랑해.
우리는 모두 칭구. 우리는 모듀 사랑해. 기타를 사랑해. 에리글 사량해. 여러분도 샤랑해.”
에릭은 기타를 치면서 은우의 귀여운 가사에 웃음을 짓고 말았다.
브랜든이 에릭의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내가 일곱 살이던 때 나를 기다리던 작은 친구 베일리.
너를 안고 있으면 너무 따뜻해.
내가 울면 내 눈물을 핥아주며 위로하던 베일리.
너와 함께 들판을 달릴 때 난 하늘을 날고 있는 것 같았어.
나의 작은 친구 베일리.
베일리 넌 나의 세상.”
에릭이 브랜든의 노래에 화음을 넣었다.
“베일리 넌 나의 세상. 영원히 나와 함께.”
은우도 브랜든의 노래에 화음을 넣었다.
“베일리 넌 냐의 세샹. 영언히 냐와 함께.”
백인수는 에릭와 은우의 노래를 들으며 행복에 빠졌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인 에릭과 은우가 함께 노래하는 장면을 보게 되다니. 미국에 오니 이렇게 생각하지 못했던 멋진 선물을 받게 되네.’
백인수는 백수희에게 캐톡으로 현재 상황을 알려주었다.
[백인수(멋진 아빠)] : 은우가 에릭과 함께 노래 부르고 있다.
[귀여운 도둑(세상에서 가장 예쁜 딸)] : 맙소사. 에릭이랑요? 에릭은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가수잖아요. 세상에!!!
[백인수(멋진 아빠)] : 나도 이런 장면을 보게 될지 몰랐다. 지금 영상 찍는 중. 나중에 한국 가서도 봐야지.
[귀여운 도둑(세상에서 가장 예쁜 딸)] : 에릭이 버스킹을 하다니. 아빠 에릭 콘서트 늘 가고 싶어 했잖아요. 소원 이루셨네요.
[백인수(멋진 아빠)] : 은우 그림 많이 팔리는 게 소원이었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다른 소원을 이루었다. 다른 소원도 곧 이루어져 은우 그림도 많이 팔리겠다. 실제로 들으니 에릭 노래가 더 좋구나. 목소리가 정말 멋져.
[귀여운 도둑(세상에서 가장 예쁜 딸)] :아빠도 에릭이랑 노래 한 곡 하세요. 버스킹이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아빠도 노래 잘하시잖아요.
[백인수(멋진 아빠)] : 내가? 여기 사람들이 이름 모를 동양인의 노래를 듣고 싶어 할까?
백인수가 휴대폰을 보고 있을 때 은우가 백인수의 손을 잡았다.
“하뷰지. 가치 노래해여. 우리 가치 하던 거 이쬬?”
“할아버지와 색연필?”
“네네네네네.”
은우는 어린이집에서 배운 무용을 하기 시작했다. 무릎을 굽히며 허리에 손을 얹고 리듬을 타는 귀여운 은우의 모습에 사람들이 탄성을 질렀다.
“저, 동양 아기 너무 귀엽네.”
“쟤 와찰라잖아. 아직 안 봤어? [블랙 레오퍼드 2]?”
“봤지. 근데 저 아기가 와찰라라고? 와찰라는 흑인이던데.”
“분장 때문이야. 와찰라 역을 소화한 아기가 은우라고.”
“이야, 대단하다. 근데 저 아기 분장에 가려져서 몰랐는데 정말 귀엽다.”
“동양 아기들은 다 귀여운가. 통통한 볼 좀 봐. 춤출 때마다 살짝 옷이 올라가서 배가 드러나는 게 너무 귀여워.”
“아기들은 다 귀엽지. 우리 세라도 어릴 때 얼마나 귀여웠다고.”
백인수가 노래를 시작했다.
“어젯밤에 우리 할아버지가 색연필을 사서 오셨어.
할아버지 얼굴엔 삐쭉삐쭉 수염이.”
은우가 노래를 이었다.
“따가따가따가따가 까만색 수염. 삐뚤삐뚤해.
동글동글동글 동그란 안경. 어질어질해.”
에릭은 은우와 백인수의 노래를 사랑스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할아버지와 손자의 사랑.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네. 내가 음악에 담아야 하는 게 이런 거였어. 내 음반이 1등을 하느냐보다 더 중요했던 거. 사람들의 모습, 인생, 사랑. 그것들을 노래에 담는 거. 왜 그걸 잊고 있었을까?’
에릭은 미뤄뒀던 음반 발매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
친구와 함께 뉴욕 여행을 온 [걸스 온 더 탑]의 멤버 민아는 은우의 sns에 들어갔다가 은우가 올린 루루의 인형을 보았다.
‘와, 이 인형 너무 귀여운데 이야기도 너무 감동적이야. 사람도 자기 자식을 모른 척하는 마당에.’
민아는 얼마 전 신문 기사에서 보았던 입양아 학대 기사를 떠올렸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아기들이 죽는 기사가 나와. 어떤 엄마는 아기를 원룸에서 낳아서 들키지 않으려고 버려서 죽이고 어떤 엄마는 집을 분양받기 위해 아기를 입양한 뒤 학대해서 죽이고. 이런 기사들만 보다가 루루의 이야기를 읽으니 눈물이 난다.’
민아는 은우가 올린 좌판이 덤보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침 근처인 것 같은데 가 봐야겠다.’
민아는 덤보 근처에서 캐서린의 좌판을 찾아냈다.
‘바느질도 꼼꼼하고. 루루의 얼굴도 정말 잘 표현했어. 잘 만든 인형이야.’
민아는 캐서린의 인형 만드는 솜씨에 감탄했다. 민아는 루루와 그의 새끼 루나, 루비, 루카를 골라서 캐서린에게로 갔다.
“인형이 정말 예뻐요. 얼마예요?”
“감사합니다. 오늘따라 인형이 많이 팔리네요. 한 달 내내 나와 있어도 하나도 못 팔 때가 많았거든요. 85달러요.”
“여기요. 혹시 제 인형도 만들어 주실 수 있으세요? 저는 한국의 걸그룹이에요. 저희 그룹 굿즈를 만들고 싶은데 루루 인형을 보니 솜씨가 정말 좋으세요.”
“걸그룹요? 저도 케이팝 좋아해요.”
캐서린은 생각지도 못했던 제안에 놀랐다.
민아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예쁘게 만들어 주세요. 잘 부탁드려요.”
“감사합니다.”
캐서린은 처음 받아보는 의뢰에 어안이 벙벙했다.
“매니저가 연락할 거예요. 제작비도 많이 부르세요. 지금 파시는 인형 가격이 너무 저렴한 거 같아요. 더 비싸게 불러도 살 것 같은데요.”
캐서린은 오늘 하루 너무 희망을 본 것 같아서 눈물이 났다.
‘그동안 너무 외로웠는데. 이 길의 끝에 희망이 있을까 확신이 없어서 힘들었는데. 오늘에서야 내가 기다리던 그 대답이 온 걸까?’
민아는 sns에서 산 루루 인형을 별스타와 [걸스 온 더 탑] 블로그에 공유했다.
“제 팬들도 인형을 사러 올 거예요. 루루 인형 파이팅!”
***
[아프리카 아기들을 위한 자선 전시회]가 시작되었다. 미술관 앞은 기자들과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총책임자인 바넷은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에릭이 바넷에게 말했다.
“[블랙 레오퍼드 2] 때문에 저절로 홍보가 된 듯하네. 미술관 전시회가 아니라 극장에 온 기분인데. 안 그래 바넷?”
“나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온 전시회는 처음이야. 은우 인기가 대단하다.”
“내 팬은 어딨나 모르겠어. 전부 은우 보러 온 거 같아. 아기들도 정말 많다.”
“그래, 아기랑 아기 손을 잡고 온 부모들이 정말 많다.”
“나도 어서 음반을 내야지. 그래야 내 팬들도 나를 보러 올 텐데. 오늘 내 그림만 남는 거 아닌지 몰라.”
“에릭 포크송의 대부께서 왜 그러시나? 자네 팬들이야말로 부자가 많잖아.”
뉴욕에 사는 은우의 팬, 힐톤은 은우의 그림을 사기 위해 가장 먼저 전시회에 입장하였다.
“은우가 그린 그림 전부 보여주세요.”
힐톤은 미국의 호텔 재벌인 파리스가의 큰딸이었다. 힐튼은 은우의 그림 중 다섯 점을 골랐다.
“방에 걸어놓으면 힐링이 되겠네요. 다섯 점 모두 살게요. 금액은 이 정도면 되겠죠.”
직원은 힐톤이 내민 금액을 보고 깜짝 놀랐다.
“50만 달러.”
은우의 그럼 다섯 점은 한화로 5억 5천만 원 정도에 팔렸다.
바넷은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이 상태로 간다면 은우 그림만으로도 목표한 금액을 모두 모을 수 있겠는데.’
두 번째로 은우의 그림을 사러 온 사람은 [블랙 레오퍼드 2]의 골수팬인 빌이었다. 빌은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 중이었는데 지난달 운 좋게 파워볼에 당첨돼 수령액으로 50만 달러를 수령했다.
빌은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복권 당첨 사실을 숨기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 좋은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 중이었다.
‘흑인으로서 사는 일이 힘들었으니까 기왕이면 같은 흑인을 도와줄 수 있으면 좋겠어.’
빌은 여기서 그림을 사면 자신이 큰 돈을 쓴 사실이 드러나지 않으면서 기분 좋게 기부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흑인이 아닌 은우가 흑인을 돕겠다고 나선 게 기특하기도 하고.’
빌은 자신이 그린 그림 옆에 서 있는 은우에게 말했다.
“사인 한 장 해 주겠니? 은우야.”
“네네네네네.”
은우는 그림 옆에 사인을 해 주었다. 원 세 개를 커다랗게 그리고 그 속에 눈동자를 그리는 귀여운 사인이었다.
빌이 은우의 사인을 보면서 웃었다.
“사인이 꼭 은우처럼 장난꾸러기네.”
“네네네네네.”
빌은 은우를 꼬옥 안아주었다.
“은우야, 지금처럼 이쁜 마음을 간직하고 자라렴. 세상을 비춰주어 정말 고맙다.”
“헤헤헤헤헤.”
은우는 빌에게 안겨 웃었다.
빌은 이만 달러를 지불하고 은우가 그린 그림을 샀다.
‘보기만 해도 뭉클한걸.’
그림 속엔 은우가 그린 아프리카가 있었다. 기린과 얼룩말이 뛰노는 땅. 커다란 눈을 한 아프리카의 흑인이 밝게 웃고 있었다.
‘평생 일만 하면서 살 줄 알았는데 운 좋게 복권도 당첨되고. 좋은 일을 했으니 이제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나봐야겠어. 이 정도 여유는 부려도 되겠지.’
빌은 트럭에 은우의 그림을 실으면서 여행사로 전화를 걸어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
에릭은 그림이 팔리지 않아 울상이었다.
‘예상을 하긴 했지만, 은우 그림만 날개 돋친 듯 팔리고 내 그림은 팔리지가 않잖아.’
엄마 손을 잡은 여섯 살짜리 꼬마가 엄마의 손을 잡고 에릭의 그림을 보러왔다.
꼬마는 그림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림 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에릭이 꼬마에게 다가갔다.
“그림이 마음에 드니?”
“네. 잠깐만요.”
꼬마가 가방을 열더니 저금통을 꺼냈다.
오랜만에 보는 돼지 저금통이었다.
에릭은 꼬마의 귀여운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이 꼬마에겐 이게 전 재산일지도 모르겠네. 용돈을 받아서 모은 건가.’
꼬마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엄마갸 그림 사면 아프리카 아기들에게 간다고 해떠요. 이걸로 그림 살래요.”
에릭은 고민에 빠졌다.
‘이 저금통에 들어있는 돈을 모두 꺼내도 10달러도 안 될 것 같은데. 아마 전시회에서 팔린 그림 중 가장 낮은 가격일 거야. 하지만 저 아이의 마음을 돈으로 환산할 수 있을까? 저 순수한 눈망울을.’
에릭은 자신의 그림을 꼬마에게 주었다.
“아프리카 아기들이 고마워할 거야. 이름이 뭐니?”
“로건이요.”
“그래, 로건. 넌 정말 멋지고 대단한 일을 한 거야. 넌 꼬마 영웅이란다.”
에릭의 말에 로건이 눈을 반짝였다.
“와찰라처럼요.”
“응. 와찰라처럼.”
“우와.”
로건이 신이 나서 박수를 쳤다.
에릭은 로건에게 엄지를 들어 보였다.
‘이렇게 작은 아기도 누군가를 돕고 싶어 하니 그래도 아직 세상엔 희망이 있구나. 이런 순간들을 노래로 만들어 보고 싶어.’
에릭의 머릿속에서 새로운 멜로디가 떠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