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아프리카로 가다 (4)
길동이 강라온에게 전화해 채드윅의 전화번호를 알아내 창현에게 알려주었다.
은우는 떨리는 마음으로 채드윅이 전화를 받길 기다렸다.
“Hi.”
수화기 너머로 채드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채드윅. 저 은우예요. [블랙 레오파드 2]의 대보늘 바다떠요. 너무 재미떠요. 제가 꼭 하고 시퍼요.”
“은우야. 몸은 어때? 강라온이 네가 아프다고 출연을 거절하길래 걱정했었어.”
은우는 채드윅에게 오해로 생긴 이 상황을 모두 설명할 수가 없어서 답답했다.
“점점 개차나지고 이떠요. 혹시 다른 아기가 추련하기로 핸나요?”
“아직. 처음부터 너를 주인공으로 쓴 대본이라 다른 주인공을 찾기가 어려웠어. 그래도 촬영을 시작해야 하니까 아예 새롭게 신인배우를 찾아보려고 했어. 할리우드에 있는 5살 흑인 아역배우의 프로필을 모두 받아서 읽고 있는 중이었는데 쉽지 않았어.”
“휴우 다행이다. 언제 시자캐요?”
“다음 달에 시작할 거야. 잠비아에서.”
“저도 거기 가요. [세이브 더 월드]에서.”
“[세이브 더 월드]?”
“봉사하러 가기로 해떠요.”
“아아.”
채드윅은 은우가 봉사를 하기엔 너무 어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출연을 해준다는 말에 큰 기쁨을 느껴 자세히 묻지 않기로 했다.
“출연해 준다니 다행이야. 더 이상 다른 아역배우의 프로필을 읽지 않아도 되겠어.”
“씬냐요. 열씸히 연습하께요.”
은우는 채드윅과의 전화를 끊고 새로운 희망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창현과 백수희, 길동은 은우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수희가 물었다.
“잘 됐어?”
“네에. 추련하기로 해떠요. 잠비아에서 한다능데 [세이브 더 월드]에서도 거기 간다고 해떠요.”
길동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역시 은우 클라스. [블랙 레오파드 2]는 은우를 위한 영화였던 거야. 출연을 거절했었는데도 아직 적임자를 찾지 못했다니. 은우 덕분에 이번에 아프리카에 가겠네. 근데 아프리카는 음…….”
길동은 아프리카란 나라를 떠올리면서 더위와 벌레와 나쁜 위생상태를 떠올렸다.
‘미국엔 갈 땐 신났는데 이번엔 은우만 아니면 안 가고 싶다. 더위는 난 정말 쥐약인데. 다한증 때문에 한국에서도 손에 늘 땀이 줄줄 흐르는데 아프리카에 가면 땀 파티가 날 거야.
어쩌면 사람들이 내 곁에 오지 않으려고 할지도 모르겠군.’
길동은 여러 가지 걱정과 함께 어떤 것들을 가져가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근데 아프리카에 갈 땐 뭐가 필요할까요? 모기약을 한 상자 가져가야 하려나.”
창현이 거실 서랍에서 종이를 꺼내며 대답했다.
“그것도 필요하긴 할 거 같은데 일단 가장 중요한 건 예방주사를 맞는 거야. 그리고 말라리아 약을 복용해야 한대. 예방주사를 맞지 않으면 입국이 안 된대. 지난번에 오신 [세이브 더 월드] 팀장님께서 이 종이를 주고 가셨어.”
창현이 내민 종이에는 받아야 할 예방접종 리스트와 준비해야 할 목록이 적혀져 있었다.
길동은 재빠르게 종이를 스마트폰으로 찍었다.
“꿀팁이네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무슨 주사를 이렇게 많이 맞아야 해요? 황열, 장티푸스, A형 간염. 말라리아 약도 먹어야 하고. 아프리카는 정말 가기 힘든 곳이구나.”
길동의 말을 듣는 은우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주사라니. 주사라니. 그것도 4대나 맞아야 하다니. 이게 웬 수난인가?’
***
은우는 길동과 백수희와 함께 병원으로 가는 중이었다.
주사에 대한 두려움에 은우는 웃을 수가 없었다.
길동 역시 주사가 너무도 두려웠다.
‘하루에 주사를 네 대나 맞아야 한다니. 세상에. 아무리 생각해도 눈앞이 깜깜하다.’
차 안은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백수희는 은우가 평소와 다른 것을 눈치채고 은우에게 말을 걸었다.
“은우야, 젤리 먹을래?”
은우가 고개를 돌렸다.
‘하아, 주사 생각만 하면 너무 두렵다. 주사도 안 맞고 치과도 안 가면 너무 좋을 텐데.’
백수희는 은우가 젤리를 거절하는 것을 보고 꽤 심각한 긴장 상태에 있다고 생각했다.
‘어쩔 수 없다. 필살기가 필요하겠어.’
백수희가 립스틱을 꺼내면서 물었다.
“은우, 예뻐지기 놀이할까요?”
은우는 백수희의 립스틱에 큰 흥미를 느꼈다.
‘집에 여자 물건이 없어서 못 해 보던 건데. 재밌겠다.’
백수희가 거울을 주었다.
은우는 신이 나서 백수희의 립스틱을 가지고 자신의 입술에 긋기 시작했다.
‘오늘은 파드와의 얼굴로 화장을 해 볼까?’
은우는 자신의 입술보다 두껍게 립스틱을 칠했다.
‘볼터치도 필요한데.’
백수희가 파우치를 꺼내 은우에게 볼터치와 아이섀도를 건네주었다.
은우가 핑크색 볼터치를 열고 오른손에 볼터치를 칠한 다음 볼에 마구 문질러댔다.
술에 취한 것 같은 핑크색 볼이 완성되었다.
‘음, 예쁘네. 여자 아기라도 해도 믿겠어. 역시.’
은우는 자신의 외모에 감탄하며 아이섀도를 꺼냈다.
‘생각보다 색깔이 많네. 어떤 색으로 칠해야 하지?’
팔레트에는 검정, 회색, 진한 갈색, 갈색, 흰색, 황금색 펄이 들어 있었다.
은우는 곰곰이 파드와일 때 보았던 아프리카의 화장을 떠올렸다.
‘아프리카에서는 주로 흰색으로 화장을 많이 했는데. 그런데 지금 내 피부는 파드와일 때만큼 까맣지 않으니까. 우선 까만색을 먼저 칠해야지.’
은우는 검은색 섀도우를 엄지손가락에 듬뿍 찍어서 눈두덩이에 칠했다.
바라보던 백수희가 비명을 질렀다.
“헉, 은우야. 왜 네 얼굴을 망치려고 그래.”
“헤헤헤헤. 갠차나요.”
은우는 백수희 누나가 아프리카의 미를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계획대로 다시 흰색 섀도우를 찍어서 검은색 섀도우 위에 과감하게 칠했다.
백수희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은우야. 이건 무슨 저승사자 분장이야?”
“헤헤헤헤. 갠차나요.”
은우는 마지막으로 황금색 펄을 손바닥에 잔뜩 칠해서 얼굴 전체에 발랐다.
은우의 얼굴이 조명을 받은 듯 찬란하게 빛냈다.
백수희가 더 큰 비명을 질렀다.
“은우야. 왜 얼굴을 다 망치는 거야?”
“헤헤헤헤. 갠차나요.”
마침 신호가 바꿔 차가 횡단보도에 멈춰서자 길동이 더 이상 궁금함을 참을 수 없다는 듯 뒤를 돌아보았다.
길동은 은우의 얼굴을 보자 웃음이 터졌다.
“풉. 누가 봐도 저 화장은 은우가 한 거네.”
은우는 길동을 보자 창작 욕구에 불타올랐다.
“횬아도 해주까요?”
“아니. 형은 괜찮아.”
“그럼, 눈나는요?”
“눈나도 괜찮아. 은우야.”
은우는 다시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백수희는 은우의 기운 없는 말투가 걱정되었다.
‘보니까 그래도 볼터치는 괜찮은 거 같은데 볼터치만 해달라고 할까?’
백수희는 은우에 대한 걱정 때문에 결국 화장을 허락했다.
“그럼, 은우야. 볼터치만 부탁해.”
“네네네네네.”
은우가 활짝 웃으며 검은색 섀도우를 손가락에 잔뜩 묻혀 백수희의 볼에 칠했다.
“아악. 은우야. 그건 볼터치가 아닌데. 아깐 핑크색으로 칠하더니 왜 지금은 검은색으로 칠해.”
“헤헤헤헤. 아프리카띡 화장이에요.”
“아프리카식?”
백수희는 생각지도 못한 은우의 대답에 할 말이 없어졌다.
‘그래, 아프리카식이면 그럴 수도 있겠다. 근데 이러고 내려도 되나?’
길동이 차를 주차장에 대면서 말했다.
“다 왔다.”
은우가 길동을 보며 방긋 웃었다.
“횬아도 아프리카띡 화장할래요?”
“아니, 난 별로.”
“횬아, 이짜나요. 아프리카에선 화장을 하면 용걈해진댜고 생가캐요. 이따 주사갸 안 무서울 거예요.”
“진짜?”
길동은 은우의 말이 묘하게 자신의 마음을 흔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다 했다가 은우처럼 되면 곤란한데 창피해서 어떻게 나가.’
길동이 은우에게 대답했다.
“그럼. 눈만 좀 부탁해.”
“네네네네네.”
신이 난 은우는 검은색 섀도우를 잔뜩 묻혀서 길동의 눈두덩이에 칠해주었다. 그리고 다시 흰색 섀도우를 잔뜩 묻혀서 검은색 위에 칠했다.
“완셩. 횬아, 이제 안 무떠울 거예요.”
길동은 백미러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았다.
‘심각하네. 주사 맞자마자 바로 지워야지.’
그리하여 아프리카식 화장을 한 은우와 백수희, 길동은 함께 차에서 내려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예방접종 신청을 한 뒤 세 사람은 나란히 의자에 앉아 순서를 기다렸다.
사람들이 힐끗힐끗 세 사람을 쳐다보며 지나갔다.
간호사들도 세 사람을 보며 중얼거렸다.
“백수희 맞지? 아무리 봐도 백수희 같은데. 근데 볼터치가 왜 저래?”
“새로운 화장법 아냐? 유행인가 보지. 트렌드세터 백수희인데 그냥 했을 리는 없고.”
“저렇게 하면 볼살 빠져 보이겠는데.”
“네 눈엔 저게 새로운 화장법으로 보여? 난 그냥 애기가 장난친 거처럼 보이는데.”
“근데 백수희 옆에 있는 저 남잔 눈이 왜 저래? 어디 한 대 맞았나?”
“진짜 저 남잔 한 대 맞은 거 같네. 저러고 어떻게 돌아다니지?”
“백수희 옆에 저 아기 말야. 화장이 이상해서 못 알아봤는데 은우 같지 않아?”
“은우인가? 첨엔 웃기다고만 생각했는데.”
“은우 맞아. 동그란 두상이랑 볼록 튀어나온 이마. 은우라니까.”
“맞아. 은우야. 망친 화장도 너무 귀엽다.”
“우리 딸도 저 나이 때 저렇게 화장했었어. 립스틱이 입술 선 밖으로 삐뚤빼뚤. 너무 귀엽다. 깨물어 주고 싶어.”
길동은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신경 쓰여서 가방에 있던 고프로를 꺼냈다.
백수희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길동 씨 이거 영상으로 남길 거예요? 저 이거 흑역사라고요. 안 돼요. 안 돼.”
“영상을 찍는 척만 하려고요. 이 분장 너무 부끄럽네요. 은우가 용기를 줄 거라고 하긴 했는데.”
은우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눈나, 이뻐요. 횬아, 머쩌요. 오늘 우린 다 가치 아프리카!”
그 해맑은 웃음에 길동은 차마 화장을 지우고 싶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 이 한 몸 희생해서 은우 네가 기쁘다면야. 어차피 얼굴로 잘 생겼단 말을 듣긴 글렀고.’
길동이 고프로를 들고 말했다.
“그러니까 오늘 영상을 찍는 걸로 해요. 그러면 사람들이 좀 덜 쳐다보지 않을까요?”
길동의 말에 직업의식이 발동했는지 백수희가 고프로를 보며 방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백수희입니다. 저희는 지금 아프리카에 가기 전에 필수로 맞아야 할 예방접종을 위해 병원에 와 있습니다. 옆에는 은우가 나와 있네요. 은우, 지금 기분이 어때요?”
은우가 주먹을 불끈 쥐며 대답했다.
“아프리카!”
“아프리카는 무슨 뜻인가요? 오늘 은우가 한 화장과 관련이 있나요?”
“아프리카에서 용기를 주는 화장이 인는데. 그걸 해떠요. 이제 저는 무서운 게 엄뜹니댜.”
“아, 용감한 은우군요.”
그때 간호사가 주사 순서를 알렸다.
“백수희 씨, 주사 맞으러 오세요. 김길동, 이은우, 순서 기다리셔야 하니 함께 오세요.”
백수희는 용감하게 주사실로 들어갔다.
“저는 원래 주사를 안 무서워합니다. 여러분. 그래서 제가 첫 번째로 맞고 오겠습니다. 파이팅!”
백수희가 카메라를 보며 브이 표시를 그렸다.
간호사가 백수희의 팔을 때리며 말했다.
“오늘 신청하신 주사가 총 네 대 맞죠? 황열병, 장티푸스, A형 감염, 파상풍.”
“네, 맞아요.”
“이삼일 후 근육통이나 오한, 발열 등의 증세가 나타날 수 있으니 조심하셔야 해요. 혹시 너무 심하다 싶으시면 전화 주시고요.”
백수희는 왼쪽 팔에 주사 두 대를 맞고 오른쪽 팔에 주사 두 대를 맞았다.
갑자기 온몸이 찌릿하고 울리는 통증에 백수희가 물었다.
“방금 그 주사 뭐예요? 아프네요.”
“장티푸스 주사예요. 원래 좀 아픈 주사예요. 그래도 잘 참으시네요. 네 대나 맞는데.”
간호사가 백수희의 주사 자리를 알콜 솜으로 문질렀다.
퐁퐁이 스티커를 붙여주면서 간호사가 말했다.
“오늘이랑 내일은 샤워 안 하시는 게 좋아요. 수고하셨어요.”
백수희는 은우가 걱정이 되었다.
‘은우가 하루에 네 대를 다 맞을 수 있을까? 두 대만 맞고 다음에 맞는 게 좋지 않을까?’
백수희가 주사실에서 나오자 길동이 긴장된 표정으로 물었다.
“안 아파요?”
“장티푸스 주사가 좀 아픈데 그래도 참을 만은 했어요.”
은우가 걱정스런 눈으로 길동의 손을 꼭 잡았다.
“횬아. [소소소소소소소]”
“그게 뭐야? 은우야?”
“어린이지베서 지후가 알려져떠요. 외계인에게 소언을 비는 거예요. 횬아, 아프지 말라고 내가 기도해 주께요.”
“그래, 힘이 난다. 용기가 나는 화장도 했으니까 형은 괜찮을 거야.”
길동은 겁이 났지만 응원해주는 은우 앞에서 차마 무섭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은우가 엄지손가락에 침을 발라서 길동의 이마에 묻혀주었다.
“횬아, 이건 아프리카에서 하는 성인시기에요. 횬아는 어른이니까. 안 아플 거예요.”
백수희는 문득 은우가 왜 자꾸 아프리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지 궁금해졌다.
‘은우는 역시 준비성이 철저하구나. 아프리카에 간다고 이토록 많은 정보를 찾아보다니. 나보다 낫네. 난 아무것도 찾아본 게 없는데.’
주사실로 들어가는 길동의 손에서 땀이 축축하게 배어 나오고 있었다.
간호사가 길동의 팔을 두드리며 말했다.
“오늘 신청하신 주사가 총 네 대 맞죠?”
“네, 최대한 안 아프게 놔 주세요.”
“안 아프게 놔 드릴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우리 병원에서 주사를 가장 잘 놔요.”
“잠깐만요. 잠깐만요.”
간호사가 주사를 놓으려던 손을 멈췄다.
“심호흡 좀 하고요. 휴우.”
길동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생각보다 엄살이 심하시네요.”
“제가 다른 건 안 무서운데 주사랑 여자, 아기를 무서워해요. 아기는 은우 덕에 극복했고 여자는 극복 중인데 주사는 여전히 무섭네요.”
“주사가 그렇게 무서워요.”
간호사가 주사를 놓았다.
“악, 준비가 안 됐는데 갑자기 그렇게 놓는 게 어딨어요?”
“빨리 맞는 게 나을 거예요.”
간호사는 빠르게 두 번째 주사를 놓았다.
“아아악, 아아악.”
길동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간호사가 말했다.
“누가 보면 제가 때리는 줄 알겠어요. 이제 주사도 극복해야죠. 덩치가 아까워요.”
주사실 밖으로 길동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백수희가 은우의 귀를 막으며 말했다.
“길동이 횬아가 너무 재밌나 보다. 재밌어서 그러는 걸 거야.”
은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