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아프리카에 가다 (3)
창현은 백수희와 함께 강라온의 사무실에 와 있었다.
강라온의 사무실에는 길동이 도착해 있었다.
창현이 말했다.
“은우가 [세이브 더 월드]에서 주최하는 자원봉사단에 합류하게 될 것 같아요. 이태석 신부님께서도 함께 가주신다고 하셨고요.”
강라온은 불안증세를 보이는 은우가 아프리카에 가는 것이 옳은 결정인지 창현에게 되묻고 싶었다.
“정말 괜찮을까요? 아프리카는 멀고 또 환경도 우리나라에 비해 좋지 않을 텐데.”
창현은 그동안의 복잡한 마음을 모두 보여줄 수 없어 답답한 심정이었다.
“저도 걱정도 많이 하고 고민도 많이 했지만, 은우가 너무 완강해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조용히 있던 백수희가 입을 열었다.
“저도 가겠어요. 그 먼 곳에 은우 혼자 보낼 수는 없어요. 은우가 가야 한다면 저도 갈 거예요.”
은우 매니저를 하면서 은우 보호자로서 많은 역할을 했던 길동도 마음이 울컥했다.
“저도요. 은우가 아프고나서 제가 맘이 얼마나 안 좋았다고요. 월급 안 받아도 돼요. 은우랑 같이 갈 거예요.”
강라온은 고민하던 [블랙 레오파드 2]에 대한 이야기를 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쩌면 은우는 아프리카에 가야 할 운명인지도 모르겠네요.
이 대본이 들어왔는데 은우가 활동을 쉬어야 할 것 같아서 말을 못 했어요.”
길동은 강라온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블랙 레오파드 2] 대본을 보았다.
“와, 블랙 레오파드네. 이 영화 진짜 대단한데. 와따따 포에버.”
길동은 영화의 대본을 넘겨서 보았지만 전부 영어로 쓰여 있어서 제목 빼곤 이해하기가 어려워서 말없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백수희가 길동이 내려놓은 대본을 집으며 말했다.
“역시 우리 은우 클라스하곤. [블랙 레오파드 2]라니. 나도 할리우드 가고 싶다.”
백수희는 대본의 첫 장을 펼치며 물었다.
“당연히 은우가 주인공이겠죠?”
강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본의 첫 장에는 어린 은우가 아버지의 시체 앞에서 오열하는 장면이 있었다.
왕의 죽음에 온 나라가 슬퍼하였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 전, 은우는 왕위에 올라야만 했다.
다섯 살의 어린 왕.
왕위 즉위식 날, 은우를 째려보는 은우의 숙부는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저 왕위는 내 거야. 원래부터 내 것이어야 했는데 형이 빼앗아갔지. 그런데 이젠 저 어린 아기가 그걸 가져가다니. 다섯 살짜리 왕이라니. 주변 나라들에서 얼마나 우릴 우습게 보겠어. 이건 나라를 위해서도 백성들을 위해서도 옳지 않아.’
백수희가 대본을 덮으며 말했다.
“은우가 왕이네요. 긴장감 있는 스토리예요. 다음 내용이 너무 궁금해요.”
강라온이 동의한다는 듯 말했다.
“대본이 너무 좋아. 누구나 은우 역할을 맡고 싶어 할 거야.
[블랙 레오파드 1]의 주연이었던 듀크도 [블랙 레오파드 1]을 통해서 세계적인 배우가 됐으니까.
[블랙 레오파드 2]의 주연이 된다는 건 듀크처럼 될 수 있단 말이니까.
그리고 역할 자체가 다양한 매력을 보여줄 수 있도록 대본이 쓰여졌어.”
“근데 이거 은우가 안 한다고 한 거죠? 그럼 누구한테 갔을까요?”
“모르지. 오디션을 열어서 새로운 배우를 선발하고 있을 수도 있고. 아마 은우 말고도 물망에 올려놓은 배우들이 있지 않을까?”
백수희는 대본이 너무 아깝게 느껴졌다. 하지만 현재 상황이 은우가 다시 활동을 재개할 시점인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백수희가 창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깝다. 너무 아깝다. 대본 너무 아까워요. 은우가 [위대한 목소리]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타긴 했지만 [위대한 목소리]는 흥행성적이 높은 영화라고 볼 수는 없어서.
버블 사의 영화는 팬덤이 워낙 탄탄한 데다 시리즈물이라서 계속 나올 수도 있고 정말 좋을 텐데.”
창현은 부모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요즘 실감하고 있었다.
‘내 일이라면 후회해도 내가 하니 선택을 할 때 쉬울 텐데.
은우는 어려서 자신의 감정도 자신이 다 모르는 것 같아.
내 결정에 따라서 은우의 삶이 달라진다는 게 어려워.’
강라온은 [블랙 레오파드 2]의 대본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이건 이미 거절한 제안이긴 해요. 은우가 [세이브 더 월드]팀과 함께 아프리카로 떠날 때 저희 회사에서 따로 영상을 찍을 사람을 붙이겠습니다.
팬들에겐 자원봉사를 통해 마음의 안정을 취하고 있다고 기사를 내면 되겠네요.”
백수희가 강라온 대표를 막아서며 말했다.
“대표님. 그 대본 저 주세요. 제가 은우에게 보여주기라도 할게요. 은우에게 들어온 대본인데 은우가 한 번은 봐야죠.
은우가 [블랙 레오파드] 감독님이 자길 출연시켜 주겠다고 했다면서 저한테 자랑했었단 말이에요.
감독님이 약속을 지켰다는 걸 보여줘야죠.
찍지 못하더라도 그 사실은 알아야죠. 은우가.”
강라온은 창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괜찮을까요?”
창현이 대답했다.
“은우의 일이니까 은우가 아는 건 나쁘지 않겠죠.”
백수희가 [블랙 레오파드 2]의 대본을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
은우는 캐리어를 펼치고 자신의 방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고.’
은우는 캐리어에 공룡 변신 로봇을 담았다. 그리고 기차놀이 세트도 넣었다.
‘트램펄린도 넣고 싶은데 안 들어가겠지?’
은우는 어린이집에 있는 트램펄린도 가져가고 싶었지만, 아무리 봐도 트램펄린보다 더 큰 캐리어는 없을 것 같았다.
‘신의 재능 중에는 공간이동 같은 건 없나. 그런 게 있으면 삶이 정말 편할 텐데.’
은우는 얼마 전에 본 [마법학교] 영화의 주인공이 너무도 부러웠다.
‘투명망토에 공간이동도 하고 하늘도 날고. 요즘은 판타지 영화의 주인공이 신들의 재능보다 더 대단한 것 같기도 해.’
은우는 캐리어 하나를 다 채우고 다른 캐리어를 가져왔다.
“아기용 캐리어라서 금방 차떠.”
보리가 은우의 캐리어를 보더니 말했다.
“멍멍(너 이사 가니? 장난감을 왜 다 캐리어에 넣고 그래? 이러다 캐리어 100개도 모자라겠다.)”
“케미기샤에게 주려고. 케미기샤도 가지고 시플 거야. 아프리카엔 장난가미 별로 엄떠.”
“멍멍(아프리카 가려면 아직 시간 많이 남은 거 아냐? 비자도 나와야 하고.)”
“내 마으믄 벌떠 아프리카에 이떠.”
“멍멍(네 맘은 알지만 이래서는 아프리카에 못 가. 가다가 깔려 죽겠다. 한 번 경유를 해야 하고 18시간이나 걸린다는데 수화물 당 가격도 꽤 나올걸.)”
“도는 문제대지 아나. 또 벌 뚜 이떠.”
“멍멍(그래, 나도 네가 돈을 많이 벌 수 있단 사실을 의심하진 않아. 하지만 넌 다섯 살이잖아. 부모의 동의 없이 돈을 쓸 수 있겠어?)”
“그건 그러치.”
은우는 풀이 죽었다. 은우로 태어난 이후 아기여서 슬펐던 적은 별로 없었다. 아기여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고, 아기였기 때문에 더 많은 기회가 찾아왔다.
하지만 케미기샤를 광고 속에서 본 뒤로는 아기인 자신이 너무도 초라하게 느껴졌다.
‘아기는 다른 사람의 보호자가 될 수 없나 봐. 나는 케미기샤의 보호자가 되어야 하는데.’
보리는 은우가 너무 기운이 없어 보여서 걱정이 됐다.
“멍멍(그래도 곧 가게 될 테니 걱정하지 마. 이태석 신부님도 가신다고 하니까 잘될 거야. 근데 케미기샤는 이제 10살이라면서 네가 좋아하는 장난감을 좋아할까? 그리고 장난감보단 과자를 더 좋아할 거 같은데. 나라면 말이지.)”
“징짜?”
은우는 보리의 말이 꽤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 과쟈를 챙길까?”
“멍멍(그게 부피도 줄고 좋지 않을까? 그리고 장난감보단 크레파스나 공책, 연필. 이런 걸 더 좋아할 수도 있어. 물론 그런 건 아프리카에도 있을 거 같긴 하지만.)”
은우는 케미기샤이던 때를 돌아보았다.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보는 게 내 꿈이었지.’
많진 않았지만, 부모님이 계신 친구들은 학교에 가곤 했다.
포장이 되지 않아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길을 두세 시간씩 걸어가야 나오는 학교였지만 파드와는 학교에 가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다.
‘어쩌면 케미기샤도 학교에 가는 친구들을 부러워하고 있을지도 몰라. 보리 말대로 공책과 연필, 스케치북을 가져가야겠어.’
은우는 캐리어 속에 있는 장난감을 꺼냈다.
보리가 창현과 백수희, 길동이 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눈치채고 은우의 방 밖으로 나갔다.
“멍멍(은우야, 백수희 누나랑 길동이 형아도 왔다. 나갈 땐 아빠 혼자 나가더니 사람이 늘었네.)”
보리는 꼬리를 치며 사람들을 맞이하러 나갔다.
은우도 보리를 따라 현관으로 나갔다.
영탁이 사람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은우는 오랜만에 본 백수희와 길동이 너무나도 반가웠다.
은우는 길동의 다리에 매달린 채로 백수희의 손을 잡았다.
백수희가 은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우리 월드 스타님. 잘 지내떠요?”
길동이 은우을 꽉 껴안았다.
“보고 싶었어. 은우야. 매일 보다가 못 보니까 너무 보고 싶더라.”
“나두요. 횬아. 숨 마켜요.”
길동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은우의 말랑말랑한 작은 손과 캐러멜 같은 과자 냄새가 너무나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우리 은우가 가는 곳이라면 지구 끝까지라도 따라가야지.’
길동이 은우를 내려놓았다.
모두가 테이블에 둘러앉고 영탁이 음료수를 내왔다.
은우가 아기용 음료수 [삐요]를 먹으며 말했다.
“아빠, 냐도 용돈 주떼요.”
창현은 예상치 못했던 은우의 말에 놀랐다.
“용돈 어디다 쓰려고?”
“비미리예요. 혜린이 눈나는 용도늘 바떤데. 학습지 다 하면 오백 언 바꼬 장난감 정리해도 오백 언 받는대요.”
백수희가 은우의 말을 듣고 웃었다.
“귀엽다. 오백 원. 은우는 아마 은우 몸값이 얼만지 모르는 거죠? 오백 원이라니. 눈나랑 같이 [내일도 사랑해] 찍을 때만 해도 은우는 돈을 꽤 벌었는데.”
길동이 백수희의 말에 호기심을 느꼈는지 물었다.
“그땐 은우 소속사도 없고 매니저도 없을 때죠? 정말 얼마나 받았어요.”
창현이 기억을 더듬어 대답했다.
“그땐 내가 은우와 함께 다녔는데 그때만 해도 회당 천만 원은 받았으니까요.”
길동은 생각보다 높은 몸값에 놀랐다.
“아역 배우들도 몸값이 생각보다 높네요. 은우야 부럽다. 내 연봉 너는 드라마 3화만 찍어도 버는구나.”
창현이 말을 이었다.
“은우가 번 돈은 쓰지 않고 꼬박꼬박 은우 이름으로 통장에 넣어두고 있어요. 나중에 은우가 대학에 가거나 하고 싶은 걸 배우거나 할 때 쓰려고요.”
은우는 자신이 번 돈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회당 천만 원이었다니. 그 후로 [위대한 목소리]도 찍고 [겨울나라2] OST도 불렀고 이번엔 [본 투비 큐트] 미니 음반도 냈으니까. 내가 꽤 많은 돈을 벌었구나. 아직 파리넬리일 때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케미기샤를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백수희가 가방에서 [블랙 레오파드 2] 대본을 꺼내며 말했다.
“은우야, 좋은 소식이 하나 있고 나쁜 소식이 하나 있어. 뭐부터 들을래?”
“조은 소식.”
“[블랙 레오파드 2]의 감독님이 너에게 [블랙 레오파드 2]의 주연을 해달라고 하셨어.”
“우와.”
은우는 아카데미 시상식 프리파티에서 보았던 채드윅을 떠올렸다.
‘약속을 지켰군요. 채드윅 감독님. 저도 [블랙 레오파드 2]에 출연하고 싶어요. 듀크를 기리기 위해서요.’
은우는 화면 속에서 보았던 듀크의 빛나는 눈빛을 잊지 못했다.
그가 외치던 [와따따 포에버]를 들었을 때 느꼈던 심장의 두근거림을 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은우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건 [블랙 레오파드]가 흑인 영웅이라는 점이었다.
‘파리넬리일 때는 유럽계 백인의 삶, 파드와일 때는 아프리카계 흑인으로서의 삶, 이번 생은 동양인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지만, 아프리카계 흑인의 삶이 가장 열악해.’
은우는 아프리카의 흑인들에게 많은 연민을 느꼈다.
[블랙 레오파드]는 판타지라는 설정을 통해 아프리카 최빈국이던 가상의 나라 [가바]를 가장 강대한 나라로 바꿔놓았다. 그곳에서 흑인들은 가난하지도 않았고, 멸시받지 않았다.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며 동물들과 함께 평화로운 삶을 살았다.
‘현실의 아프리카가 저런 모습이면 좋을 텐데.’
[블랙 레오파드]는 은우에게 있어선 유토피아 같은 영화였다.
‘내가 저 영화의 주인공이 된다면.’
은우는 [블랙 레오파드]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인 듀크가 너무나도 부러웠다.
은우가 외쳤다.
“할 거예요. 저 [블랙 레오파드 2]에 추련할 거예요. 채드위게게 전화해 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