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살부터 재능흡수-164화 (164/257)

164화. 아프리카로 가다 (1)

채드윅은 [블랙 레오파드 2]의 완성된 대본을 들고 들떠 있었다.

‘이제 배우들을 섭외하고 영화제작을 시작해야겠어. 이 영화의 주연은 당연히 은우지.’

채드윅은 가장 먼저 은우의 소속사인 HO 엔터테인먼트에 전화를 했다.

“Hi. I am a ~”

유창한 영어에 놀란 태현은 채드윅의 전화를 강라온에게로 연결시켰다.

강라온이 채드윅의 전화를 받았다.

“반가워요. 채드윅.”

“반가워요. 라온. [블랙 레오파드 2]의 주인공으로 은우를 캐스팅하고 싶어요. 촬영은 한 달 이내에 시작될 거예요.”

강라온은 [블랙 레오파드 2]라는 제목을 듣자마자 전작 [블랙 레오파드 1]의 명성이 떠올랐다. [블랙 레오파드 1]은 마벨의 히어로 영화 중 역대 박스오피스 수입 3위를 거머쥔 대흥행작이었다.

백인들만 가득한 히어로 세상에서 유일한 흑인 히어로로서 입지를 다진 [블랙 레오파드].

유학생 시절과 캣걸스의 미국 진출 때 동양인에 대한 뿌리 깊은 인종차별과 마주했던 강라온 역시 영화를 보면서 [블랙 레오파드]를 응원했었다.

‘[블랙 레오파드 2]라니 출연하기만 한다면 [위대한 목소리]에 이어 할리우드에 은우의 입지를 다져줄 좋은 작품이 될 텐데. 하필이면 은우가 불안증세를 호소하는 지금이라니.’

강라온은 자신이 대신해서라도 출연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정말 좋은 제안이네요. 저도 [블랙 레오파드]의 팬이었어요. 은우가 출연만 한다면 정말 좋을 텐데. 은우가 갑자기 불안증세가 나타나서요. 그래서 국내 활동을 모두 접었어요.”

“어디 아픈가요?”

채드윅은 지난번 아카데미 시상식 프리파티에서 만났던 은우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마카롱도 잘 먹고 건강해 보였는데.

하지만 심리적인 문제라면 할리우드의 많은 배우들이 겪고 있는 문제긴 하지. 그건 밖으로 잘 드러나는 게 아니니까.’

채드윅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출연료나 다른 문제라면 강하게 어필해 보겠지만. 아프다고 하니까. 뭐라고 해야 할지. 하지만 은우가 아닌 다른 배우를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강라온이 말을 이었다.

“은우의 꿈은 가수였어요. 국내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고 이제 해외 무대로 나가보려던 참인데 스케줄이 너무 힘들었던 건지.

다섯 살이다 보니 은우의 컨디션을 맞추는 게 회사 차원에서도 쉽지 않아요.”

“그렇군요. 빨리 나아야 할 텐데. 전에 [위대한 목소리] 촬영은 잘해서 우리 영화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빨리 낫도록 해볼게요. 혹시 [블랙 레오파드 3]가 나온다면 3에라도 출연하면 좋을 텐데.”

“3를 만들게 된다면 은우를 가장 먼저 출연진에 올려놓도록 할게요. 은우가 제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거예요. 지난번 프리파티 때 보았을 때 [블랙 레오파드]의 팬이라고 했었거든요. 제가 전화를 했다는 걸 전해 주세요. 그리고 건강 하라고 안부 인사도 꼭 전해 주시고요.”

“네, 정말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채드윅은 멍한 상태가 되었다.

‘이상하게 은우를 처음 보았을 때 그 맑은 두 눈 속에서 울고 있는 한 흑인 아기가 보였어. 듀크도 은우를 보며 같은 말을 했었는데.’

채드윅은 듀크와 함께 [위대한 목소리]를 보았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 듀크는 이미 대장암을 앓고 있었다.

나날이 수척해지는 듀크를 보며 채드윅은 걱정했다.

“걱정하지 마. 채드윅. 난 잠시 다이어트 중인 거라고. 연기 변신에 얼마나 좋겠어.”

“농담은. 넌 항상 농담을 잘해.”

“유머는 신이 주신 선물이니까. 난 그렇게 생각해. 운명은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야. 내가 죽을 운명이면 아무리 노력해도 죽을 거고 내가 살 운명이면 노력하지 않아도 살 거야.”

“그렇지만 듀크. 널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해 봐. 네 아이들과 부인. 그들이 네가 떠나면 얼마나 슬퍼하겠어. 그리고 네 팬들도. 그리고 너의 친구들. 나도 말이야.”

“우린 누구나 다 이 세상에 소풍을 온 거야. 언젠가는 떠나야만 하니까.”

“그래. 나도 그걸 알고 있어. 하지만 치료도 열심히 하면 좋잖아. 아프면서 영화 촬영도 계속하고 모든 일정을 평소처럼 소화하는 거 너무 무리 같아.”

“난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하고 싶어. 아프다고 그것들을 하지 않는 거. 마치 핑계 같아.”

채드윅은 듀크를 걱정스런 눈길로 쳐다보았다.

‘가끔은 듀크 네가 영화 속의 히어로보다 더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곤 해. 죽음의 공포를 이겨낸 거 같은 네 표정은 지구를 구하는 히어로보다 더 현실성이 있으니까.’

채드윅은 분위기도 바꿀 겸 [위대한 목소리]를 틀었다.

“음악 영화인데 감독들 사이에서 잘 만들었다고 평이 자자한 영화야.”

“음악 영화 좋지.”

영화가 시작되고 듀크는 눈을 감았다.

채드윅은 듀크의 컨디션이 걱정되었다.

“왜 그래? 듀크. 어디 아파? 쉬어야 하는 거 아니야? 집에 데려다줄까?”

“아니야. 난 요새 눈을 감고 영화를 감상하고 있어. 그러면 보이지 않던 게 들린다고 할까. 그거 알아? 우린 참 많은 걸 못 보고 산다는 거. 기억나? 첨에 만났던 아이스크림 집.”

“응, 기억나지.”

채드윅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어떻게 그걸 잊어버리겠어. 그날 널 만나지 못했으면 내 삶도 지금과는 달랐을 거야. 널 만나서 내 인생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듀크의 말이 이어졌다.

“그날도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보기] 놀이 중이었어. 만약 눈을 감고 우리의 피부색이 안 보인다면 말야. 사람들이 우릴 흑인이라고 그렇게 괴롭힐까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

기억나? 우리 어릴 때만 해도 흑인은 버스를 탈 때 정해진 자리에만 탈 수 있었던 거.”

“그럼, 기억하지. 그걸 어떻게 잊어버려. 우린 앞자리에 탈 수가 없었지. 늘 뒷자리에 타야 했지. 그래서 퇴근 시간이 되면 앞자리가 텅텅 비어 있어도 뒤에 서서 오곤 했잖아.”

“그래, 그런 순간마다 난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보기] 놀이를 했어. 처음엔 눈을 감고 있으면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었거든. 그 놀이를 시작했을 때 난 사실 답을 정해놓고 있었어. 흑인과 백인은 다르지 않다고.

누구나 다 평등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난 그 놀이를 시작했던 거 같아.

그런데 그 놀이를 한참 하다 보니까 결론은 내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나왔어.”

“흑인과 백인이 달라? 눈을 감고 들어도 말야.”

“응, 달랐어. 쓰는 영어나 액센트가 달라서 구분할 수 있었어. 그것 말고 행동이나 연기를 하는 방식 같은 것도 달랐어.”

“정말?”

채드윅은 듀크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난 늘 백인과 흑인은 평등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어. 그건 듀크도 마찬가지였는데. 듀크가 저런 말을 하다니.’

듀크가 말을 이었다.

“진정해. 채드윅. 내 말은 다르단 거야. 구분할 수 있다는 거지. 흑인이 백인보다 우월하다거나 백인이 흑인보다 우월하다거나 그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야.

미국이란 나라 안에서 백인과 흑인이 함께 살고 있지만, 피부색만 다른 게 아니라 다른 것도 다르다고. 그걸 눈을 감아도 내가 느낄 수 있었단 말을 하려는 거야.”

채드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백인이 흑인보다 우월하다면 영화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려던 우리의 꿈은 의미가 없어지는 거니까.’

듀크가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내가 화면 속의 배우가 백인인지 흑인인지 맞춰볼게. 니가 맞는지 알려줘. 재밌겠지?”

“그래, 네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검증 좀 해보자.”

채드윅은 듀크의 이런 밝음이 좋았다.

대장암 4기. 날로 수척해지는 몸속에서도 듀크의 정신만은 홀로 빛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화면 속에서는 은우가 술집에서 가위, 바위, 보를 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듀크가 입을 열었다.

“이 영화 온통 백인들만 나오네. 근데 고증은 조금 실패한 느낌이야. 이탈리아가 배경인 모양인데. 저 영화 속엔 이탈리아인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자란 백인들이 더 많은 거 같은데.”

“어쩔 수 없지. 제작사도 할리우드 제작사고 감독도 할리우드 출신이라 할리우드 배우를 더 찾기가 쉽지 않았을까?”

“그건 그랬겠지. 하지만 나였다면 시간이 걸려도 제대로 된 고증을 했을 거야.”

채드윅은 고개를 끄덕였다.

[블랙 레오파드 1]을 찍을 때도 아프리카의 왕이 미국식 영어를 쓸 수 없다면 아프리카식 영어를 배우기 위해 6개월 이상을 노력했던 듀크였다.

‘그때 난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고 생각했지만, 결론은 듀크가 옳았지. 아프리카식 영어가 여러 유행어를 만들어 내면서 관객들에게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했으니까.’

[블랙 레오파드 1]의 전설적인 유행어. [아베베]와 [이즈칸 포에버]는 아프리카식 영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

듀크가 눈을 감고 말을 이었다.

“영화 속에 흑인이 한 명 있지. 저 아기 말야. 주인공 아기. 지금 노래 부르는? 저 아기가 흑인이네. 수많은 백인들 중에서 유일한 흑인이야.”

“아니야. 저 아기는 백인인데. 주인공 파리넬리의 아역을 맡은 아기인 모양인데. 백인이야.”

은우에 대해 모르던 채드윅은 은우의 외모만을 보고 그렇게 판단했다.

‘듀크가 틀릴 때도 있다니. 하긴 눈을 감고 맞추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

듀크가 말했다.

“아니야. 다시 확인해 봐. 저 아기 흑인이 맞아. 억양에서 아프리카식 영어가 느껴져.”

채드윅은 결국 영화 제목을 검색해서 아역배우의 이름을 찾아냈다.

“이은우. 5살. 한국 배우야. 연기 이력은 없고. 이게 첫 작품이야.”

“동양인이라고?”

놀란 듀크가 눈을 떴다.

듀크는 화면 속에서 뽀얀 피부를 빛내며 노래하고 있는 은우를 보았다.

“내 예상이 틀리다니. 이런 적이 없었는데. 동양의 아기가 어쩜 저렇게 아프리카 사람 같지. 저 아긴 아프리카 아기 같았어. 미국에서 자란 흑인도 아니고 아프리카에서 자란 흑인이었다고. 영어뿐만 아니라 행동이나 모든 게.”

채드윅은 듀크가 피곤해서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듀크. 이만 자는 게 어때? 영화는 다음에 봐도 되잖아.”

“채드윅 부탁이 있어. 만약에 [블랙 레오파드 2]를 찍게 되면 그 영화에 저 아기를 출연시켜 줄 수 있어?”

채드윅은 생각했다.

‘동양인이라곤 하지만 흑인이 아닌데 흑인으로 나오려면 분장이나 CG 작업을 많이 해야 할 텐데. 저 아기가 그 정도의 가치가 있을까?

그냥 흑인 배우를 쓰는 게 더 나을 거 같은데.’

듀크가 말을 이었다.

“저 아기, 대단한 배우가 될 거야. 온 세상의 주목을 받는. 저 아기를 [블랙 레오파드 2]에 출연시켜줘. 우리 영화도 저 아기 덕분에 더 유명해지게 될 테니까.”

“그래, 알았어. 네 안목을 믿어. 항상 네 판단은 옳았으니까. 그러니까 이제 그만 쉬자.”

채드윅은 듀크를 집에 데려다주기 위해 차 키를 챙겼다.

***

[세이브 더 월드]의 팀장 이선화는 은우의 집을 방문했다.

“안녕하떼요.”

은우가 밝게 인사했다.

보리가 은우의 옆에서 꼬리를 쳤다.

“멍멍(이 사람이 [세이브 더 월드]에서 나온 사람이야. 반가워요. 우리 은우 잘 부탁해요. 요새 은우가 동생 걱정에 잠도 잘 못 자요. 케미기샤가 전화기만 가지고 있었으면 내가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전화기가 없다니.)”

이선화가 은우를 보며 미소 지었다.

“네가 은우구나. 만나서 반가워. 은우야. 보게 돼서 영광이야.”

창현이 이선화를 맞이했다.

“여기가 은우 방이에요. 차 한 잔 드릴까요?”

“은우 아버님이시구나. 만나서 반가워요. 커피요.”

창현이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커피를 내리며 생각했다.

‘은우가 지난번엔 아프리카 난민이 나온 광고를 보고 한 시간 넘게 울더니. 이번엔 후원을 신청했네. 그 광고가 은우에게 정말 큰 영향을 준 걸까?’

정말 이 모든 변화가 광고 한 편으로 시작된 것이라면 은우에 대한 모든 걱정을 접어둘 수 있을 것 같았다.

‘요즘 은우 걱정에 잠도 잘 안 와. 잘 자라고 행복하다고 믿었던 은우가 속으론 그렇게 힘들어했을 걸 생각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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