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보물 같은 친구 (3)
은우가 간식을 들고 뛰어갔다.
“보이, 보이. 일루아.”
보리는 생각했다.
‘은우 걸음이 너무 느려. 은우가 혼자 달려도 결승선에 가면 3분 50초가 넘을 거 같은데. 이기려면 은우 없이 혼자 달려야 하는 걸까?
난 개가 아니라서 간식 따위 없어도 이길 수 있는데.’
보리는 빠르게 허들을 넘었다.
“허들을 넘는 속도가 매우 빠릅니다.”
“짧은 다리의 역습. 제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개는 역시 똥개 아니 시골 잡종이 최고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보리 선수. 빠른 속도로 허들을 통과하고 터널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주인보다 빠른데요. 은우가 간식을 들고 뒤에서 따라가고 있습니다.”
“간식 없이 하는 어질리티. 오 최촌데요?”
“주인이 느리니 혼자서라도 우승을 하려고 하는 걸까요?”
“우승에 대한 강한 집념. 이보리 선수. 과연 공무원 강아지, 족보 있는 강아지 레오를 꺾고 우승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우승을 하면 정말 이건 인간 승리. 아니, 시골 잡종의 승리입니다. 키 차이만 해도 80센티가 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승을 한다면 정말 기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허들 통과 기록, 29초. 레오보다 1초 빠릅니다.”
“정말 박빙의 승부가 아닐 수 없습니다. 1초를 다투는 빅승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빅승부.”
“말씀드리는 순간. 보리가 터널로 진입했습니다.”
“마치 사람 같습니다. 터널의 시작과 끝을 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머리를 숙이고 드는데요.”
“저것은 사람인가? 개인가?”
“정말 의심스럽습니다. 터널 통과 기록 역시 레오보다도 빠릅니다. 1분 20초.”
“레오는 1분 25초였죠. 점점 기록을 벌리고 있는 보리 선수.”
“전 오늘 [스타 강아지 체육대회]에 나와서 정말 많은 걸 얻어가네요. 코가 낮아도 잘생길 수 있다. 그리고 다리가 짧아도 잘 달릴 수 있다. 정말 대단한 삶의 교훈입니다.”
“그럼요. 개들이 때론 인간보다 나으니까요.”
“근데 이 상황에 그 교훈이 맞나요?”
“말씀드리는 순간 이보리 선수, A 프레임에 접근했습니다.”
“A 프레임 최고의 난코스죠. 내리막길을 오르고 내려야 하는 코스니까요.”
“그렇죠. 체력과 머리 두 가지가 다 갖춰져야 성공할 수 있는 코스입니다. 오늘의 어질리티 중 가장 어려운 장애물이라 할 수 있죠.”
“어, 어. 그런데 은우가 넘어졌습니다.”
“보리가 너무 빠르게 가서 보리를 따라가려다 넘어졌나 봅니다.”
“선수가 아니라 주인이 넘어지다니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까?”
“다섯 살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죠.”
보리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은우가 넘어졌다고?’
A 프레임의 정상에 선 보리가 뒤를 돌아보았다. 은우가 터널 근처에서 넘어져 있었다.
“멍멍(은우야! 많이 다쳤어?)”
보리가 몸을 돌려 터널 쪽으로 내려갔다.
“이게 웬일입니까? 보리가 갑자기 방향을 바꿨습니다.”
“내려가면 우승은 멀어집니다. 보리 선수.”
“보리가 은우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감동적인 장면이에요.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강아지와 아기의 우정. 정말 귀엽고 짠하고 뭉클하고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보리가 우승을 버리고 은우를 택했습니다.”
보리는 터널 근처로 갔다. 넘어져 있는 은우의 볼을 보리가 핥았다.
“멍멍(은우야 괜찮아? 많이 다쳤어? 아파?)”
“헤헤. 가안지러.”
“멍멍(다행이다. 계속 넘어져 있어서 걱정했잖아.)”
“창피해서 그래쪄.”
“멍멍(괜찮아. 내가 있잖아.)”
“거마어.”
은우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은우가 일어났습니다. 현재 시간은 3분 50초. 이미 레오의 기록 시간은 넘어섰습니다.”
“다시 지금부터 뛴다고 해도 5분은 넘을 거 같은데요.”
보리가 은우에게 말했다.
“멍멍(미안해. 내가 이기겠다는 욕심에 너만 두고 먼저 달려가서. 이제 함께 가자.)”
“내갸 더 미아내. 우승도 모타고.”
“멍멍(괜찮아. 체육대회 우승이 뭐라고. 그건 다음에도 할 수 있고. 네가 더 중요하지).”
보리와 은우는 발을 맞추어 천천히 A 프레임으로 갔다.
“보리가 다시 경기를 시작합니다.”
“이번엔 은우도 함께네요.”
“우승은 물 건너갔지만 기권하지 않고 끝까지 함께하는 저 모습 정말 아름답습니다.”
“저런 게 진정한 우정이죠.”
은우와 보리가 발을 디딜 때마다 사람들의 응원이 이어졌다.
“힘을 내. 힘을 내.”
“내 맘속의 우승은 은우랑 보리야.”
“오늘의 최고의 장면이야.”
“파이팅.”
은우와 보리는 사람들의 응원을 받으며 A 프레임을 마쳤다.
“은우와 보리가 방금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최종 기록은 8분 30초.”
“우승은 레오입니다.”
“그렇지만 전 오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정을 봤습니다. 친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달려가는 우정.”
“한 편의 드라마였죠.”
“체육대회가 드라마보다 뭉클하기 있기 없기?”
“은우랑 보리를 보니 너무 뭉클해서 저도 강아지를 기르고 싶습니다.”
“저런 우정. 사람과는 힘들겠죠?”
“초등학교 때였으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보리는 은우의 볼을 핥으며 말했다.
“멍멍(네가 제일 소중해. 은우야.)”
“냐듀.”
***
영화 [빛]의 제작사인 슈가박스에서는 [빛]의 홍보를 두고 회의가 진행 중이었다.
마케팅 팀장인 안나가 말했다.
“포스터부터 골라볼까요?”
팀원인 레너드가 말했다.
“어젯밤 영화와 관련된 모든 영상을 봤어요. 전 니콜라스가 재기에 성공했던 콘서트 장면을 넣으면 어떨까 해요. 니콜라스가 무대에 올라설 때 그 감정의 교차가 정말 좋았어요. 재기를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불안함. 하지만 자신이 그리워했던 무대와 팬들에 대한 사랑.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연주를 끝냈을 때. 니콜라스의 얼굴에 떠오르던 안도감과 환희.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에서 떨어질 때 그때 저도 모르게 박수가 나왔습니다.”
듣고 있던 애니가 반대의 의견을 말했다.
“그 장면은 저도 좋았어요. 감동적이기도 했구요. 하지만 피아노와 주인공이 클로즈업된 포스터는 피아노 영화에서 너무 흔한 패턴이 돼 버려서 관객들에게 임팩트를 줄 수 없을 것 같아요. [건반과 건반 사이], [음악의 숲], [나의 피아노]가 비슷한 포스터를 쓰고 있어서요.”
바네사가 동의했다.
“저도 애니의 의견에 동의해요. 영화상 그 장면이 감동적이긴 한데. 포스터는 영화의 얼굴이니까요. 보기도 전에 관객들에게 다른 영화와 비슷하단 느낌을 주는 건 안 좋을 것 같아요.”
팀장인 안나가 말했다.
“그럼 애니나 바네사는 다른 의견이 있나요?”
바네사가 말했다.
“전 니콜라스가 이어폰을 끼고 담배를 피우다가 음악에 취한 듯 춤을 추는 장면이 좋았어요. 제자리에서 뛰는 그 장면이요.”
레아가 동의했다.
“저도 그 장면이 좋았어요. 니콜라스가 자신의 시선으로부터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진 것 같았어요. 니콜라스는 예민한 신경 탓에 잠도 자지 못했잖아요. 누워서도 사방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고 했었는데.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해진 것 같아서.”
애니가 말을 이었다.
“그 장면에서 전 행복을 느꼈어요. 어렸을 때부터 천재라는 평판을 달고 살았던 니콜라스지만 과연 행복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영화를 보면서 내내 니콜라스가 얼마나 외로웠을지. 그 외로움에 가슴이 먹먹했어요. 자신의 아들이 천재로 살아가길 바라는 아버지, 돈 외엔 관심도 없던 어머니. 그 속에서 니콜라스는 이해받지 못했으니까요.
정신질환과 긴 방황 끝에서 다시 음악에 대한 사랑을 깨닫는 그 장면이 정말 좋았어요.”
안나가 말했다.
“또 다른 의견이 없으면 그럼 포스터는 지금 말한 장면으로 하죠? 어때요. 다들.”
레너드가 대답했다.
“팀원들 말을 듣고 보니 제가 추천한 장면보단 바네사가 추천한 장면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 장면은 아직 다른 피아노 영화에서 포스터로 활용한 적이 없으니까요.”
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다음 안건인데 마케팅 방식으로 어떤 걸 쓸 것이냐. 하는 거예요. 어떤 방식을 써야 [빛]을 더 많이 알릴 수 있을까요?”
레너드가 말했다.
“요즘 VR이 유행이라던데. VR은 어떨까요?”
레아가 대답했다.
“재밌을 것 같긴 한데. 제작비용이 만만치 않을 거 같아요. 그리고 우리 영화가 음악 영화다 보니 그런 건 오히려 재난 영화나 액션 영화에서 더 좋은 효과가 생기지 않을까요?”
바네사가 동의했다.
“우리 영화의 주된 관객층이 선호할 방법 같진 않아요. 음악 영화다 보니 기존에 음악 영화의 주 소비층이 영화를 보러 오지 않을까요? 그 관객층에 맞춘 마케팅 방법을 고민해야 할 것 같아요.”
안나가 말했다.
“기존 영화의 주 소비층은 마케팅에 동요하지 않죠. 결국 얼마나 잘 만들었느냐에 문제인데.”
다른 팀원들도 안나의 의견에 동의했다.
“입소문만으로도 흥행한 영화들도 있었죠. [피아니스트]처럼요.”
“독립 영화 중에서도 흥행한 영화도 있었고요. [죽은 피아노의 연주]처럼요.”
“[빛]도 잘 만들어진 영화이니 마케팅 안 해도 되겠는데요.”
안나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마케팅을 안 해도 성공할 영화라고 생각은 해요. 스캇의 연기도 좋았고. 스캇이 중학교 때 그만둔 피아노를 이 영화를 위해 1년 동안 배웠다고 하더라구요.”
바네사가 말했다.
“스캇은 정말 대답한 배우 같아요. 스캇이 담배를 피우다가 춤추는 그 장면도 58번째 성공한 장면이라고 하더라구요.”
레아가 말을 이었다.
“프랭크 감독님이 완벽주의자로 유명하니까요. 스캇 정말 힘들었겠어요.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찍다니.”
바네사가 말했다.
“그 장면 처음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들으며 찍다가 잘 안 돼서 마지막에 성공한 장면은 스캇이 좋아하는 노래를 들었다고 하더라구요. 그 노래 너투브에서 유명하던데. [따따따]인가?”
애니도 아는 척을 했다.
“[따따따], 저도 좋아해요. 요새 우리 아들이 집에서 그 노래를 틀어놓고 얼마나 뛰어다니는지 옆집 사람에게 미안해 죽겠어요.”
레너드가 [따따따]의 안무를 따라 했다.
[따따따 따 따따따따 따따따따]
안나가 레너드에게 물었다.
“레너드도 그 노래를 알아요?”
“요새 너투브에서 유명한 노래예요. 신나고 춤추기에도 좋고요. 주말에 파티에서도 계속 그 노래를 틀어놓고 춤췄어요.”
레아가 말했다.
“[따따따] 패러디 영상이 유행 중이어서요. 진짜 재밌어요. 우리도 하나 찍어서 올려볼까요?”
바네사가 말했다.
“좋은 생각이 났어요. 영화에선 니콜라스가 춤추는 장면 위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이 나왔잖아요. 하지만 실제로 스캇이 들었던 노래는 [따따따]고.
다른 버전을 하나 더 만들어서 너투브에 올려보면 어떨까요?
배경 음악을 원래 스캇이 들었던 [따따따]로 하는 거예요.
그럼 자연스럽게 영화 홍보도 되고 또 촬영 당시의 느낌을 더 잘 살릴 수도 있어서 좋지 않을까요?”
레아가 동의했다.
“좋은 생각 같아요. 신선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따따따] 패러디 영상은 아기도 좋아하고 할아버지도 좋아하니까요. 모두가 즐길 수 있을 거예요.”
안나가 말했다.
“영화 홍보도 되고 관객 유입도 늘어나겠군.”
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니 당장 시작해 보자고.”
“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