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보물 같은 친구
준수는 텃밭으로 가서 통을 열었다.
시우가 옆에서 박수를 쳤다.
“지렁이들 입쟝. 출동.”
지렁이들이 천천히 땅속으로 사라져갔다.
지호가 곤충 채집 상자를 열었다.
“나도 이거 쟈뱌따. 개미. 이거또 여기 푸러줄까?”
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시우가 박수를 치며 외쳤다.
“개미 군댠 입쟝, 출동.”
지호가 곤충 채집 상자를 쏟자, 흙과 개미들이 함께 떨어졌다.
“잘 샤랴. 개미야. 우리 매일 만냐.”
지호가 개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은우와 정우도 손을 잡고 텃밭으로 나왔다.
정우가 잘자란 텃밭을 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횬아, 이거 좀 뱌. 쑥쑥 자라떠. 푸리.”
“응, 우리가 심은 건데 이러케 자라떠.”
김마리아 수녀님은 콩과 팻말을 챙겨서 텃밭으로 오고 있었다.
‘오늘은 정우와 현정이 콩도 심어줘야지.’
현정이가 퐁퐁이 인형을 안은 채 수녀님을 따라오고 있었다.
수녀님이 정우와 현정이에게 말했다.
“정우랑 현정이도 오늘은 콩을 심어보자. 여기에다.”
수녀님이 강낭콩을 정우와 현정이에게 주었다.
“정우는 콩 이름 뭐로 할까?”
“초로기.”
“아, 초록색이어서.”
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정이는 콩 이름 뭐로 할까?”
“마법지팡이.”
현정이는 동화책을 읽을 때마다 마법 지팡이가 너무나도 부러웠다.
‘지팡이만 있으면 나도 뭐든지 할 수 있을 거야.
요정도 지팡이로 엄마를 불러줬으니까.
콩이 쑥쑥 자라서 어서 지팡이가 됐으면 좋겠다.’
은우는 현정이의 말을 들으며 현정이가 왜 지팡이를 가지고 싶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지팡이로 빌고 싶은 소원이 있나 보다. 동화책 속에선 지팡이로 모든 게 이뤄지니까.
내게 신의 재능이 있는 걸 알고 나면 현정이가 나를 부러워하겠다.
하지만 현정아 마법으로도 행복을 찾을 수 없는 거야.’
은우는 신화를 읽으면서 신이 축복을 내릴 수도 있지만, 신이 분노를 내릴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신의 분노만큼 무서운 건 없지. 난 신의 재능을 꼭 필요한 곳에만 사용하기로 했어. 그리고 혹시 신의 축복이 사라지더라도 내 인생이 행복할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내 힘으로 해볼 거야.’
은우는 지나온 두 번의 생에 대해 생각했다.
‘두 번의 생 모두 아쉬움이 있었지. 전전생인 파리넬리의 삶은 명예와 돈을 얻었지만, 행복한 가족을 얻을 수 없었고, 전생인 파드와의 삶은 가족의 사랑은 있었지만, 돈이 없어서 굶어 죽고 말았어.
이번 생엔 사랑과 돈, 명예를 모두 얻을 거야. 그리고 행복도.’
현정이는 콩을 심고 팻말에 [마버 지방이/ 헌징]이라고 적어넣었다.
정우의 팻말에는 [조녹 / 징우]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이제 물을 뿌려줄까? 잘 자라라고. 그리고 만날 때마다 예쁜 말을 해주면 콩이 초록이랑 마법지팡이가 더 잘 자랄 거야. 알았지?”
“네에.”
정우가 분무기로 물을 뿌리며 말했다.
“초로가. 빨리 크쟈. 내갸 머글게.”
옆에 있던 연아가 정우에게 말했다.
“무섭쟈냐. 냔 [콩나무] 안 머글 거야.”
정우가 배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쑥쑥 자라서 머겨야지.”
현정이가 [마법지팡이]에게 속삭였다.
“빨리 커셔 내 소어늘 드러져.”
은우는 현정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래도 이제 조금씩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시간이 지나면 더 많이 좋아질 거야. 현정아.’
지호가 말했다.
“어제 바메 냐 외계인 봐따.”
아기들이 시선이 모두 지호에게로 향했다.
“외계인?”
정우가 은우에게 물었다.
“외계이니 머야? 횬아.”
은우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외계인이라니 그건 내 전전생과 전생의 기억에도 없는 건데. 보리에게 물어봐야 하나? 보리는 알고 있을까?’
지호가 으스대며 말했다.
“외계인은 우주에 사는 사람드리야. 그 샤람드른 우리보다 머리가 조태. 지구를 정복할 거래.”
준수의 눈이 동그래졌다.
“지구를 정보칸다고?”
연아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무셔어.”
지호가 말했다.
“무셥지 아냐. 난 외계이니랑 말할 뚜 이꺼든. 그거 아랴. 슈퍼맨도 외계이래. 우리 아빠갸 그래떠.”
은우가 물었다.
“그럼, 거미맨이랑 박지맨도?”
“응, 다 외계이니야.”
“우아.”
아기들은 지호의 말에 감탄했다.
은우가 물었다.
“거미매니랑 박지매는 우릴 지켜주는데. 슈퍼맨도.”
지호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편. 나쁜 외계이니 문제야. 사일런스 박샤처럼 마리지.”
은우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일런스 뱍사갸 외계인이어떠?”
“그러치. 지구를 꿀꺽하려는 거야. 그래서 내갸 밤마댜 외계이니 오는지 보고이떠. 망원경으로.”
정우가 동그래진 눈으로 지호를 보며 말했다.
“우아, 머찌댜.”
지호는 뿌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외계이니 말도 아라보고 이떠. 그러니까 외계인에게 [지구에 오지 마랴]라고 말하려면 [노노노노노노노노노]라고 말하면 대.”
연아가 지호의 말을 똑같이 따라 했다.
“[노노노노노노노노노.] 외어야지.”
현정이가 물었다.
“소어늘 드러주떼요는?”
지호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말했다.
“[소소소소소소소소소.]라고 말하면 돼.”
현정이가 지호의 말을 똑같이 따라 했다.
“[소소소소소소소소].”
지호가 말을 이었다.
“차칸 외계인드른 소어늘 드러주기도 햔대. 외계인른 마벼블 부릴 뚜도 이때. 냐는 외계이니랑 말할 뚜 이떠서 하냐도 안 무서어.”
아기들은 지호를 우러러보았다.
“우와.”
현정이는 지호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외계인을 만나고 싶어.’
***
스캇은 정신병에 걸린 천재 피아니스트 니콜라스의 역을 연기하느라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고 있었다.
‘메소드 연기는 늘 후유증이 있어. 연기의 방식을 바꾸어야 하는데 쉽지 않네.’
스캇은 니콜라스의 역을 맡고 나서 극심한 조울증에 시달렸다.
‘하늘을 날 것처럼 신이 날 기분이었다가 다시 온 세상이 암흑인 것처럼 우울해지지.’
혼자 있는 밤이면 미칠 것만 같은 기분이 되곤 했다.
스캇은 자신의 영혼이 조금씩 갉아 먹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스캇은 처음 대본을 읽었던 날의 기뻤던 감정을 떠올리려 애썼다.
모래사장에서 빛나고 있는 한 알의 진주처럼 니콜라스의 이야기는 빛이 나고 있었다.
‘이 영화는 내 삶을 걸 가치가 있어.’
이미 수백 번도 더 읽은 대본이 스캇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재생되고 있었다.
‘머리가 너무 아파.’
스캇은 두통약을 한 알 먹고 나서 너투브를 켰다.
‘기분이 좋아질 만한 영상을 봐야겠어.’
스캇은 [기분이 좋아지는 음악]을 검색했다.
여러 개의 영상이 떴지만 전부 다 알고 있는 음악들이었다.
아래에 모르는 외국 음악이 하나 뜬 영상이 떴지만, 외국 노래를 클릭하고 싶진 않았다.
스캇은 검색어를 바꿔서 [신나는 음악]을 검색했다.
여러 개의 영상이 떴지만 역시 다 알고 있는 곡이었다.
아까 보았던 외국 음악 하나가 떴지만 클릭하지 않았다.
‘이것조차 마음대로 안 되는군.’
스캇은 짜증이 났다.
마지막으로 스캇은 [웃기는 음악]을 검색했다.
여러 개의 영상이 떴고 아까 보았던 외국 음악 하나가 다시 떴다.
‘세 번이나 검색되다니. 그래 내가 한 번 틀어준다.’
스캇이 [스카이다이빙 하며 추는 따따따]를 클릭했다.
한 남자가 비행기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스카이다이빙이군. 나도 저걸 했었지. 스위스에서.’
남자의 얼굴이 압력 때문인지 일그러졌다. 볼살이 계속 떨리고 있었다.
남자는 떨어지면서 손가락 두 개를 계속 흔들고 있었다.
‘대체 저게 뭐지?’
떨어지는 남자의 모습 위로 은우의 [따따따]가 흘러나왔다.
[다 함께 원 따따따따 따따따따
박수쳐 투 따따따따 따따따따
흔들어 뜨리 따따따따 따따따따]
남자는 떨어지면서 박수를 치고 떨어지면서 엉덩이를 흔들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생쇼야.’
땅에 발이 닿자 남자는 본격적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강아지도 고양이도 가치
뛰어뱌 총총 달려뱌 총총]
남자가 트램펄린을 가져다 놓고 그 위에서 퐁퐁 뛰고 있었다.
뛰는 남자의 뒤 풍경이 바뀌고 있었다.
바닷속.
하늘 위.
구름 위.
우주.
숲속.
스캇은 어이가 없어서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하하하하.”
[더 높게 더 크게 더 빨리 뛰어뛰어
따따따따 따따따따]
스캇은 자신도 모르게 노래를 따라 불렀다.
[따따따따 따따따따]
영상이 끝나고 스캇은 아래에 있는 다른 영상을 클릭했다.
[싱크로나이즈드로 보는 따따따].
수영복을 입은 여자가 다리로 춤을 추고 있었다.
[다 함께 원 따따따따 따따따따
박수쳐 투 따따따따 따따따따
흔들어 뜨리 따따따따 따따따따]
여자의 다리가 물 위에서 미끄러졌다.
여자의 다리가 물속에서 팔짝팔짝 뛰어올랐다.
스캇은 [따따따] 노래에 맞춰 자연스럽게 리듬을 타고 있었다.
‘이 노래 너무 재밌네. K-POP이라니 참신한데. 미국 노래보다 좋은 것 같아. 가사도 쉽고 멜로디도 쉽고.’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는 그 안무는 스트레스가 풀릴 정도로 쉽고 재밌었다.
***
아침이 밝자 스캇은 개운한 기분으로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로 태어난 기분인걸. 어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췄더니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아.’
스캇은 대본을 쥐고 촬영장으로 향했다.
“스캇 오늘 컨디션은 어때?”
감독인 프랭크가 스캇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날씨만큼 좋아.”
“오늘 찍을 장면이 매우 중요한 장면인 거 알지?”
오늘의 촬영장면은 주인공인 니콜라스가 정신병을 이겨내고 재기를 준비하는 장면. 트램펄린 위에서 점프를 뛰면서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 장면이었다.
프랭크가 스캇에게 말했다.
“대본엔 짧게 나와 있지만, 이 장면이 정말 중요해. 난 이 장면에서 관객들에게 니콜라스가 느끼는 다양한 감정을 전달하고 싶어. 두려움, 음악에 대한 열망, 불안함, 자유롭고 싶은 마음 그 모든 걸 한 장면에 응축시켜서 보여주고 싶어.”
스캇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도 이 장면이 얼마나 중요한 장면인지 알고 있었다.
스캇은 대본에 쓰여진 대로 트램펄린 위에 올라섰다.
그는 추리닝 위에 바바리코트를 입고 귀에는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이어폰의 음악을 들으며 그는 트램펄린 위에서 뛰고 있었다.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지만 하고 싶다라는 열망도 있어야 해.’
스캇은 니콜라스의 삶에 대해 돌아봤다.
‘가족들의 기대, 주변의 기대, 그 모든 기대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도망쳤던 기억. 그리고 나를 사로잡았던 정신병. 예민했던 정신은 병들기 쉬웠지. 하지만 난 음악을 사랑하고 다시 음악을 해야만 해.’
프랭크가 외쳤다.
“컷.”
스캇이 트램펄린 아래로 내려왔다.
“좋긴 한데 뭔가 좀 부족한 기분이야. 다시 해 볼까?”
“담배 한 대만요.”
스캇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역시 어려운 장면이야. 니콜라스는 트램펄린 위에서 어떤 감정이었을까? 나는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만 할까.’
스캇은 다시 니콜라스에 대해 생각했다.
‘라흐마니노프의 곡 중에서도 어렵다는 피아노 협주곡 3번. 미치지 않고서는 칠 수 없다는 그 곡이 니콜라스의 재기곡이었지. 니콜라스는 그 곡으로 화려하게 재기해.
그건 니콜라스가 정신병을 앓았던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거야.
니콜라스는 어떻게 불안한 심리 상태를 이겨냈을까?’
스캇은 다시 트램펄린 앞으로 돌아왔다.
프랭크가 말했다.
“연기가 나빴던 건 아냐. 하지만 관객이 니콜라스의 복잡한 감정을 알기가 어려울 것 같았어. 그러니까 다시 한 번만 해보자.”
“이번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들어볼게요.”
“좋아.”
촬영이 시작되었다.
스캇의 이어폰에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이 들려왔다.
밝은 듯 슬픈 듯 두 가지의 감정 사이를 교차하는 피아노의 선율.
‘이 음악 너무나 니콜라스를 닮았네.’
스캇의 얼굴은 선율을 따라 천천히 웃음을 지었다가 천천히 시무룩해지곤 했다.
스캇의 얼굴은 도화지가 된 것처럼 음악에 대한 느낌을 표정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프랭크는 생각했다.
‘아까보단 좋아졌어. 하지만 뭔가가 부족해. 뭐가 부족한지 짚어서 이야기해 줄 수 없으니 답답하네. 내가 만들고자 하는 장면은 어떤 장면일까?’
프랭크가 다시 컷을 외쳤다.
스캇은 조용히 트램펄린 아래로 내려왔다.
‘대체 뭘 원하는 걸까? 다음에 난 프랭크에게 어떤 연기를 보여줄 수 있지?’
스캇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