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할리우드로 가는 길 (2)
공항에 내리자 은우의 출국 장면을 촬영하기 위한 기자들과 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은우가 차에서 내리자 끊임없이 울리는 셔터음들.
‘전에 위대한 목소리 촬영하러 출국할 때는 촬영하러 온 기자분들도 없고 팬들도 없었는데. 확실히 인기가 있어진다는 게 이런 거구나. 온도 차가 대단하네.’
위대한 목소리 때는 은우가 출국한다는 것이 기사화되지도 않았고, 소속사도 없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벌어진 듯했다.
‘하긴 ‘내일도 사랑해’와 ‘별을 사랑하는 아기 마법사’ 외에는 공식적인 활동을 한 것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위대한 목소리 측에서 내가 파리넬리 아역이라는 것을 감추고 싶어 했었지.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있을 줄 알았으면 좀 더 신경 써서 입을 걸 그랬나.
비행기 오래 타면 힘들길래 편하게 왔더니만.’
은우는 지난번 이탈리아로 비행할 때 청바지를 입었다가 불편했던 기억이 있어서 이번에는 최대한 편한 복장으로 왔다.
사진 기자들은 은우의 사진을 찍고 있었다.
‘편안한 트레이닝복이 저렇게 귀엽다니!’
‘트레이닝복이 멋진 공항패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좋은 예다.’
‘공항이 런웨이 같잖아.’
은우가 수많은 카메라들을 지나갈 때 근처에 서 있던 팬 한 명이 은우에게 과자를 건넸다.
“은우야, 이거 먹고 촬영 잘해. 진짜 맛있는 거야.”
은우의 손에 들려진 것은 초코과자.
‘출국할 때도 선물을 받는구나. 인기가 올라가니 확실히 전과는 다르네.’
은우는 한 손에 과자를 안았다.
다른 팬이 은우에게 달려와 은우의 손에 쇼핑백을 주고 갔다.
은우는 쇼핑백을 들고 멋지게 공항 안으로 사라져 갔다.
옆에 서서 가던 길동은 은우의 캐리어와 자신의 캐리어를 챙기며 은우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상한 사람이 은우에게 접근하지 않는지 잘 살펴봐야만 한다.’
연예인의 인기가 올라가면 극성팬도 늘어나는 까닭에 길동도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그때, 일곱 살 정도 돼 보이는 여자아이가 은우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커다란 종이통을 손에 들고 있었다.
“은우야. 이거.”
은우는 어리둥절해서 종이통을 받아들었다.
그때 여자아이가 와락 은우를 안았다.
“은우야, 나중에 누나랑 꼭 결혼하자.”
은우는 당황했다.
‘갑자기 뭐지? 너무 어려 보여서 나를 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는데.
이건 내가 원하는 상황이 아닌데. 아직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이렇게 갑자기 가까워질 수는 없어. 소리를 지를까?
아니야. 팬 관리를 잘해야 하니까 천천히 대화로 풀어나가는 것이 좋겠어.’
길동은 당황했다.
‘중고등학생만 돼도 강하게 떼놓을 텐데 쟨 너무 어리고 작잖아.
은우가 어리니 팬도 어리구나.
떼어놓긴 해야 할 텐데 내가 만지면 부스러질 것처럼 작으니 함부로 손을 댈 수도 없고 큰일 났네.’
길동은 여자아이의 어깨를 손끝으로 살짝 치며 말했다.
“안녕, 친구야. 우리 친구. 엄마랑 같이 공항에 온 거야? 혼자 오진 않았지?
그렇게 갑자기 안으면 은우가 놀라요.
우리 이걸 좀 놓고 이야기할까요.”
여자아이는 정신이 돌아온 듯, 은우를 안고 있던 손을 놓았다.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은우가 너무너무 보고 싶었거든요. 어제 은우 꿈도 꿨는데, 은우도 저를 좋아한다고 말했어요.”
길동은 진땀이 났다.
‘초등학생에게 대체 어떻게 설명을 하는 게 좋을까?
그래도 빨리 놔서 다행이긴 한데.’
은우가 여자아이를 보며 말했다.
“그림 교먑게 쟐 바들께. 냘 조케 생갸케 져서 너무 거마여.”
여자아이는 감동한 듯 울먹였다.
“내가 어제 밤새 열심히 그렸어. 널 생각하면서.”
은우가 대답했다.
“내 뱌에 거려두께. 응언해져서 거먀어.”
길동은 은우의 대처에 놀랐다.
‘당황하거나 소리치거나 화내지 않았어. 기분 나쁠 수도 있었을 텐데 팬의 감정을 고려해서 말하고 있어.
대단하다. 은우야.
20살 넘은 ‘남자친구’보다 훌륭해.’
***
길동은 거구를 비즈니스석에 끼워 넣으며 강라온 사장에게 통화 중이었다.
“사장님, 저도 좀 퍼스트 클래스 끊어주시지. 매니저는 자기 연예인 옆에 있어야 하는데 이게 뭡니까?”
“미안해. 경비가 여유롭지 않은 걸 어떻게 해. 퍼스트 클래스는 태현이도 탄 적 없다고. 그건 그렇고 비행기는 잘 탔어? 별일 없었지?”
“웬 여자아이 하나가 은우랑 결혼하고 싶다고 울고불고 난리였어요. 차라리 덩치 큰 남자면 어떻게 해 보겠는데, 아기 팬이라니 정말 당황스러웠다고요. 그 어린아이한테 저리 가라고 할 수도 없고. 남들이 보면 아동학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고요.
아무래도 여자 매니저가 필요할 거 같아요. 가끔 저로서는 역부족이라고 느껴질 때가 있어요.”
“큭큭큭큭큭.”
전화기 너머로 강라온의 숨넘어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왜, 그래도 니가 잘하니까 아무 일도 없었겠지.”
“제가 잘한 게 아니라 은우가 잘 대처했어요. 어린아이답지 않게. 암튼 담엔 경호원 숫자라도 늘려주시든지. 이제 은우 극성팬도 점점 늘어나는 것 같고.”
“그래, 수고 많다. 길동아. 이 기회에 너도 여자랑 애기랑 친해져 보면 좋지 않겠니? 그래야 너도 장가도 좀 가고 모태솔로도 탈피하지 않겠어?”
“아잇, 참 형님도. 그 말을 또 왜?”
“알았다. 승무원분에게 제재받기 전에 전화 끊고 조심히 다녀와. 디즈니 쪽 동향도 잘 보고. 은우가 월드 스타가 되려면 디즈니가 큰 도움이 될 테니까.”
“네, 형님.”
길동은 전화를 끊고 한숨을 쉬었다.
“여자와 아기. 내가 가장 약한 두 상대. 덩치 크고 힘 센 사람들은 두렵지 않은데 말이야. 작고 여린 존재들 앞에선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
반면 은우는 처음 타본 퍼스트 클래스에 신나 하는 중이었다.
‘와 여긴 진짜 넓네. 비즈니스 좌석 5개는 합친 거 같은데. 게다가 셀프바도 따로 있고.’
“싸인 한 장만.”
은우는 승무원 누나인가 하고 고개를 들어 옆을 보았다.
‘누구지? 처음 보는 사람인데.’
종이를 들고 있던 아주머니가 말했다.
“은우야, 네 팬인데. 너가 여기 앉는다고 해서 일부러 옆자리를 끊었어. 이 자리 끊는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너무 행복하다. 은우를 LA에 도착할 때까지 볼 수 있다니!”
은우는 생각했다.
‘어떻게 알고 옆좌석을 예매한 거지? 좀 무서운데. 오늘 아까 그 누나도 그러더니 무슨 날인가.
이러다 공항 울렁증 생길 것 같은데.
일단은 그래도 팬분이시니 최대한 친절하게 대해 드려야지.
아까 그 누나도 진심으로 대했더니 별문제 없이 넘어갔으니까.’
은우가 대답했다.
“네, 감샤햠니다. 싸인햐께요.”
아주머니가 갑자기 은우 앞에 넓은 등판을 내밀었다.
“여기다가 해 주렴. 여기 네임펜 가져왔어. 고맙다. 은우야. 가보로 물릴게.”
은우는 아주머니의 태평양 같은 등짝이 펼쳐지는 순간 놀랐다.
‘이 아주머니 강적인데. 뭔가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든다.
생각해보면 파리넬리일 때도 무서운 여성 팬들이 많았었지.
화장실까지 따라와서 놀랐던 적도 많았었는데. 이제 시작인 건가.’
은우는 자리에 앉아 초등학생이 주고 간 편지를 펴 보았다.
- 은우야, 나는 니 노래를 들고 너에게 반해써.
그래서 너랑 스무 살이 되면 결혼할 거야.
겨혼식 때 예쁜 애딩드레스를 입을 꺼야.
나는 너의 여보가 될 거야.
***
공항에서는 존이 은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은우야, 반가워.”
“잘 지내떴떠요?”
길동이 존에게 인사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오시느라 수고하셨어요. 여기 통역을 도와주실 린다 조. 린다가 일정도 도와줄 거예요. 한국 음식이 먹고 싶다거나 급하게 아파서 병원에 한다거나. 필요한 모든 편의를 봐 줄 거예요.”
“감사합니다.”
길동은 존의 배려에 고개 숙여 감사했다.
‘말이 안 통해서 걱정이었는데. 현지인을 붙여주다니 좋네.’
존이 말을 이었다.
“은우가 우리에게 큰 손님이니까 당연히 신경 써서 에스코트해야죠. 자, 이건 웰컴 선물.”
존은 캐리어를 건넸다.
‘캐리어 가득 선물이라니, 뭔가 클라스가 다르다는 느낌이네. 미국은.’
은우는 위대한 목소리 촬영 때와 너무도 달라진 분위기를 느끼며 차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은우의 컨디션을 생각해서 녹음 일정은 3일 후부터 잡혀 있어요. 그러니까 푹 쉬고 시차 적응한 다음에 녹음을 진행하면 될 것 같아요.”
***
길동은 은우의 체크인을 도와주었다.
‘아빠 없이 매니저와만 함께 하는 여행이라니 뭔가 어색한데.
이제 나도 다 큰 것 같기도 하고.’
만감이 교차하는 은우였다.
길동은 키를 받으며 말했다.
“와우, 스위트룸. 비행기 좌석은 비즈니스였지만, 호텔은 같이 묵으니 스위트룸이네.”
길동은 신이 났다.
‘남자친구 매니저 할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네.
남자친구는 인원도 6명이나 돼서, 아무리 스위트룸이라도 좁게 느껴졌을 거야.
월드 스타가 좋긴 좋은데.’
은우는 방에 들어와 호텔을 둘러보았다.
피렌체의 오래된 호텔과는 다른 호화스러운 분위기가 또 다른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지난번보다 내 위치가 더 중요해진 걸까. 근데 너무 졸리다.’
시차 때문인지 졸음이 몰려오는 은우였다.
‘갖고 싶다. 아레스의 체력. 아레스의 체력만 있었어도……’
***
다음 날 아침 7시, 은우는 테라스의 문을 열고 태권도를 하고 있었다.
“태건!”
한층 날렵해진 찌르기와 발차기.
‘단전에 힘이 전보다 많이 모이고 있어. 체력이 늘어날수록 재능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으니, 하루빨리 체력을 늘려야만 해.’
은우는 재능을 불러와 테스트를 했다.
[이집트 태양신 라의 빛 레벨 1]
‘이번에는 30분 이상 재능을 유지해야 해.
현재 시각 7시 13분’
은우는 정신을 집중했다.
길동은 자면서 생각했다.
‘더워. 에어컨 온도를 낮춰야겠어.’
길동은 잠기운에 눈도 뜨지 못한 채, 리모컨을 찾고 있었다.
‘대체 어딨지?’
길동은 헤매다가 은우를 잠시 본 것도 같았다.
‘근데 은우 몸에서 빛이 나고 있네. 이상하다? 뭐지? 꿈인가?’
길동은 텔레비전 근처 탁자에서 리모컨을 찾았다.
‘여깄었구나. 어서 온도를 낮춰야지.’
길동은 다시 잠이 들었다.
은우는 시계를 보고 있었다.
‘7시 45분. 30분 지속 성공.’
은우의 몸에서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있었다.
‘샤워를 하고 길동이 형을 깨워야겠어.’
길동은 은우가 흔드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횬아 이러냐요.”
“응응, 일어나야지. 배고파?”
길동은 자기가 은우보다 늦게 일어난 것이 미안했다.
“은우 배 안 고퍄요. 노래 연습해야 하는데. 그러케 시끄러울까 뱌.”
***
길동은 은우와 함께 호텔 근처 공원에 나와 있었다.
은우는 생각했다.
‘호텔에서 노래를 부르면 다른 사람들이 깰지도 모르니까. 여기서 맘껏 소리를 질러야지.’
은우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기여운 뚜르르르르 배부른 뚜르르르
행보캰 뚜르르르 아기 샤자.”
길동은 은우의 성량과 음색에 놀랐다.
‘자유자재로 음을 넘나들고 있어. ‘남자친구’와는 차원이 다르구나. 이래서 강라온 대표님이 그렇게 말했던 거구나.’
지나가던 관광객 하나가 길을 가다가 멈춰서 은우의 노래를 듣기 시작했다.
은우는 집중을 하느라 관광객이 앞에 선 것을 모른 채 다음 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
길동은 감탄했다.
‘이건 성악가들이 부르는 노래인데. 제목은 모르지만 보통 고음이 아닌데. 이렇게 높은음을 소화하다니. 그나저나 이거 찍어야겠다. 그런데 하필 고프로가 호텔에 있네. 아쉬운 대로 폰으로라도 찍어야지.’
길동은 스마트폰으로 은우의 영상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한 명이던 관광객이 어느덧 열 명이 넘는 숫자로 불어나 있었다.
“La scia ch'io pian ga, la du ra sorte 라 시야 키오 피안 가 라 두 라 소르테
e che so spiri la liberta 에 케 소 스피리 라 리베르타
나를 울게 하소서.
비참한 나의 운명 나에게 자유를 주소서.”
은우가 노래를 마쳤다.
“브라보!”
“휘이이익.”
“짝짝짝짝.”
환호성과 박수 소리에 은우는 깜짝 놀랐다.
은우의 앞에는 동전과 지폐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길동은 깜짝 놀랐다.
‘아침에 음정 잡는다고 한 노래가 즉석 버스킹이 됐네.
근데 오늘 들어보니 확실히 알겠다.
레벨이 다르다는 거.
은우를 위해서 나도 더 열심히 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