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손에 피를 묻히는 각오
“이렇게 오셨는데 주위가 소란스러워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듣기 좋은데요. 나름 활기차 보이고. 목이 터져라고 외치는 걸 보니 당신에 대해 불만이 상당히 많은가 봅니다. 하하!”
나의 대답에 정대현이 벙찐 표정이다.
사장실은 단출했다.
집무용의 책상과 서재에는 기술서적들이 빼곡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공대출신이라고 하더니 뼛속까지 그런 기질이 있는 거 같다.
창문을 통해 정대현을 저주하는 목소리가 내부로까지 들려왔다.
악덕기업주, 또는 직원을 노예로 부리는 놈, 기타 등등까지.
어디보자.
정대현이 노예업주처럼 보이나?
나름 인상은 좋은데.
그리고 사장이라면서 그 흔한 여비서조차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 커피를 대접한다고 하더니 자신이 직접 포트에 물을 끓여 타주었다.
악덕기업주나 직원을 노예로 부리는 경우라면 첫인상에서부터 대충 판가름 난다.
그 외에 직원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 등에서도.
물론 공장 밖에서 그를 향해 죽어라고 저주를 퍼붓는 인원들은 제외하고 말이지.
“그런데 저를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받고 좀 당황하기는 했는데. 그것도 투자회사의 관계자가 오는 것은 상당히 드문 일이라.”
“저는 JSE-(K) 투자의 전략실장인 강민입니다. 그리고 여기는 우리 쪽과 같이 일하는 박광석입니다.”
정대현을 향해 간단하게 명함을 건네었다.
내 쪽을 보더니 정대현이 놀랐다.
아마도 그는 박광석쪽이 더 직책이 높은 걸로 생각했을 테니까.
“이렇게 젊은 분이 전략실장이라. 대단하시군요.”
“직책이 큰 만큼 책임감도 커지는 법이지요.”
“역시.”
“그런데 한 가지 묻고 싶군요.”
“어떤 겁니까?”
“분명히 오늘 우리들이 그리고 투자회사에서 온다는 연락을 받았을 것인데.... 생산공장의 앞에서 업무방해를 하는 저들을 그냥 놔두셨군요. 보통 투자회사의 사람들이 저런 것을 본다면 당신을 포함해서 회사의 이미지를 상당히 안좋게 볼 수도 있고요. 따라서 경찰을 동원해서 오늘만이라도 강제해산을 시키실 수도 있었을 텐데요.”
“그래봐야 단시간의 위기를 넘기는 눈속임에 불과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나중에 되면 금방 들통날 일일 뿐인데.”
“그래서 그냥 놔두신 거다. 당신이 사장으로서 회사를 살리고 투자자를 끌어들일 생각이라면 손에 피를 묻히는 각오라도 되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리더로서의 의무인데.”
“물론 제가 저들을 진정한 적이라고 생각했다면 아마도 피를 묻히겠지만, 저들 중에 상당수는 저와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직원들입니다. 그리고 만약 외부인이 우리회사에 대해 알고 싶다면 현재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여드리는 것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정대현이 대답하며 표정을 굳혔다.
눈앞의 얄팍한 이익만을 생각하며 행동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심지도 곧고 자신의 신념도 확고했다.
하지만 단점이 없는 건 아니다.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과감하게 흙탕물에도 뛰어들어야 하는데 그런 건 부족했다.
하긴 그 정도의 능력을 갖춘 인물은 오히려 위험하다.
나의 통제권을 벗어날 가능성도 있기에.
따라서 어떤 부분에 장점이 있으면서 다른 쪽에 단점이 있는 것이 더 적당했다.
“현재 공장의 가동률과 생산에 참가하는 인원들은 어느 정도쯤 됩니까?”
“부끄럽게도 30%를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니 거래처도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고 불량률도 생기면서 그런 큰 사건도 벌어진 것이겠군요.”
“작년에 벌어진 배터리 폭발사고는 지금도 원인을 규명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찾아내지는 못했습니다. 분명히 설계상으로는 아무런 결함이 없었고 이후의 테스트에서도 문제가 없었는데.”
정대현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 자신이 직접 개발에 참여했고 연구진들을 진두지휘했다. 따라서 기술적인 결함이 생긴다면 그가 먼저 알아냈을 것이다.
그리고 기술과 기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도 정확하다.
문제는 사람이지.
그 때 문이 열리며 직원이 들어왔다.
“사장님. 손님이 와 계신 줄 몰랐습니다.”
“아닐세. 무슨 일인가?”
“오늘 약속된 노사간 회의가.”
“그렇군.”
정대현이 생각난 듯 대답했다.
노사간 협의.
일종의 부분파업이 진행 중인 상태지만 사측과 노조간의 회의는 벌어진다.
다만 KR-전지(株)의 경우에는 이 파업이 장장 2년여를 끌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2년 동안 계속 파업이 진행된건 아니다.
노사간 협의를 통해 일정 부분 타결이 된 뒤에 조업이 정상화 되지만 그것이 채 2~3달을 못 간다.
그 뒤에 다시 몇 달간 파업이 이어지면서 회사의 업무 중 상당수가 마비되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찾아와 주셨는데.”
“혹시 괜찮으면 우리들도 참관할 수 있을까요? 일종의 옵저버 자격으로.”
“사장님. 듣기로 저분들은 투자회사에서 온 분들이지만 못할 거 없다고 봅니다. 오히려 노조위원장과 그 떨거지들을 상대로 압박하는 수단도 될 수 있고요.”
집무실로 들어온 직원이 주장했다.
처음에는 정대현도 머뭇거렸지만 직원의 말에 동의했다.
노조 쪽에서 반발할 것은 예상되지만 어차피 오늘 노사협의에서 제대로 협상이 될 가능성은 없어보였다. 지리한 소모전 수준의 협의에 불과한 것이니까. 나로서는 노조위원장이란 최규식을 직접 확인해볼 필요가 있었다.
***
“이보시요. 정대현 사장. 저들은 누구요?”
“노사협의에 못 보던 외부인을 데려오다니. 정신 있는 겁니까?”
역시나 우리를 보자마자 반발하는군.
노사협의를 하기로 한 회의실에 들어가자 테이블의 반대편에는 머리에 붉은띠를 두른 인물들 5명이 앉아있었다.
중앙의 40대 중년 사내가 KR-전지(株)의 노조위원장인 최규식이다. 눈이 뱁새눈처럼 가늘게 찢어졌고 신경질적으로 나를 노려본다. 그런데 최규식은 노조위원장이 된지 겨우 2년 남짓한 경우다.
그전의 노조위원장인 서홍철은 꽤 유화적인 인물로 사장인 정대현과의 사이도 원만했다.
그러나 최규식이 새로운 노조위원장이 되고부터 KR-전지(株)의 노조는 엄청난 강성노조로 바뀌었다.
노조의 지휘부도 싸그리 교체되었고 실상은 최규식이 이전에 있던 서홍철의 세력을 완전히 말살해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노동운동은 당연히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의 권익보호란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KR-전지(株)에서 벌어지는 파업과 노동운동은 그 본질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다.
정확히는 노동운동과 파업은 단지 표면적인 것이고.
그 내부에 뒤가 구린 흔적이 보였다.
이제부터 그것을 찾아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여기에 참가한 것이다.
최규식과 그 일파들이 뭐라 떠들건 상관없다.
“우리들은 여기 KR-전지(株)에 대해 자금지원을 검토 중인 투자회사에서 나온 사람입니다.”
“투자회사라고?”
최규식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당황하고 있었다.
옆에 있던 녀석들도 웅성거린다.
잠시 당황했던 녀석이 더욱 매섭게 반발했다.
“투자회사면 당신들 일이나 신경 쓰지. 여기에 왜 끼어드는 거요? 그리고 KR-전지에 얼마나 자금지원을 할지는 모르지만 그래봐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에 불과하지.”
“경영난에 시달리는 KR-전지가 자금지원을 받으면 회사만이 아니라 당신들 노조 쪽에도 이득이 될 것인데 이런 식의 반응은 기묘하군요. 마치 노조 쪽에서 회사가 망하기를 바라는 투인데.”
“지금 뭐라고 했어? 말이면 다인 줄 알아?”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듯 최규식이 발끈했다.
역시 저놈 뭔가 있네.
그리고 옆에 있는 녀석들도 좀 수상하고 말이지.
최규식과 측근들을 바라보며 주머니에 슬쩍 손을 넣었다.
항상 갖고 다니는 스마트폰이 있었고 그중 위쪽의 단축키를 눌렀다.
이 단축키는 스마트폰에 있는 여러 개의 어플 중에 단 하나만 즉각 실행시킨다.
그것을 실행시킨 뒤 앞쪽으로 다가갔다.
일부러 최규식의 근처까지 갔고 손을 내밀었다.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역시 깐깐하신 노조위원장이시군요. 그렇지만 우리 쪽의 투자방침은 자금지원을 받는 회사에 강성노조가 있다고 해서 변하는 건 아닙니다. 그보다는 회사가 갖고 있는 내제적인 가치를 더 보니까요.”
“내제적인 가치 좋아하네.”
탁- 최규식이 내 손을 뿌리쳤다.
제딴에는 꽤나 쿨하게 보이고 싶어서 그런 건가?
하지만 상관없지.
어차피 내가 스마트폰에 작동시킨 어플은 이미 실행되고 있으니까.
***
“결국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났네요.”
“어차피 예상했던 일이라 크게 놀랍지도 않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박광석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번에 진행된 노사협의.
예상대로 노조위원장인 최규식을 포함해서 그 일파들은 오로지 하나만 주장했다.
정대현 퇴진해라! 빼애애액~
그 외에 몇 가지 요구사항들은 그저 구색을 맞추기 위한 장식품에 불과했다.
그리고 회의가 끝날 즈음에 최규식은 아예 협박까지 해댔다.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더 큰일이 벌어질 거라고.
하지만 나는 녀석들의 협박을 들으며 오히려 헛웃음이 나왔다.
정대현을 포함해서 KR-전지의 인원들에게는 통할지 몰라도 나한테는 아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너희들에게 큰일이 벌어질 거 같은데 말이지.
네놈들이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런데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저는 아직도 KR-전지(株)에 대해 기대감을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다른 쪽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습니다.”
“그 부분은 알고 있지만 위험에 대한 판단과 결정은 우리 쪽에서 하는 겁니다. 그리고 결론은 나왔습니다.”
“어느 쪽입니까?”
“지금부터 KR-전지(株)의 주식을 본격적으로 매입해 주십시요. 단 너무 성급하게는 말고 물밑에서 은밀히 해주시면 좋겠군요.”
“그것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어차피 시장에 나와 있는 KR-전지(株)의 물량이 많은 것도 아닙니다. 다만 30% 이상이 매수되었을 때에는 시장에서도 어느 정도 눈치채고 그것이 주가에 반영될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급격하게 치솟을 수준은 아니니까. 크게 걱정은 없겠군요.”
“그런데 정말로 괜찮겠습니까? KR-전지의 경우에는 아직도 바닥을 친 것은 아닙니다. 얼마나 더 떨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글쎄요. 이번 투자는 주가를 통한 시세차익보다는 다른 부분에 목적이 있습니다. 물론 이후에 KR-전지의 주식이 지금보다 수십 배, 아니 수백 배 높아진 뒤에는 우리 쪽에서도 시세차익에 나설 수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KR-전지(株)를 정상화시키고,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드는데 주력할 생각입니다.”
“엄청나군요. 사실 듣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인데. 당신의 말을 들으니 불가능은 아니라는 희망도 생깁니다.”
박광석이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당신에게는 몇 가지 더 부탁하고 싶은 것들이 있는데.”
“말씀해 보십시요.”
“현재 KR-전지(株)의 노조는 결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더군요.”
“사실 그것은 저도 느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정대현 사장도 제대로 손을 쓰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성격상 충분히 이해합니다. 정대현 사장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은데 기껏 강성노조나 최규식 같은 녀석과 드잡이질 하면서 이미지를 이상하게 만드는 걸 원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최규식 일파를 그냥 놔둘 수도 없습니다.”
“뭔가 방법이 있다는 겁니까?”
“녀석들이 지저분하게 나온 이상 그에 합당한 댓가를 치러주면 됩니다.”
“당신의 말을 들으니 이번에 녀석들이 제대로 걸린 듯한 느낌이군요.”
박광석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하였다.
이미 박광석은 나의 능력, 아니 JSE-(K)투자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결코 평범한 투자회사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어떤 일이라도 벌릴 수 있고 어떤 상대도 지옥으로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