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조 재벌-26화 (26/300)
  • # 26

    어서와~ 이런 면접은 처음이지?

    [이번에 장세폭락으로 1억3000만 원 잃었습니다. 한강에 투신하러 갑니다. 투신자 모집합니다]

    - 헐, 진짜로?

    - 나도 투신하러 가야하나. 크아악!

    - 어디서 사기쳐? 돈 따놓고. 기만자 새끼.

    - 돈 잃었으면 인증해봐.

    - 저놈 어그로네.

    - 어그로충에게 먹이금지.

    대충 예상은 했지만.

    하아! 이거 엄청나네.

    <주주클럽>이 개미투자가들과 주식쟁이들의 모임이다 보니 상당수의 게시글들이 주식에 대한 것이다.

    그중에는 <주식에 대한 명언>이라고 하면서 올라온 게시글도 있는데.

    <주식은 여친과 같다. 너무 관심 가지면 멀리 도망가서 주가 폭락하고, 가만히 놔두면 알아서 다가오고 주가 올라감.>

    나름 그럴듯하게 써놓았지만.

    역시나 댓글에는 개소리~ 개소리~ 등이 달려있다.

    그리고 어떤 게시글에는 XXX 주식이 좋으니까, 또는 대박이 되니까 사두는 게 좋다....라는 선동하는 글들도 난무했다.

    처음에는 정신이 없었지만 보다보니 은근히 재밌다. 여기에는 개미투자자들과 주식쟁이들의 애환이 담겨있다 해도 좋을 정도다.

    최신 게시글들을 몇 개 재미 삼아 훑어보다가 검색어를 입력했다.

    <검색어 / KR-전지>

    역시나 게시글들이 꽤 나온다.

    그리고 회원들의 편의성을 위해 해당 주식의 주가 변동에 대한 그래프도 년도별로 나왔다.

    “그런데 2년 사이에 20배나 폭락이라니. 이런 경우도 있네.”

    코스닥의 주가변동은 엄청날 수준이다.

    속칭 우량주가 많은 코스피에 비해 코스닥의 주식들은 상당부분 주가변동폭이 크고 리스크(Risk)가 많다.

    때문에 코스닥에서 대박 치는 경우도 생기고 쫄딱 망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리고 몇 년 사이에 20배이상.

    그보다 더 폭락하는 주가들도 있다.

    재수 없으면 아예 상장폐지가 되면서 주가 자체가 휴지조각으로 변하는 경우도 있다.

    KR-전기의 경우에는 2년 전에 4만 원 정도를 하던 주가가 지금은 2000원대 수준이다.

    특이한 것은 2년 전 4만 원대에 있던 주가가 점점 더 떨어지며 2000원대까지 내려왔다는 사실이다. 순식간에 떨어진 것도 아니고 2년이란 시간동안 서서히 점진적으로 폭락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주주클럽의 속칭 주가분석가들이 내놓은 견해는 이렇다.

    ◆ KR-전기는 사놓아도 반등의 가능성은 개뿔도 없음.

    ◆ 내년에는 상장폐지 가능성 99%.

    ◆ 메디치 최고의 흑역사. ㅋㅋ

    KR-전지의 주가를 볼 때 회사자체가 엉망진창이란 뜻이다.

    내가 정대현 사장을 잘못 평가했나?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러던중 한 가지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메디치-

    저 단어가 왠지 낯설지 않은데.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자 생각났다.

    우리학교에 있는 여러개의 투자동아리들 중에 하나다.

    투자동아리들에는 주로 나 같은 상경계의 학생이나 졸업생들이 많이 참가한다.

    우리학교에도 여러개가 있는데 내가 저 이름을 기억하는 건 단어 자체가 특이해서다.

    외국어 단어중에 하나인데.... 맞아. 전에 저 동아리 맴버에게 듣기로는 초대 회장인가 하는 사람이 유럽의 경제와 역사를 무지하게 좋아해서 그렇게 지었다고 했던 거 같다.

    이제야 생각나네.

    그렇다면.

    <회원검색 / 메디치>

    게시글들이 엄청나게 나왔다.

    다만 메디치라는 닉네임을 가진 회원에 대한 평가는.

    - 메디치. 이 개새끼야. 너 때문에 완전히 망했다.

    - 나가 뒈져.

    - 나랑 현피뜨면 네놈의 배떼지에 사시미 쑤신다. 진짜다.

    진짜로 살벌하네.

    그런데 나름 이유가 있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주주클럽>의 최고 네임드-중에 하나였던 메디치라는 회원이 이제는 때려죽일 공적으로 변해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이유가 KR-전기에 대한 부분이다.

    메디치는 <주주클럽> 네임드중에 한 명이었고 투자분석이나 주가분석에도 나름 일가견이 있었다. 그 때문에 웬만한 증권가의 주식분석가들을 능가했고 그 명성도 꽤 대단했던 거 같다.

    그리고 2년 전 메디치가 자신 있게 추천하고 분석한 것이 KR-전지였다.

    단순히 추천하고 분석만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도 갖고 있던 투자금을 거의 몰빵수준으로 넣었다.

    <주주클럽>의 네임드인 메디치가 이렇게 직접투자하고 인증사진까지 올리고 나서자 꽤 많은사람들도 거기에 동참했다.

    그런데 결과는....

    폭망이었다.

    그것도 2년 동안 20배로 하락하는.

    다만 메디치의 분석이 결코 헛점이 많거나 엉터리로 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그가 네임드로 이름을 날릴 때의 주가분석은 치밀하면서 정확했다.

    “지금도 활동하나?”

    메디치의 회원이름으로 검색을 했지만 지난 2년 동안 새로 올라오는 글들은 거의 없었다.

    KR-전지의 주식이 계속해서 내려가면서.

    그 자신도 돈을 엄청 손해본 것도 밝혔고 다른 회원들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글들은 있었다.

    하지만 그 뒤로 주식에 대한 분석글이나 관련된 글들은 하나도 없었다.

    “설마 회원을 탈퇴했나?”

    그런 생각으로 검색했더니 회원탈퇴는 아니었다. 2년 동안 글은 안쓰지만 대신 눈팅만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긴 게시글 쓰자마자 댓글로 욕이 엄청나게 달릴것은 뻔했으니까.

    잠시 고민했다.

    메디치 최고의 흑역사가 KR-전지의 주식을 잘못 판단했고 그자신도 폭망했다.

    그야말로 실패자.

    하지만 왠지모를 끌림이 있었다.

    이 기분과 느낌.

    확실히 이전에도 경험했던 것이다.

    유비콘(Ubicon)으로 찾아가기 전에 느꼈던 것과 비슷하다.

    바로. 돈의 냄새다.

    ***

    지글- 지글-

    불판 위에 올려진 고기가 구워지며 기름이 좔좔 흐른다.

    마블링이 끝내주네.

    맞은 편에 있는 30대 후반의 중년 사내.

    그의 목에서 침이 꿀떡 넘어갔다.

    저 몰골을 보니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겨우겨우 생활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허름한 작업복 차림의 상의.

    바지도 군데군데 헤어진 부분이 보인다.

    헝클어진 머리와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

    얼굴에는 세월의 고뇌가 그대로 나타났다.

    단 2년 사이에 저런 식으로 폭삭 늙기도 하는구나.

    한때 국내최대의 주식 커뮤니티인 <주주클럽>에서 최강의 네임드로 명성을 날렸던 인물.

    하지만 지금 그의 상태는 최악이다.

    “메디치 씨. 아니 본명은 박광석. 맞나요?”

    “아니. 어떻게 제 이름을....”

    “사실 저도 당신이 졸업한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학번으로 따지면 엄청난 후배이긴 하지만.”

    “아. 후배님이셨군요. 그렇다면 혹시 경제학과?”

    “아닙니다. 경영학과입니다.”

    “그렇군요.”

    박광석의 표정이 침울하게 변했다.

    같은과는 아니지만 후배에게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여준다는 게 꽤 자괴감이 들테니까 말이다.

    “그래도 저에 대해 어떻게 알아냈는지 궁금하군요.”

    “자신이 학부시절때 만든 동아리에 애착이 많으시더군요. 주주클럽에서 닉네임을 봤을 때에 낯선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뭣보다 그런 닉네임은 상당히 특이하고 한번 보면 잊기 힘들거든요. 그리고 마침 우리학교에도 그 이름을 가진 투자동아리가 있고. 그래서 이래저래 좀 알아봤습니다.”

    “이제는 그 동아리에 안가본지도 2년이 넘었는데.”

    “하지만 초대회장이자 동아리 설립자인 당신에 대한 후배들의 평가는 좋은 편이던데요.”

    “어차피 과거의 일일 뿐입니다.”

    박광석이 씁쓸하게 웃었다.

    지난날의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10년 전 박광석은 경제학과의 선배와 후배들 사이에서 탑스타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교수들도 그를 향해 우리과에서 대단한 인재가 나왔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비록 실패했지만 실력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박광석을 나의 조력자로 선택할 조건은 아니다.

    머리만 똑똑하고 가슴이 별로인 녀석들은 꽤 많다. 그리고 이런 녀석들은 위기상황에서 배짱과 뚝심이 없다.

    잘나갈 때에는 괜찮아 보이지만 조금만 틀어지거나 위기상황이되면 멘탈붕괴에 배신까지도 한다.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게 있습니다.”

    “어떤 겁니까?”

    “주주클럽에서 네임드였던 당신의 최대 흑역사가 KR-전지의 주식에 대한 평가와 투자였던데 뭣 때문에 그런 결론을 내렸습니까?”

    “지금까지 여러회사의 주식에 대해 분석했지만, KR-전지의 경우에는 느낌과 확신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현재도 그 확신은 유효합니까?”

    “예......!”

    “이미 주가가 바닥을 치고 20배나 폭락을 했는데도 말입니까?”

    박광석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확신에찬 표정이다.

    하지만 자신이 틀렸다는 걸 공개하기 싫어서 그럴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면 한 번 더 테스트를 해볼까?

    “이건 좀 껄끄러운 질문일 수도 있는데. 당신은 2년 전에 KR-전지의 주식을 거의 몰빵으로 매수했는데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까?”

    “그 때 산 주식은 단 한주도 팔지 않았습니다.”

    “보통은 주식가격이 내려가면 서둘러 손절매를 하는 것이 원칙이지 않습니까?”

    “단기투자의 경우에는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제가 KR-전지의 주식을 산것은 장기투자를 바라보고 한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주가가 20배나 폭락했지만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KR-전지는 지금도 망하지 않은 기업이고, 뭣보다 발전 가능성은 어떤 기업보다 큽니다.”

    바로 저 눈빛이다.

    나를 죽일듯이 노려보는 저 눈빛.

    아마도 이런 질문을던진 나를 향해 분노와 모욕감을 느낄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신념과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또한 KR-전지의 주식이 떨어질 때에 박광석은 자신이 보유한 주식을 단 한주도 팔지 않았다.

    그것이 뭣보다 마음에 들었다.

    상황이 불리하게 변한다고 냅다 팔아버리고 손절매한 경우라면 애초부터 별볼일없는 수준의 인물이다.

    그리고 나는 박광석에게 저녁 한끼 사준 것으로 끝내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믿고 있기에 20배나 가격이 폭락한 주식을 지금까지 들고 있었다.

    “당신이 <주주클럽> 최강 네임드란 명성은 결코 헛소문이 아니었군요.”

    “네임드라. 한번도 그런 걸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그저 다른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일 뿐입니다.”

    “당신말대로 어차피 명칭은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그 대신 지금부터 제대로 일좀 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예....?”

    박광성이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서 와~ 이런 면접은 처음이지?

    ***

    “이거 완전히 엉망진창이군요.”

    “사실 저도 KR-전지가 이렇게 변한 것에 안타까울 뿐입니다.”

    박광성이 대답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KR-전지(珠)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다.

    초대사장이자 설립자인 정태수는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 미군부대의 정비과에서 일하면서 배터리와 축전지에 대한 기술을 배웠다.

    기껏해야 14살에 미군부대에서 잡부로 일하던 정태수는 미군을 상대로 ‘기브미 초콜렛(Give me Chocolate)’대신에 전기기술을 가르쳐 달라고 졸라댔던 것이다.

    비쩍마르고 까무잡잡한 소년이 먹을 거 대신에 기술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 상황.

    그 때의 미군들은 참으로 황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샘슨이란 정비병은 이런 정태수에게 관심을 가졌고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샘슨이 본국으로 간 뒤에 정태수도 청년이 되었다.

    이후에 정태수는 자신이배운 전기기술을 바탕으로 한국에서 최초로 배터리 제조공장을 세웠다.

    고려전기라는 조금은 후줄근한 회사명이지만 한국 배터리산업의 선두주자에 속했던 것이다.

    대기업으로 커지는 못했지만 견실하고 탄탄한 회사.

    그것이 고려전기였다.

    그 뒤에 아들인 정대현이 회사를 물려받은 뒤에 KR-전지(株)로 회사명을 바꾸었다.

    아버지인 정태수와 마찬가지로 정대현도 공대를 졸업한 기술자이자 공학자였다.

    정대현이 사장이 된 뒤로 KR-전지(株)의 기술력은 더 발전했다.

    특히 배터리와 관련해서 출원한 특허만 해도 꽤 되었고 이제는 기술력에서 일본과 맞먹거나 능가한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현재 전세계 배터리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건 일본이다. 전세계의 수많은 전자제품에 일본산 배터리가 들어간다.

    그리고 배터리의 경우에는 일정횟수의 충전과 방전을 겪으면 그 성능이 저하되면서 새로 교체해야 할 소모품이다.

    따라서 배터리 생산과 수요는 시간이 지나면서 더 늘어갈 뿐 줄어들지 않는다.

    KR-전지(株)는 사장인 정대현의 활약을 통해 드디어 일본과 겨룰수 있는 수준에까지 올라선 것이다. 그런데 2년 전부터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악덕 기업주 정대현은 물러나라!”

    “KR-전지는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해라.”

    “우리는 너희들의 노예가 아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생산공장 앞에서 떼를지어 외치는 목소리.

    단순히 구호만 외치는 게 아니라 아주 살벌한 풍경이다.

    “배신자 새끼들!”

    “퉤......!”

    공장안으로 들어가는 다른 직원들을 향해 각목을든 생산 직원들이 욕설과 침을 뱉어냈다.

    역시 2년 동안 20배나 폭락한 이유가 있구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