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조 재벌-6화 (6/300)

# 6

잘못하면 인생 조진다.

“아저씨, 주문하실 거에요? 말거에요? 진짜로 바빠 죽겠는데....”

여자의 앙칼진 음성이 쩌렁쩌렁 울린다.

그 때문일까?

중년 사내의 얼굴에는 수치심과 분노가 동시에 떠올랐다.

여기가 공공장소가 아니라면, 이년이....! 하면서 따귀라도 올려붙였을지 모른다.

그것도 아니면 더 큰 수치심에 자포자기할지도.

그런데 중년 사내의 소심한 얼굴 표정을 보니.

주변에 사람이 없다 해도 저 성질 괴팍한 여점원을 상대로 과감하게 맞설 배짱은 없는 거 같다.

대충 봐도 저 여점원의 짜증 섞인 표정도 나름 이해되고.

번잡한 구내매점 안에서 허름한 옷을 걸친 중년 사내가 갈등 어린 표정으로 메뉴를 고르고 있었다.

정확히는 돈이 별로 없어서 싼 거를 고르다보니 시간도 걸리고 뜸들이는 상태다.

돈이 아예 없는 건 아닐 거다.

경마폐인에게는 항상 팬티 속에 꿍쳐둔 배팅자금이 있는 법이니까.

대신 경마폐인은 배팅자금을 제외한 다른 것에는 최대한 아낀다.

옷 사는 것도 아끼고 심지어 먹는 것까지도.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도록 굶주려도. 마권을 사고 경마에 배팅할 돈은 최대한 남겨두려고 하는 것이다.

그럴 것이 오늘의 경마시합은 앞으로도 계속 남았고 벌써 돈이 떨어지면 곤란하니까.

“아저씨. 정말로 주문 안하실 거면 가세요. 바빠서 다음 손님 받아야 하니까.”

여점원이 손까지 휘휘 내젓는다.

중년 사내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벌게졌고 주변에서도 수근거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저것이 경마에 미친 폐인의 말로다.

그래서 나에게는 더욱 접근하기 쉬운 상대였다.

중년 사내가 포기하고 몸을 돌리려는 순간.

“혹시 영천이 형님 아니세요?”

“예?”

“영천이 형님 맞죠? 와아~ 진짜 세상 좁네요. 이런 곳에서 다 만나고.”

“저기 그러니까 전 영천이란 사람이 아닌데요.”

중년 사내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저 사내의 이름?

솔직히 모른다.

난 일부러 놀란 표정을 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영천이 형님이 아니라고요? 진짜로 얼굴이 똑같은데.”

“뭔가 잘못 오해하신 거 같은데요.”

내가 저 사내보다 훨씬 어린데도 말투가 공손하다.

소심한 중년 사내.

어쩌면 한국 내의 수많은 고개 숙인 중년 남자를 대표하는 이미지중에 하나다.

상대가 부정을 했지만 난 더 파고든다.

“영천이 형님이라고 생각해서 너무 반가웠는데. 그것보다 저도 배고파서 여기 왔는데 진짜로 제가 좋아하는 선배 형님하고 똑같이 생겨서 너무 좋네요.”

이럴 때에는 넉살좋게 나가는 게 해법이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아가씨! 주문받아요. 영천이 형님. 뭐 드시고 싶은 거 없으세요. 오늘은 이 동생이 한턱 쏘겠습니다.”

“아니, 제 이름은 영천이가 아닌데....”

그렇게 말끝을 흐리면서도 아예 거부하는 눈치는 아니다.

뭐 이정도면 반은 넘어온 셈이지.

***

쩝쩝-

에구, 걸신 들린 듯이 먹어대네.

테이블 위에는 구내매점에서 산 빵이나 과자들이 잔뜩 있었다.

못해도 25,000원 정도 산 거 같네.

대충 보니 최소 2-3일은 굶은 거 아닐까?

하긴 입고 있는 옷도 군데군데 흙도 묻어있었고 어디 길거리에서 노숙하는 처지인가 보다.

“너무 급히 먹으면 체하시는 거 아닙니까?”

옆에 있던 캔음료를 주니까 그것을 딴 뒤에 벌컥벌컥 마신다.

그렇게 혼자서 다 해치운 뒤에.

중년 사내가 자괴감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먹다보니....”

“하하, 전 이걸로 충분합니다.”

한손에쥔 빵을 들어보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글고보니 저사람도 이제야 겨우 제정신이 돌아왔나 보다.

“정말로 너무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제가 영천이 형님에게 받은 도움이 얼마인데 이런 거 쯤이야.”

“그런데 전 젊은친구가 말하는 영천이란 사람이 아닌데.”

“크게 상관있습니까? 이런 것도 인연인데.”

“하긴 그런가.”

중년 사내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사내의 이름은 박재성.

올해 나이는 49살이고 내년이면 50줄이다.

그런데 얼굴은 50대 후반처럼 늙어 보인다.

조로증이나 그런 게 아니고 사람은 고생을 하고 폐인생활을 하면 실제 나이보다 더 노화되니까.

“그런데 재성이 형님은 여기에 자주 오시나 봅니다.”

“사실 경마 때문에 폐가망신 당하고 이런 신세까지 되었는데도. 매주 토,일요일이 되면 나도 모르게 여기로 찾아올 수밖에 없네. 진짜로 내가 미쳤지.”

사내가 고개를 흔들었다.

경마폐인들이 항상 하는 결심.

‘이것이 마지막이다.’

‘다시는 경마장 근처에도 가지 않겠다.’

‘경마장쪽으로는 오줌도 누지 않겠다....!’

··· 라고 결심하지만 그게 채 1주일도 못버틴다.

카지노 도박처럼 경마에 중독되면 도저히 끊지 못하는 마약과도 같은 특성이 있다.

몇 차례 대화만으로 대충 지금까지 저 박재성이란 사람이 경마폐인이 되고 어떤 생활을 해왔는지 짐작될 수준이다.

그리고 내가 경마폐인을 개과천선 시키겠다는 희망?

애초부터 그딴 건 계획에도 없다.

내가 저 박재성에게 접근한 것은 나만의 목적이 있어서다.

나는 오늘 처음 과천경마장에 와봤고 그야말로 경마에 대해서는 초짜.

그래서 가이드가 필요한 것이다.

경마시합이 어떻게 진행되고.

무엇이 관전 포인트이고.

현재 경마산업에 관련된 전반적인 정보를 제공해줄 사람.

딱 그 정도 수준의 목적으로 박재성은 나에게 대단히 유용한 상황이다.

이제부터 가이드를 받아볼까?

***

“여기가 마권을 사는 곳이야.”

“그런데 저기 무인발매기도 보이던데요.”

내가 손으로 가리켰다.

경마장의 내부에는 곳곳에 무인발매기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꽤 많은 사람들이 무인발매기를 이용하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박재성은 무인발매기쪽을 보더니 고개를 내젓는다.

“무인발매기 편리하지. 시간이 없을 때에는 금방 살수도 있고. 하지만 손맛이 없어.”

“손맛이라고요?”

“그래. 무인발매기를 이용하면 그냥 지하철표 사는듯한 느낌이잖아. 그리고 진정한 경마꾼은 자신이 직접 수성싸인펜으로 마권에 표시를 하는 과정이 필요해.”

“상당히 아날로그적이네요.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 말이죠.”

“마권을 구입하면서 수성사인펜으로 마권에 직접 표시를 하면서 느끼는 기대감과 짜릿함이 바로 핵심이지.”

박재성이 자신의 신조를 밝혔다.

스스로 경마꾼이라 부르는 사내의 원칙일지도.

어쨌든 난 박재성과 함께 직접 마권판매소로 가서 어떻게 하는지 관찰했다.

그리고 박재성의 말대로 속칭 경마폐인이라고 부를만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무인발매기보다는 직접 창구를 이용해서 본인이 표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마권을 사는 것은 만 20세 이상이면 가능해. 다만 마권이란 건 기본적으로 무기명 유가증권과 같은 것이지. 당첨된 마권은 이후에 언제든지 현금으로 바꿀 수 있으니까.”

“그럼 틀린 마권은요?”

“그건 화장실 휴지보다도 더 쓸모없지.”

그 말대로 경마장의 바닥에는 군데군데 쓰레기처럼 굴러다니는 마권들이 보였다.

매경기가 끝날 때마다 경마폐인들에게 희비가 엇갈린다.

제대로 배팅해서 당첨된 사람은 환호성을 내지른다.

하지만 우승마를 맞추지 못한 사람은 기수와 말을 향해 개 쌍욕을 퍼붓는다.

경기가 시작되는 순간.

트랙에서 말들의 앞에 설치된 문이 오픈되기 전의 짧은 찰나에는 관람석 전체가 침묵에 휩싸인다.

최고의 긴장된 순간.

문이 열리자마자 말들이 트랙을 향해 돌진해가는 시간부터 결승점에 들어올 때까지는 관중석 전체가 거대한 함성으로 돌변한다.

서로들 자신이 응원하는 말이 선두로 나가기를 바라면서 목이 터져라고 고함을 지르는 것이다.

하아......!

경마장이 이런 곳이었다니?

새로운 경험이다.

“그런데 재석 형님. 마권의 배팅금액은 어떻게 되요?”

“너 진짜로 초짜구나. 사실 그냥 빈말인 줄 알았는데.”

박재석이 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박재석 같은 경마폐인 앞에서 경험자인 척 해봐야 금방 들킨다.

그리고 내가 박재석에게 접근한 것은 경마에 대한 가이드를 얻기 위한 것이니.

“처음에는 이런 거 별로 관심조차 없었는데 TV에서 몇 번 보다보니 흥미도 생기고 해서요.”

“호기심 삼아서 경험하는 건 좋은데 절대로 빠지지는 마라. 잘못하면 인생 조진다.”

확실히 그 말은 정답이다.

박재석을 보니 경마폐인이 어떤 상황과 결말이 되는지는 뻔히 보이니까.

“아무튼 경마란 것도 도박이야. 정부에서, 아니 한국마사회 새끼들이 대놓고 돈 벌려고 하는 짓거리니까. 하지만 세간의 이목도 있고 그리고 경마로 인한 도박 열기와 사행심. 그리고 사회적 문제가 될 수도 있어서 보통 사람들이 한 경기당 마권에 걸 수 있는 배팅금액은 정해져 있어. 기본적으로 최소 100원부터 시작해서 최대 10만 원이 상한선이야.”

“그럼. 100원으로 마권을 살수도 있다는 거네요.”

“그렇긴 한데. 보통은 1000원 정도가 일반적이지.”

박재석이 열정을 토하며 설명했다.

경마폐인이 된 상태지만 그래도 초심자인 내 앞에서 나름 가오도 잡고.

나를 가르친다는 보람과 뿌듯함도 있어서겠지.

그리고 박재석의 이런 설명과 정보를 들으면서 내 눈앞의 메뉴창에 있는 게이지들은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

***

“여기는 예시장이야. 마권을 사서 경마시합에 배팅할 사람이라면 반드시 찾아와야 하는 곳이지.”

그의 말대로 제법 큰 운동장의 측면쪽으로 기수를 태운 말들이 천천히 달리거나 걷는 모습들이 보였다.

박재석의 말대로 예시장을 찾는 건 중요했다.

경마는 말들이 벌이는 시합이다.

그런데 그날의 매시합마다 어떤 말들이 우승할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기본적으로 과거부터 누적된 데이터나 정보 등을 분석해서 배팅을 하기도 하지만.

경마장을 자주 찾는 경마폐인들은 예시장에서 출전 준비 중인 말과 기수를 직접 보면서 최종적인 판단을 한다.

즉 상태가 좋은지를 직접 눈으로 봐야 되는 것이다.

“확실히 경주마들은 다른 말들에 비해 다르군요.”

“당연하지. 저 녀석들은 우리같은 서민들보다 더 대접 받으니까. 너 경주마 한 마리 가격이 얼마인 줄 알아?”

“글쎄요. 일단 경주마니까 그래도 수천만 원쯤?”

“허접한 하급 경주마도 기본 1~2억은 넘어가. 그리고 외국에서 데려온 상급의 경주마는 그냥 부르는 게 가격이야. 10억 20억은 아주 우습지.”

“엄청나네요.”

솔직히 좀 놀랐다.

이건 보통사람을 능가할 정도로 귀하신 녀석들이네.

말이 인간보다 더 가치 있는 세상이라니.

처음에는 이 뭐 같은 현실에 짜증이 났지만 박재석의 이런저런 설명을 듣고 있으니 다른 방향도 보게 되었다.

한국도 요즘은 경주마나 마주에 대한 관심과 이슈가 증가하고 있지만.

외국에서는 이미 체계가 잡혀진 상태다.

그리고 경주마는 엄청난 돈을 창출하는 투자대상이다.

홍콩이나 영국 등에서 인정받은 고가의 경주마는 말 한 마리가 움직이는 중소기업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상품의 경주마를 길러내고 관리하는 외국의 유명 목장들이나 관리소는 경마산업 자체를 통해 수십, 수백억의 돈을 끌어모은다.

이런 세상도 있었다니.

사람은 보통 자신의 바운더리(경계) 안에서만 볼 수 있고 생각하고 판단한다고 했던가.

이제까지 난 경마시합이나 경마산업에 대해 그다지 관심도 없었고 몰랐는데 이쪽 세계도 엄청난 돈과 부가 창출되는 곳이었다.

뭔가 새로운 느낌이다.

나의 세계와 시야가 넓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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