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06 – 최강의 헌터
(302/306)
외전 06 – 최강의 헌터
(302/306)
#외전 06 – 최강의 헌터
2023.05.29.
작고 평화로운 공원.
노을이 저물기 시작할 무렵, 땅 위로 사이좋은 모녀의 그림자가 길게 쭉 뻗어 있었다.
“와아! 엄마, 하늘이 새빨개!”
“걸을 때는 앞을 봐야지? 넘어질라.”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여인은 한 손에는 장바구니를, 나머지 한 손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의 손을 잡고 있었다.
어린 딸은 프릴이 달린 검은 원피스를 고집했고, 비가 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꽃무늬가 프린트된 검은 우산을 꼭 챙겨 다니곤 했다.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받아랏! 내 흑염을!”
“우산을 그렇게 휘두르면 못써요. 누가 다치면 어떡하려고 그러니.”
엄마의 걱정 어린 잔소리가 들리지 않는 양 아이는 에잇! 에잇! 하며 우산을 허공에 휘저었다.
지금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망정이지, 혹시 통행자라도 있었다가는 큰일이다. 보다 못한 여인이 딸에게서 우산을 빼앗으려던 순간이었다.
“어? 엄마! 저기 좀 봐!”
웬일인지 딸이 먼저 우산을 휘젓는 일을 멈추고는 통통한 검지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응? 어디 말이야?”
“저기! 저어기, 카페에!”
“카페? 무슨…….”
딸의 흥분한 목소리에 여인이 고개를 돌리려던 바로 그때였다.
콰지직─!! 쿠웅!
“보자 보자 하니까, 어처구니가 없어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격양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서, 두 남자가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노란 비니를 쓰고 있는 남자의 주먹에서 후드득 돌 파편이 떨어지고 있었다. 여인은 그의 옆에서 구멍이 뻥 뚫린 공원 돌담을 발견했다.
방금 그 굉음은 저자가 맨손으로 돌담을 부수면서 난 소리가 분명했다. 그렇다면…….
‘각성자?’
분명했다. 일반인이 맨손으로 저 두꺼운 돌담을 부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각성자 혹은 헌터끼리의 싸움은 드문 일은 아니었다. 해외에서도 그런 일이 종종 발생하고는 했으니. 이는 일반 불량배들의 싸움과는 경우도 규모도 달랐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 능력의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대로 날뛰게 내버려 둔다면 이런 조그마한 공원 또는 상가 하나쯤은 무너지고도 남을 것이다.
설상가상 법을 무서워하지 않는 자들이라면 일반 경찰들조차 쉽게 그들을 저지할 수 없을 테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여인은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애초에 헌터들은 헌터법에 의거해 처벌을 받는다. 즉 그들을 말릴 수 있는 것은 경찰이 아닌, 협회의 정식 발령을 받은 요원들뿐이었다.
──혹은 그들을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는 더욱 강한 헌터만이.
“좋은 말로 할 때 그 게이트 핵 내놔.”
노란 비니를 쓴 각성자가 맞은편의 또 다른 각성자에게 으르렁댔다.
“뺏어 갈 수 있으면 뺏어 보시든지. 어차피 너나 너희 길드나 쥐뿔도 힘이 없으니 눈앞에서 스틸이나 당하는 거 아냐?”
“뭐라고?”
“애당초 너희 길드도 정식 경로로 게이트를 낙찰받은 것도 아니잖아? 그건 버스트 게이트였고, 경매가 시작되기 전에 닫혔으니 누가 핵을 먹든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텐데?”
“왜 문제가 없지? 그 게이트는 우리 길드가 먼저 발견했어.”
“하지만 보스는 내가 먼저 해치웠지.”
말다툼을 시작한 두 각성자는 지금이라도 당장 고유 능력을 사용할 것처럼 위태위태해 보였다. 보아하니 값비싼 게이트 핵을 두고 설전을 벌이고 있는 것 같았다.
공원을 거닐고 있던 사람들은 어느새인가 사라졌고, 저 멀리 상가 쪽 사람들이 이쪽을 불안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어떡해.’
그 가운데 여인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발을 굴렀다. 그녀의 딸이 두 헌터 가까이에서 우산을 품에 꼭 안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각성자 사이를 비집고 딸에게 뛰어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괜히 불똥이 뛰어 역효과가 날 수도 있었다. 아직까지는 그들이 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으니, 오히려 가만히 있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소리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각성자들과 딸의 거리가 가까워도 너무 가까웠다. 이대로 두 사람이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한다면 딸은 꼼짝없이 휘말리고 말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군.”
“통하지 않으면? 그딴 약해 빠진 고유 능력으로는 몬스터는커녕 벌레 한 마리나 잡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비아냥대던 남자는 비열한 웃음을 머금고서는 기어코 한마디를 더 붙였다.
“하긴, 그렇게 강했다면 게이트 핵을 빼앗길 일도 없었겠지.”
그에 노란 비니를 쓴 남자는 “하.”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너, 헌터 훈련소 126기 졸업생이라던데.”
콰직!
분노한 남자가 근처의 철 표지판을 세게 잡았다. 손가락을 통해 전해진 엄청난 악력에 표지판 기둥이 엿가락처럼 휘었다.
“이 기회에 선배를 대하는 그 본새부터 단단히 고쳐 줘야겠군그래.”
남자는 그대로 표지판을 쑤욱 뽑아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쌔액!
그가 표지판을 무기 삼아 전방에 휘두르자 공기가 날카롭게 갈라졌다. 맞은편의 각성자는 그 정도 공격을 피하는 것은 일도 아니라는 듯 휙, 하고 상체를 꺾어 회피했다.
다만 문제는…….
“꺄아아악!”
콰앙─!!
뒤에 있던 전봇대를 남자가 휘두른 표지판이 그대로 들이박고 만 것이다. 그 탓에 전봇대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크게 흔들렸다.
파직, 파지직…….
전선이 뒤얽히면서 살벌한 스파크가 사방으로 튀었다. 하지만 두 각성자는 그딴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겁을 먹은 것은 비각성자, 즉 행인들뿐이었다.
“시, 신고! 누가 협회에 좀 신고해!”
“경찰은 아직이야?!”
“미친 각성자놈들! 저기 내 차가 있다고!”
“지금 차가 문제야? 도망치지 않고 뭐 하냐! 휘말렸다가는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개죽음인 거 모르냐고!”
무너진 개미집을 빠져나가듯 우르르 자리를 벗어나는 행인들 가운데, 두 각성자는 서로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다음 선공권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이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서로를 주시하는 가운데.
쩌적, 쩌저적…….
위태로워 보이던 전봇대가 기어코 흔들리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초조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여인이 툭, 하고 들고 있던 장바구니를 떨어트렸다.
“예리야─!!”
새파래진 안색으로 딸의 이름을 울부짖는 순간,
‘지금이다.’
두 각성자가 동시에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이미 분노에 잠식되어 버린 그들에게는 무너지는 전봇대 아래, 몸을 웅크리고 있는 작은 소녀 따위 시야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쿠우웅!
전봇대가 바닥에 쓰러지며 뿌연 흙먼지가 시야를 가득 메웠다. 그 탓에 눈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콰과과광!
공중에서 부딪힌 두 각성자로부터 또 한 번의 굉음이 들려왔다. 제대로 맞부딪힌 것이다. 고막을 찢을 듯한 소리에, 일사불란하게 도망치던 행인들마저 우뚝 걸음을 멈출 정도였다.
“아, 안 돼…….”
자욱하게 번진 흙먼지를 아득히 바라보며, 여인이 쓰러지듯 털썩 무너졌다.
안 돼, 아닐 거야, 그럴 리 없어. 여인은 눈물로 얼룩진 고개를 들어 어딘가에 있을 딸의 그림자를 열심히 찾았다.
“뭐야, 너.”
그때였다.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은 흙먼지 속, 조금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원이냐? 뭔데 방해하고 지X…… 으헉!”
이번에는 반대쪽 각성자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도중 말을 끊고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슈우우우…….
흙먼지가 점차 가라앉으며 시야가 조금씩 돌아왔다.
“……!”
딸을 찾고 있던 여인은 눈앞의 광경을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 얼어붙었다.
“방해하고 지X?”
겨울바람을 타고 귓가에 닿은 것은 높낮이가 거의 없는, 무미건조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말조심해야지.”
콰득.
창백하리만큼 새하얗고 앙상한 손가락이 노란 비니를 쓴 남자의 단단한 턱뼈를 으스러트릴 듯 세게 거머쥐었다.
“1세대 선배한테는.”
“웁……! 우읏……!”
남자의 얼굴이 점차 파리하게 질려 갔다. 여자의 손에 의해 입과 코가 막힌 탓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도 눈앞의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보고야 말았기에.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반대편에 있던 또 한 명의 각성자가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저벅저벅 다가왔다. 금방이라도 우악스럽게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다.
“읍! 읍읍!”
그러자 입이 틀어 막힌 남자의 얼굴이 더욱더 새파랗게 질렸다. 마치 여자에게 겁이라도 줄 기세인 저놈을 말리려는 듯, 남자는 은하에게 턱을 잡힌 채 몸을 아등바등 움직여 댔다.
“안 들려? 겁도 없이 뭐 하는 짓이냐고.”
그런 그의 속마음도 모른 채, 상황 파악이 덜 된 남자는 기어코 여기까지 다가와 여자의 어깨를 터억! 거머쥐었다.
그러나 남자의 턱을 쥐고 있는 여자, 은하는 눈빛만을 돌려 그를 응시했다.
“가만히 있어. 다치기 싫으면.”
이어진 것은 단지 그 한마디와,
화르륵!
경고하듯 주변에 피어오른 검은 불길이었다.
흑염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흑염의 프린세스 아이템을 모두 장착한 상태여야만 했으나, 쌍아궁의 힘을 모두 흡수한 지금의 은하는 아이템의 힘 따위 빌리지 않고도 자유자재로 흑염을 부릴 수 있었다.
지금 검은 불길의 위협을 받고 있는 두 각성자에게 그런 사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지만.
“흐, 흑염…….”
그들이 알고 있는 ‘검은 불꽃의 주인’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쿵!
다리에 힘이 풀리기라도 한 듯, 한 남자가 털썩 주저앉으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리고 몇 초 뒤.
“공주님!”
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넋을 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있던 여인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흙먼지가 지나간 곳.
청바지를 입고 검은 머리를 길게 묶은 여자가 자신의 딸을 품에 안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제 딸은 그녀 품에 안겨 꽃처럼 활짝 웃고 있었다.
“맞죠? 공주님! 아까 카페에 앉아 있는 거 멀리서 봤어요, 헤헤.”
은하는 작은 소녀를 조심히 땅에 내렸다. 그리고 그 조그마한 머리 위에 자신의 손을 살짝 올려 두었다.
“오랜만이네, 예리야.”
새까만 눈이 곱게 휘듯 접혔다.
예리는 동그래진 눈으로 그 미소를 응시하다가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수줍은 듯 뺨을 붉혔다.
“두 번씩이나 도움을 받게 되었네요.”
안녕하세요. 조심스레 다가온 예리의 엄마가 은하 앞에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예리는 “엄마!” 하며 그녀 품으로 뛰어갔다.
그 모습을 가만히 살피던 은하는 엷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번에는 제가 도움을 받았습니다.”
“……네?”
“덕분에 중요한 것을 되찾았거든요.”
중요한 것……? 여인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작게 고개를 갸웃했다.
웨에에엥─
이후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와 함께 검은 차들이 주변을 에워쌌다. 신고를 받고 도착한 협회 요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정작 난동을 부린 두 각성자보다도 은하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당신은…….”
협회 요원 중 누군가가 그녀를 알아보기라도 한 듯 긴가민가하는 얼굴로 은하를 살폈다.
차에 그려진 협회 마크를 확인한 은하는 상황 정리를 위해 그들을 향해 말했다.
“이쪽은 제게 맡기시고 우선 저들을 연행해 주시겠어요?”
“음…….”
그러자 다른 요원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신원이 불분명한 자에게 사건 현장을 맡기는 무책임한 짓을 할 수 없었던 것.
그런 그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은하는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던 빨간 목도리를 스르륵 아래로 내렸다.
“……!”
가려져 있던 얼굴이 온전히 드러나며 주변에 서 있던 모든 이들이 일제히 숨을 들이켰다.
은하는 다시 한번 물었다.
“부탁해도 될까요.”
그녀의 얼굴을 본 이상, 걱정할 것 따위는 하나도 없었다.
요원들은 그녀의, 대한민국 최강의 헌터의 지시에 맞춰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