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05 – 세피아빛 기억 (301/306)


#외전 05 – 세피아빛 기억
2023.05.28.


“여긴…….”

은하가 우뚝 걸음을 멈추자, 그녀의 곁을 걷던 시우 역시 따라 멈추어 섰다.

“게이트 등장 이후 집을 잃은 난민들이 생활하던 판자촌이었다고 합니다.”

“판자…… 촌?”

은하의 표정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한때는 그랬을지도 모르나, 지금 보고 있는 풍경은 은하가 알고 있는 ‘판자촌’의 사전적 의미와는 전혀 달랐다.

윤이 나는 상가 건물에 번쩍번쩍한 간판들. 오히려 시내 한복판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번화한 장소였다.

“십여 년 전에 이 구역 전체가 재개발 공사에 들어가면서 풍경이 많이 달라진 모양입니다. 선배도 처음 이곳에 왔을 땐 꽤 놀란 얼굴이었죠.”

“내가 여기에 왔나요?”

“네. 이곳은 선배가 지금 오피스텔에 살기 전,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장소였으니까.”

……내가, 머물렀던 곳.

은하는 천천히 시선을 움직여 보았다. 낯이 익은 사람도 친숙한 건물도 없는 거리. 그러나 그중에 단 하나, 은하의 눈길이 멈춘 곳이 있었다.

‘나무…….’

은하는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기라도 하듯, 멈추었던 걸음을 슬며시 옮겼다. 시우는 말없이 그녀를 뒤따랐다.

신식으로 지어진 건물들 사이, 주변과는 어울리지 않는 거목(巨木)이 자리해 있었다.

차갑고 거칠거칠한 나무 표면에 살포시 손바닥을 가져간 은하는 턱을 들어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사람 손이 닿지 않을 만큼 높은 나뭇가지에 웬 하얀 리본이 묶여 있는 것이 보였다.

바람에 유유히 휘날리고 있는 그것을, 은하는 한참 동안이나 제자리에서 응시했다.

“배도 좀 꺼졌겠다, 이제 슬슬 다음 장소로 이동할까요.”

이어서 시우는 은하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들이 발길을 멈춘 곳은 그 동네에 있는 오랜 전통의 맛집 ‘김윤례 할매 국밥’이었다.

“여긴 알고 있어요. 엄마랑 자주 왔었으니까.”

“저랑 오기도 했었죠.”

두 사람은 점원의 안내를 받고 시끌벅적한 테이블석을 지나 룸 형식의 좌석에 앉았다.

미리 전화로 주문을 해 두었던 걸까. 그들이 앉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 식사가 준비되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국밥을 본 순간, 은하의 눈이 조금 커졌다.

은하는 엄마와 이 국밥집에 방문할 때마다 늘 같은 것을 주문하고는 했다.

─순대 국밥 한 그릇에 김치 만두 추가, 깍두기는 많이.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왜 그러시죠?”

“……아무것도.”

은하는 조용히 수저를 들었다.

그저 조금 신기했다. 이렇게나 은하의 취향인 메뉴만을 골라 미리 주문해 두었다는 사실이.

식사를 마친 후에 시우는 은하를 근처 쇼핑센터와 늑대 길드 본부 지하실, 심지어는 시우의 저택에도 데리고 갔다.

모두 기억을 잃기 전의 은하가 방문했던 장소들이었다. 하지만 은하의 기억은 여전히 안개가 낀 듯 모호하기만 했다.

“일단 오늘은 돌아갈게요.”

시우의 저택, 응접실에 앉아 있던 은하는 스르륵 소파에서 일어났다.

“바래다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시우는 옷걸이에 걸어 둔 재킷을 서둘러 챙기며 은하를 따라나섰다. 그런 그를 은하는 살짝 손을 뻗어 말렸다.

“아뇨, 가까우니까 괜찮아요. 오늘은 혼자 좀 걷고 싶어서요.”

“……그렇습니까.”

그제야 시우는 들고 있던 재킷을 도로 내려 두었다. 하지만 표정만 보아서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시우는 은하를 혼자 두는 것을 꺼려 했다. 자신이 아직 병상에서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환자이기 때문일까.

그러나 그런 걱정 따위 할 필요도 없었다. 기억을 잃었다고는 하지만 신체적인 능력치는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은하는 각성자, 심지어 일반 헌터들보다 월등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오늘 고마웠어요.”

그때였다.

“──선배.”

그대로 응접실을 빠져나가려는 은하를, 시우가 붙잡았다. 하지만 뇌를 거친 행동은 아니었는지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입술을 두어 번 붙였다 떼었다 한 그가 결국 시선을 툭 아래로 떨어트리며 꺼져 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시면.”

“네?”

“집에…… 도착하시면, 무사히 도착했다고 메시지 한 통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귀찮지 않으시다면요. 시우는 작게 덧붙였다.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던 은하가 살짝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터질 듯 꾸욱 쥐고 있는 그의 주먹이 보였다.

귀를 새빨갛게 물들인 시우는 고대하듯, 동시에 긴장하듯 어깨를 잔뜩 굳힌 채 은하의 대답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뭘 그리 대단한 부탁을 하는가 했더니, 고작 메시지 한 통 가지고. 그런 거라면 못 해 줄 것도 없었다. 은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요.”

“……!”

은하의 한마디에, 흐렸던 하늘이 삽시간에 개듯 시우의 얼굴이 화악 밝아졌다.

“고맙습니다, 선배.”

긴장했던 탓인지 살짝 붉어진 얼굴로, 그가 천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마치 특별한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의 미소처럼 티 없이 맑은 웃음이었다.

뭐가 그렇게 기쁜 걸까. 은하는 알 수 없었다.

“…….”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은하는 시우의 미소에 대해 생각했다.

시우는 바쁜 와중에도 늘 은하를 위해 갖가지 조언과 지원을 해 주었다. 은하가 입원했던 병원도 그의 소유였던 데다, 현재 은하를 돌봐 주고 있는 박 매니저 역시 그가 고용주라는 것을 알고 있다.

차갑고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외견과는 달리, 친절하고 깍듯한 사람. 그것이 은하가 현재 시우에게 가지고 있는 인상이었다.

다만 은하가 기억하는 한, 방금처럼 그런 식으로 웃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 웃음의 이유가 고작 ‘집에 돌아간 뒤 메시지 한 통’이라니.

내가 보내는 그 메시지 한 통이, 그에게 그토록 귀중하고 특별한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는 순간, 은하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마치…….

그런 건 마치, 그가 자신을 좋…….

“저어, 실례합니다. 혹시 매율 역으로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할까요?”

갑작스럽게 뒤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은하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는 찰나 은하에게 길을 묻던 남자가 하던 말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라, 당신은 혹시…….”

* * *

근처 카페.

“그렇군요. 기억이…….”

은하에게 대강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남자의 얼굴이 흐려졌다.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의 이름은 견두철.

그의 말에 따르면, 은하가 훈련소에 있었던 시절 그녀를 보살펴 주었던 소장님의 친아들이라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이미 구면이라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컵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던 그가 살짝 시선을 들었다.

“그럼, 아버지께 있어 당신이 최고의 제자였다는 사실도 기억하지 못하시겠군요.”

“제가…… 요?”

“네, 당신은 제가 아는 한 최고의 헌터가 키운 최강의 헌터셨답니다.”

두철은 배시시 웃으며 코를 슥 문질렀다. 은하는 이끌리듯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아버지를 누구보다 존경하는 아들의 얼굴이었다.

“아, 그렇지 참.”

무언가 잊고 있던 것을 떠올린 두철이 주머니를 뒤적거려 지갑을 꺼냈다. 지갑 속에서 나온 것은 지폐나 동전 따위가 아닌, 사진 한 장이었다.

“받아 주시겠습니까?”

어찌나 낡았는지 옅은 세피아빛을 띠고 있는 그 사진 속에는 엄격한 얼굴을 한 중년 남자와, 무표정하지만 앳된 이목구비를 한 여자가 나란히 찍혀 있었다.

지금처럼 머리카락이 길지도 않고 낯선 군복 차림새를 하고 있었으나, 은하는 사진 속의 여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저 중년의 남자가 바로 두철의 아버지, ‘소장님’이라는 것도 말이다.

“가지고 있는 아버지의 사진이라고는 이것밖에 없네요. 어머니와 여동생이 돌아가신 뒤, 이전의 사진은 모두 버리셨고 이후로는 단 한 장의 사진도 남기지 않으셨거든요. 덕분에 영정 사진을 구하는 데도 얼마나 고생했던지.”

두철은 목뒤를 긁적이며 하하 웃었다.

“사진 같은 거 굳이 찍어서 뭐 하냐고 말씀하시던 아버지셨지만, 이 사진은 지갑에 항상 꼭 넣고 다니셨답니다.”

그리 말하는 두철 앞에서 은하는 그 사진을 선뜻 받지 못했다. 아버지의 사진이 이것 한 장뿐이라면, 그런 소중한 물건을 자신이 과연 받아도 될까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그런 은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였는지 두철은 은하의 두 손에 직접 사진을 쥐여 주었다.

“사실 장례식장에서 헌터님을 처음 뵈었을 때 이걸 드리고 싶었지만,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지금이라도 꼭 받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은하는 두철이 직접 건네준 사진을 손에 꼬옥 쥐었다.

“……감사합니다.”

그제야 두철은 안심했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떠났다. 언젠가 기억이 다시 돌아온다면, 부디 아버지를 다시 뵈러 와 달라는 말과 함께.

은하는 그가 떠난 이후에도 한동안 카페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녀의 손과 눈은 휴대전화도 음료 잔도 아닌, 두철이 건네고 간 사진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사진 속의 두 사람. 소장님과 은하는 어느 쪽도 웃고 있지 않았고 흔히 그러하듯 포즈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목각처럼 나란히 서 있기만 한 상태였다.

사이가 좋아 보인다거나, 하다못해 사진 속 풍경이 아름답지도 않았다. 뒤로 살짝 보이는 것은 군용 막사와 모래에 뒤덮인 땅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하는 이 낡고 빛바랜 사진이 어쩐지 따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장, 님…….”

메마른 입술이 스스로도 모르게 작게 움직이는 순간, 또다시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손님? 괜찮으세요?”

마침 옆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던 카페 종업원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머리를 감싸고 있는 은하를 발견했다.

“어, 어떡해. 119! 119를 부를게요! 자, 잠시만요!”

“아뇨, 괜찮…….”

은하는 호들갑을 떠는 종업원을 말리려고 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머릿속이 혼란스럽고 금방이라도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토해 낼 것처럼 메스꺼워 견딜 수 없었다.

거대한 소용돌이에 전신이 휩쓸린 듯한 착각이 들 만큼 가만히 앉아 있기조차 버거운 상황에서, 안간힘을 써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콰지직─!!

“꺄악!”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카페 내부가 아닌 외부로부터였다. 깨달았을 때는 이미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은하는 이마를 부여잡은 와중에도 가까스로 상체를 들어 유리창 밖을 바라보았다. 게이트가 출현한 걸까? 단말기를 가지고 있지 않으니 알 방법이 없었다.

“진서 씨, 괜찮아?”

카페 사장처럼 보이는 남자가 허겁지겁 뛰어왔다.

“바깥에서 각성자들끼리 싸움이 붙은 모양이야. 여기까지 불똥이 튈지도 모르니 잠시 대피하자고.”

“네? 대피라니…….”

“저놈들이 날뛰기 시작하면 건물 한 채 날아가는 건 우스워. 잠잠해질 때까지 피해 있는 게 상책이야.”

그리 말한 사장은 얼른 서두르라며 헐레벌떡 카페를 빠져나갔다. 종업원은 멍하니 그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아차 하는 얼굴로 뒤로 돌았다.

“소, 손님! 들으셨죠? 근처에서 각성자들이 소란을 피우고 있대요. 일단 멀리 피하셔야─.”

그런데.

“……손님?”

방금 전까지 그곳에 앉아 있던 손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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