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 무아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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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 무아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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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 무아의 공간
2023.05.12.
고오오오─
땅이 진동하며 바람이 거세졌다. 데바가 서 있던 쪽이었다. 에단의 등장에 데바가 반응한 것이었다.
“오랜만이군, 에단.”
마구잡이로 흩날리는 흰 로브 사이로 데바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목소리는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톤이었으나 로브 그늘에 숨겨져 있던 놈의 두 눈이 형형하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시선이 닿은 것뿐인데도 살결 여기저기에 생채기가 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살벌하고 차갑다.
“그러게, 몇백 년 만인가?”
그러나 에단은 마치 오랜 친구를 대하듯 가볍게 대꾸할 뿐이었다. 그러고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은하의 어깨를 작게 두드린 뒤,
휙!
단숨에 데바 쪽으로 이동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그렇지?”
비스듬하게 고개를 기울인 에단이 데바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데바가 무어라 답할 새도 없었다.
다음 순간, 에단에게서 피처럼 선명하고 붉은 기운이 화악 뻗어져 나왔다. 그것은 괴수의 팔과 같은 형태로 변모하더니 둘을 크게 껴안듯이 감쌌다.
은하는 에단의 조치를 가늠했다.
‘데바를 데리고 ‘무아의 공간’으로 가려고 하는 거야.’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당시 에단은 상대를 ‘무아의 공간’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대상이 잠들어 있다거나 기절하는 등, 반드시 의식이 모호해야 한다고 했다.
은하와 얀의 공격에 부상을 입었다고는 하나, 현재 데바는 정신을 잃은 상태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에단은 데바를 ‘무아의 공간’에 데리고 가려 시도했고, 현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데바가 부상을 입고 약화되었기 때문에?’
……쉽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데바가 고작 그 정도로 쉽게 무방비 상태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에단!”
붉은 기운이 점차 진해진다. 이제는 데바와 에단의 실루엣조차 보이지 않았다. 붉은 기운에 휩싸인 둘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에단이 눈만 돌려 이쪽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괜찮다며 은하를 안심시켜 주기라도 하듯, 에단이 희미하게 미소 짓는 것이 보였다.
슈와아악…….
그리고 눈앞에서 에단과 데바가 사라졌다.
비로소 허공에 남은 붉은 기운의 잔재마저 모조리 사라졌을 때, 은하는 왼쪽을 향해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녀 곁으로 거대한 그림자가 다가왔다.
크르르…….
잠시 정신을 잃고 있던 얀이 다시 깨어나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상태를 보니 놈에게 걸려 있던 매혹은 해제된 듯했다.
에단이 데바를 데리고 사라졌으니, 이제 이곳에는 은하와 얀 둘뿐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체감상 자신에게 남은 마력은 10% 미만.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점은 결계가 부서지고 에단이 나타났으니, 곧 다른 지원군들도 이곳 중앙 탑에 도착할 것이란 점.
즉 그때까지 어떻게든 이 마력을 이용하여 얀을 상대하며 이준을 지켜 내야만 했다.
‘에단은…….’
데바와 함께 사라진 에단 쪽이 마음에 걸리지만, 은하는 애써 마음을 잡았다.
괜찮다. 에단이라면 분명 돌아올 테니까.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체력과 마력을 회복하는 일이 우선이라며, 당신을 회유합니다.]
“문제없어.”
적이 조디악이라고는 하지만 데바에 비하면 그깟 사자 한 마리.
“10%로도 충분해.”
얀과 정면으로 마주한 은하는 전투태세를 바로잡았다.
* * *
사방이 희뿌연 안개가 가득한 공간. 위를 보아도 아래를 보아도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같았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허무(虛無).
그 가운데 서로를 마주 보고 선 두 남자가 있었다.
“상상 이상인데.”
주변을 힐끗 둘러본 에단이 심심한 감탄을 뱉었다.
“네 ‘무아(無我)’ 말이야.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없을 줄은 몰랐거든.”
이곳은 에단의 ‘무아의 공간’.
자신이 지정한 영역 내부에 대상을 가둔다는 의미에서는 마갈궁 벤달기프의 ‘기사의 성역’이나 천칭궁 아스트의 ‘지하 미궁’과 비슷한 스킬이었다.
하지만 두 능력과는 달리 무아의 공간은 에단이 직접 지정하거나 생성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상대가 가진 무의식의 영역으로 에단이 ‘진입’하는 것일 뿐.
따라서 개인에 따라 풍경은 하나부터 열까지 상이했다. 누군가의 무의식에는 흐드러지게 핀 꽃과 날개 달린 요정이 있었고, 누군가에게는 광활한 바다와 푸른 하늘이, 또 누군가에게는 피로 젖은 땅과 부패한 동식물들의 잔해가 있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듯 아무것도 없는 ‘무의식’을 보는 것은 에단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놀랐나?”
“아니, 딱히.”
데바의 물음에 건조하게 답한 에단은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뭐, 어쨌든 여기라면 둘이서 느긋하게 대화를 할 수 있겠네.”
느긋하게 대화? 데바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무슨 대화를 말하는 거지. 너는 내게 복수하려던 게 아니었나.”
“그랬던 적도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복수보다 중요한 게 생겼거든. 뭔지 맞춰 볼래?”
“……저자인가.”
“정답.”
작게 웃은 에단이 데바의 어깨에 친근하게 팔꿈치를 올렸다.
“네게 협조해 줄게. 그 대신 은하를 조디악으로 만들어 줘.”
“……왜 내게 그런 부탁을 하는 거냐.”
“너랑 달리 내게는 인간을 별로 만들 만한 능력이 없잖아. 기껏해야 저 애에게 가호를 내리는 일만 가능하지. 하지만 그것도 안 돼. 이미 은하에게는 쌍아궁의 가호가 깃들어 있거든.”
짜증 나게도 말이야. 에단은 성가시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데바는 정면을 향해 선 채 스르륵 시선만 돌려 그런 에단의 낯빛을 살폈다.
“……저자를 조디악으로 삼아 네가 얻는 것이 있나?”
“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여 데바와 시선을 마주한 에단이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내 신부로 삼으려고.”
“……신부?”
“그래, 신부. 지금은 사라진 내 네뷸러를 복구한 다음 거기에 가둘 거야. 그러면 나만 그 애를 볼 수 있잖아?”
생각만 해도 즐겁다는 듯 에단의 미소가 진해졌다.
“네 네뷸러에 가두어 너만 볼 수 있게 한다면, 저자를 조디악으로 만들 필요도 없지 않은가.”
조디악은 데바에게 있어 충직한 신하이자 가족, 장기 말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지금 에단은 은하를 조디악으로 만든 다음 제가 독점하겠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은하처럼 우수한 인재를 기껏 조디악으로 만들었으나 막상 만날 수도 없고 필요할 때 사용할 수도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데바가 침묵하는 사이 가볍게 머리를 쓸어 넘긴 에단은 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보아하니 너도 꽤 궁지에 몰린 것 같은데. 내가 도와주면 너도 편하지 않겠어?”
사실이었다.
현재 이 채널과 네뷸러는 한창 동기화가 진행되고 있는 상태였다. 즉 데바는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마력을 끊임없이 소모한다는 소리였다.
더군다나 이미 조디악의 절반이 소멸했고, 제 네뷸러의 결계는 해제되기까지 했다. 그뿐인가. 매혹당한 얀의 급습, 그리고 화염을 쓰는 인간의 반격도 있었다.
이미 현 상황은 데바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최대한 출혈이 적은 상태로 이번 계획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태초의 별인 에단이 조력해 준다면 엄청난 전력이 될 것은 확실했다.
“내 조건을 받아 준다면 네가 겁도 없이 그 애의 얼굴을 만지려고 한 것도 용서해 줄 수도 있어. 어떡할래?”
데바는 달콤하게 속삭이는 에단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오랫동안 에단을 봐 온 데바이기에 알 수 있었다. 에단은 ‘은하’라는 저 인간을 정말로 특별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데바도 그러하듯 에단 역시 자신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를 먼지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은하는 그런 에단에게 처음으로 생긴 ‘특별한 타인’이었다.
그러나 은하를 신부로 삼겠다는 에단의 말은 아마도 진실일 것이다.
다만 문제는…… 그가 정말로 조력을 할 것인지. 바로 그것이었다.
“정말 내게 협력할 생각인가.”
“그렇다니까.”
“왜지?”
“너도 빨리 계획을 끝내고 싶고, 나도 원하는 게 있으니 상부상조지. 비록 뜻이 맞지 않아 충돌이 있었다고는 해도, 우린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태어난 형제 같은 사이잖아?”
……형제.
그 말에 데바의 시선이 에단에게 떨어져 허공으로 향했다. 복잡한 문양이 얽혀 있는 그의 눈동자에 일순 어떠한 희미한 감정이 스쳤다.
“……좋다.”
데바는 결국 에단의 조건을 승낙했다. 에단은 “잘한 선택이야.” 하며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갈까. 포털을 열어 줄게.”
포털(Portal)이란 ‘무아의 공간’에서 현실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에단이 스윽, 손짓하자 그들의 눈앞에 소용돌이 형태의 구멍이 나타났다. 붉고 잔잔한 스파크를 튀기는 그것은 게이트의 입구처럼 보이기도 했다.
“뭐 해? 들어가지 않고.”
에단은 어서 가라는 듯 데바를 떠밀었다. 데바는 가라앉은 눈으로 조금 더 포털을 응시하더니 이내 천천히 그곳을 향해 움직였다.
이윽고 포털 표면에 그의 왼손 끝자락이 살짝 닿은 순간.
파지지직─!
포털을 감싸고 있던 스파크가 강해지더니, 폭발하듯 번쩍거리는 빛이 데바의 왼손을 감쌌다. 이미 에단에 인해 한차례 꺾여 있던 왼손에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이 스쳤다.
데바는 포털에 닿았던 왼손을 빼내었다. 알 수 없는 강력한 힘에 의해 공격당한 왼손은 마치 다 타 버린 장작처럼 변해 이미 손의 형태를 잃었다.
“아까워라.”
쳇, 하고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작은 탄식이 들려온 것 같기도 했다.
우드득.
왼손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데바는 오른손을 들어 썩은 가지를 쳐 내듯 그것을 잘라 버렸다.
분명 제 손을 스스로 잘라 내 버리는 행위였는데도 불구하고, 데바의 얼굴은 믿기지 않을 만큼 고요하고 정적이었다.
“……에단.”
데바는 잘라 낸 자신의 왼손을 보란 듯이 에단에게 내밀었다.
“이 왼손은, 나의 마지막 믿음이었다.”
툭.
기괴하게 형태로 꺾이고 숯덩이처럼 타 버린 장작 같은 손이 바닥에 힘없이 떨어졌다. 데바는 제 발로 그것을 콱! 하고 밟아 뭉갰다.
조금 복잡한 눈빛을 띠었던 데바의 눈동자가 원래의 무기질적인 빛으로 돌아왔다. 저 왼손을 잘라 내면서, 그 안의 작은 감정마저 함께 잘라 낸 것처럼.
“믿음?”
데바의 말에 에단이 웃음을 터뜨렸다. 재미있다는 듯, 정말 기가 차다는 듯 배를 잡고 웃던 그가 어느 순간 뚝 하고 수도꼭지를 잠근 것처럼 웃음을 멈추었다.
숨 막히는 정적 속 에단은 웃음기 하나 없이 굳은 얼굴을 들었다.
핏빛으로 빛나는 두 눈동자. 가로로 긴 동공을 길게 찢으며 그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그런 게 있을 만한 사이던가? 우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