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 내가 살아 있는 한
(284/306)
284. 내가 살아 있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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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4. 내가 살아 있는 한
2023.05.11.
크르르…….
입에 물고 있던 데바의 팔을 뱉어 버린 사자궁 얀은 금방이라도 다시 데바에게 돌진할 것처럼 이빨을 드러내며 자세를 낮추었다.
바로 뒤에 은하가 서 있는데도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 마치 얀의 눈에는 데바만 보이는 것 같았다.
‘어째서?’
한창 마력을 쏟아 내며 사투를 벌이고 있던 은하는 눈앞에 펼쳐진 이색적인 광경에 비틀비틀 몸을 바로 세웠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데바를 공격하는 얀의 행동을 보고 두 눈을 의심합니다.]
노란 메시지창으로부터 루시의 당황스러움이 전달되었다.
루시는 사자궁 얀이야말로 충성심으로 따지자면 모든 조디악 중에 으뜸이라고 했다.
그런 얀이 지금 눈앞에서 데바의 팔을 물어뜯었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또다시 공격하려 들고 있었다.
한때 조디악이었던 루시가 보고도 믿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데바의 충신인 얀이 이럴 리가 없다며, 분명 어딘가에 홀린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합니다.]
‘어딘가에 홀렸다고……?’
은하의 미간이 살짝 좁아지는 순간,
크르르르!
얀이 제자리서 크게 앞발을 들었다가 쿵! 하고 바닥을 내리찍었다.
휘오오…….
얀에게로 마력이 밀집되면서, 놈을 중심으로 거친 바람이 몰아친다. 붉은 사자 갈기가 뱀의 혀처럼 움직이는 가운데, 은하의 코끝에 문득 낯선 듯 익숙한 향기가 와 닿았다.
그 향기를 맡자마자 은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은하는 홱, 하고 고개를 돌렸다. 데바의 뒤쪽에서 여전히 꿈쩍도 않고 쓰러져 있는 이준을 향해서였다.
‘─백이준.’
크르릉!
얀은 계속해서 데바를 공격했다. 엄청난 덩치에 믿을 수 없는 파괴력을 가진 놈의 공격에 천하의 데바조차 당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은하의 예상대로 이것이 이준의 계획이 맞다면, 그는 분명 특수 조건을 달성하면 발동되는 형식으로 매혹을 걸어 두었을 것이 틀림없다.
‘예상할 수 있는 조건은…….’
──중앙 탑이 불에 타면, 그쪽으로 가서 데바를 공격해라.
이준은 은하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은하 또한 이준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살아남을 수도 있었던 기회까지 던져 가며 모든 것을 은하에게 건 것이다.
데바를 무찌를 승산을.
인류의 존속을.
자신의 의지를.
불과 30여 년 전에는, 등을 떠밀어 주는 건 오롯이 은하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이준이 은하의 등을 떠밀어 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얀이 가진 파괴력은 데바에게도 견줄 수준이라고 했어.’
즉 그런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얀이 잠시나마 아군으로 돌아선 현재, 이것은 은하에게 있어 둘도 없을 기회였다.
은하는 양손을 동시에 바닥에 가져갔다.
고오오오……!
은하의 두 손바닥에서 엄청난 고온의 불길이 치솟았다. 불꽃을 머금은 땅에서 한 번 더 아지랑이가 올라오고, 몇 개의 검은 그림자가 또다시 생겨났다.
힐끗.
얀을 상대하고 있던 데바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저런 괴물 같은 사자를 상대하면서도 이쪽까지 확인할 겨를이 있다는 것은 놀라웠지만,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콰직!
얀이 데바의 왼쪽 어깨를 문 그때였다.
파앗!
아지랑이에서 피어난 ‘흑염의 프린세스’들이 동시에 공중으로 도약했고, 그중에 섞여 있던 은하는 팔을 접었다.
그리고 얀에게 속박되어 있던 데바의 목뒤를 팔꿈치로 크게 격타했다.
뻐어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놈의 목이 반쯤 꺾였다.
“…….”
“…….”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새하얗고 얇은 무언가가 하늘하늘 떨어져 내린다. 데바가 두르고 있던 흰 로브의 천 조각이었다.
은하의 공격으로 목이 꺾이는 순간에도 데바의 어깨를 물고 놓지 않은 얀 때문에 입고 있던 로브 일부가 그대로 찢어져 버린 듯했다.
새하얀 로브의 천 조각이 나풀나풀 공중을 날다 툭, 발등 옆에 떨어졌다. 오른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고 있던 데바가 스르륵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을 깊이 가리고 있던 로브는 이제 없었다.
“……!”
데바의 맨얼굴을 처음으로 마주한 순간 은하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지금까지 은하가 보아 왔던 조디악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운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사자궁 얀처럼 짐승 형태를 한 자도 있었지만, 인간의 외형을 한 조디악의 경우 대부분 현실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신 외모를 가지고 있었던 것.
그러나 조디악의 주인, 데바는…….
‘흉측해.’
그 말 외로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부패한 땅처럼도 보이는 놈의 피부는 군데군데가 갈라진 데다 마치 산호 표면처럼 울퉁불퉁했고, 두 눈의 흰자위는 썩은 것처럼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로브를 쓰고 있었을 때도 언뜻 보았던, 별자리 문양이 새겨진 홍채는 이렇게 직접 마주하니 더욱더 기묘했다.
“──성가신 것.”
데바의 얼굴을 보고 은하가 잠깐 굳어 있던 가운데, 불현듯 데바가 입을 열었다.
놈은 자신의 왼쪽 어깨를 물고 있던 얀의 얼굴을 오른손으로 감싸 쥐었다.
‘빛의 창?’
셰이핌에게 그러했듯 또 똑같은 방법으로 같은 조디악을 소멸시키려는 속셈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파아아앗─!
놈의 손으로부터 황금 빛이 터져 나오더니, 놈의 어깨를 물고 있던 얀이 스르륵…… 아주 천천히 턱에서 힘을 빼기 시작했다.
이윽고 빛이 잠잠해졌을 때, 얀은 쿵! 하고 큰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가루가 되어 사라지지는 않았으니 아마 죽인 것이 아니라 기절시킨 듯 보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슈우우우…….
바닥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있던 이준이 돌연 알 수 없는 힘으로 공중에 부웅 뜨더니 데바 가까이로 이동했다.
“……! 백이준!”
은하가 이준의 이름을 외치는 것과 동시에 밝은 빛이 번쩍 일었다.
푸욱!
허공에서 빛의 창이 떨어져 이준의 등에 꽂혔다. 방금 전 은하가 당했던 공격과는 사뭇 달랐다.
창에 찔린 은하는 출혈이 날 만한 외상은 입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이준은 달랐다.
푸욱! 푸욱!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빛의 창. 그것이 등에 꽂힐 때마다, 의지가 깃들지 않은 이준의 신체는 이리저리 힘없이 흔들리고 꺾였다.
아직은 따듯한 피가 이준의 신체 아래로 물감처럼 서서히 넓게 퍼져 갔다.
“그만둬.”
으득, 이를 간 은하가 터질 듯 두 주먹을 쥐었다. 이준에게 공격을 퍼붓고 있던 데바가 무심히 시선을 들었다.
“이자를 살리고 나와 함께 갈 텐가?”
“…….”
“아직도 이것이 단순한 말장난 같은가.”
푸욱!
빛의 창이 다시 한번 꽂혔다.
“나는 바깥에 있는 너의 사람들, 누구라도 이렇게 만들 수 있다.”
푸욱! 푸욱!
이준의 신체에서 퍼져 나온 붉은 피가 식은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고, 이윽고 은하의 구두 굽까지 닿았다.
“하지만 너라면 이자를, 그 밖의 모두를 살릴 수 있겠지. 네가 나를 선택하고 따라오기만 한다면.”
쉬이익…….
또다시 생성된 빛의 창이 이준의 등을 겨누었다.
“어떻게 할 텐가.”
은하의 대답 여하에 따라 그 창은 그대로 사라지거나 이준의 등에 꽂힐 것이다. 이 이상 피를 흘린다면 목숨이 위험할 테다.
‘누구든 죽일 수 있다고?’
은하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데바는 강하다. 자신의 의지로, 혹은 기분에 따라 누구의 목숨이든 누구의 세계든 파괴할 수 있는 힘을 확실히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바깥에 있는 자들의 목숨은 이미 내가 맡았어.”
작게 중얼거린 은하가 고개를 들어 데바와 시선을 마주했다. 황금빛이 일렁이는 두 눈동자가 검날처럼 놈에게 꽂혔다.
“그러니 이곳에 네가 멋대로 할 수 있는 목숨은 단 하나도 없다.”
─내가 살아 있는 한은, 절대.
“……!”
돌연 데바의 눈이 커졌다. 은하의 주변으로 검은 기운이 먹구름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양산을 부수면서 지워졌던 가호…… 별의 기운이 다시금 짙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권능이 귀속되었습니다.]
[칭호 ‘흑염의 프린세스’가 재부여됩니다.]
[고유 능력 진화에 성공했습니다.]
[화염(火焰) ▶ 흑염(黑焰)]
파아아앗!
검은 불길이 은하의 사방으로 쏜살같이 뻗어 나갔다.
“가호가……!”
뱀처럼 뻗어 나간 흑염은 그를 집어삼켰다.
빠르다.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 방심하고 있던 데바는 미처 그것을 피하지 못했고, 놈의 로브에 닿은 흑염은 그의 신체 전체를 태워 버릴 듯 집요하게 들러붙었다.
데바는 성가신 듯 흑염을 향해 손을 뻗었다. 흑염 자체를 소멸시킬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흑염은 그의 손까지 옮겨 갔다.
“크윽……!”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온몸을 비트는 놈을 향해 은하가 두 손바닥을 펼쳐 들었다.
‘마지막 기회야.’
슈우우우……!
검은 불꽃이 그녀의 두 손아귀에 빠르게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완성되기도 전에, 데바는 양손으로 제게 달라붙은 흑염을 움켜쥐었다.
“……!”
파아아앗!
돌연 쏟아지는 눈부신 빛에 은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윽고 빛이 그쳤을 때,
“……양산이 없어도 가호를 사용할 수 있을 줄이야.”
손이 반쯤 까맣게 탄 데바가 훌쩍 거리를 좁혀 은하 앞에 나타났다.
“네 안에 ‘그 녀석’이 있구나.”
“……컥!”
은하가 반격하기도 전에 데바가 오른손을 뻗어 은하의 목을 움켜쥐었다. 타다 만 장작과 같은 손이었지만 그 힘은 예사롭지 않았다.
“깨끗하게 보존된 상태로 데리고 가려고 했지만, 어차피 별이 되면 새 생명을 받게 될 몸.”
데바는 나머지 한 손을 들어 서서히 은하의 눈앞에 가져왔다.
“눈 정도는 거두어도 되겠지.”
흑염에 의해 살갗이 녹아 버린 손이 은하의 눈에 닿는 순간, 그녀는 반사적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우드득!
놈의 팔목이 살벌한 뼈 소리를 내며 꺾였다. 은하가 한 짓이 아니었다.
은하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위험하잖아.”
후욱, 하고 귓가에 바람이 내려앉음과 동시에 졸림이 섞인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에단……!”
불청객의 정체를 깨달은 데바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휘익!
에단은 은하를 안고 데바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탓, 하고 착지한 에단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내려 주었다. 은하는 눈앞에 선 에단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멍하니 입을 열었다.
“에단, 너…….”
“머리가 엉망이네.”
에단은 은하의 머리 위에 가볍게 툭 하고 가볍게 손을 얹었다.
“그래도 예쁘다.”
그리 말한 에단은 힐끗 뒤로 돌아 데바를 바라보았다. 달콤한 향기를 머금은 듯한 부드러운 분홍색 머리카락 사이로, 붉은 두 눈이 초승달 형태로 곱게 접혔다.
“그리고 넌, 여전히 못생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