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6. 만년설옥(萬年雪獄) (276/306)


#276. 만년설옥(萬年雪獄)
2023.05.03.


재앙이 시작되기 몇 주 전의 일이었다. 시우는 데바를 상대하기 전 훈련을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던 은하에게 늑대 길드 본부 지하에 있는 비밀 훈련장을 대여해 주었다.

그곳에서 은하가 잠자는 시간까지 아껴 가며 훈련을 이어 가는 동안, 사실 시우 역시 없는 시간을 쥐어짜 누구도 모르게 새 필살기를 연마했다.

“그런데 대표님, 특별한 소재로 마감 처리된 훈련장이 아니라 이런 아무것도 없는 장소를 찾으신 건 어째서입니까?”

주차를 마친 제휘가 시우를 뒤따라오며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시우가 찾은 곳은 서울에서도 꽤 멀리 떨어진 곳으로, 한때 축구장으로 쓰였던 장소였다. 지금은 폐쇄되어 아무도 찾지 않는 건조한 평야가 된 지 오래였지만.

“이곳은 차 헌터님이 계신 비밀 훈련장과는 다르게 모의 전투도 힘들고 능력치를 체크할 만한 장치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데요…….”

“그런 건 필요 없어.”

시우는 축구장 가운데에 섰다.

그가 하려는 것은 전투력이나 체력을 키우는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조디악의 수장인 데바는 인간이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적이 아니야.”

“하지만 우리에겐 차 헌터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분은 세계 최강이잖아요. 이번에도 반드시 승리하고 돌아오실 거라고 믿습니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시우도 인정했다. 조디악의 가호를 받고 있을 정도로 특별한 은하, 그리고…… 제휘는 모르겠지만 한때 조디악이었던 에단은 어쩌면 데바를 쓰러트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선배가 반드시 데바와 조우하리라고 어떻게 단정할 수가 있지?”

“……아.”

“제주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는 만큼, 많은 가능성에 대해 미리 생각해 둬야 할 것 아니야.”

시우의 말에 제휘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시우는 가볍게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덧붙였다.

“백색 성 내부에는 놈이 위기를 대비하기 위해 특수한 장치를 마련해 두었을 수도 있어. 이를테면, 선배가 처음부터 놈을 상대하지 못하게끔 설계되어 있다든가.”

“그, 그런…….”

“그게 아니어도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많지. 모종의 이유로 선배가 놈을 조우하지 못했을 때, 혹은 놈과 맞닥뜨렸으나 전투 불능 상태에 빠졌을 때.”

푸른 눈을 내리깐 시우는 자신의 손바닥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덧붙였다.

“그때는 내 차례니까.”

“그, 그런 일은 오지 않을 겁니다. 만일 그렇다 하더라도 대표님이라면 충분히 해내실 수 있을 테고요.”

안간힘을 다한 제휘의 희망론에 시우가 피식 마른 웃음을 흘렸다.

“너는 좋겠군. 편한 뇌를 가져서.”

“아, 아니, 저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

“냉정하게 따져 봤을 때 내가 데바를 이길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

“그, 그럴 리가요. 대표님답지 않은 말씀입니다. 대표님께서는 대한민국 최대 길드 늑대의 주인이신 데다 S급 헌터이시고, 하물며 헤드 헌터 3위시잖아요. 싸워 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거죠!”

“아니, 알아.”

시우는 손바닥을 조용히 말아 쥐었다.

프라임 헌터이자 1세대 출신 S급 헌터인 마에스트로가 놈의 손에 죽었다. 게다가 그 자리에 있었던 선배는 아무런 수확도 없이 돌아왔고. 시우가 아는 한, 최강의 헌터인 그녀가.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허황된 희망도 부푼 소망도 아니다.

‘놈을 저지할 수 있는 1%의 가능성.’

오로지 그뿐이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놈을 쓰러트릴 수 없다면…….

‘봉인하면 그만일 뿐.’

녹지 않는 얼음에 가두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영영 그곳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 * *

벤달기프는 하늘을 예우하듯 검은 낫을 높게 쳐들었다.

“왕, 께…… 충성, 을…….”

슈우우……!

올곧게 치켜세워진 검은 낫이 바람을 갈라냈다. 풍차처럼 빙글빙글, 그러나 빠르게 돌아가는 낫에서 초승달 형태의 검기(劍氣)가 형체화되어 시우에게 몰아쳤다.

쉬에엑!

저 검기에 살짝 스치기만 해도 뼈가 숭덩 잘려 나갈 것이다.

두 발로 땅을 박차고 튀어 오른 시우는 제게 달려드는 수많은 검기를 모조리 회피했다. 그러나.

“왕, 국에…… 심장을…….”

“……!!”

모든 회피를 마치고 바닥에 착지하였을 때, 그곳에는 이미 벤달기프가 노란 눈을 희번덕이며 시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놈이 아가리를 쩍 벌리자 상어처럼 날카롭고 무수한 이빨이 드러났다.

덥석!

“으윽!”

피하고 자시고도 없었다. 놈은 망설이지 않고 시우의 왼쪽 어깨를 물어뜯었다.

사방으로 피가 튀며 아찔한 고통이 삽시간에 전신으로 쭈뼛 퍼져 나간다. 시우는 순간적으로 멀어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오른손에 마력을 응축했다.

휘익, 푹!!

그리고 손아귀에 만들어 낸 얼음창으로, 어깨를 물고 있는 놈의 이마를 힘껏 찔렀다.

끄륵, 그르륵…….

벤달기프가 괴상한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리는 순간 시우는 왼쪽 어깨를 크게 털어 내며 놈의 이빨로부터 벗어났다.

“큭…….”

놈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동안, 시우 역시 왼쪽 어깨를 감싸고 숨을 골랐다.

상처를 덮은 오른손이 축축하고 뜨뜻했다. 손가락 사이로 비집고 나온 붉은 피가 기어코 바닥에 뚝뚝 떨어져 내린다. 살점째로 뜯겨 나갔으니 고통과 출혈이 상당한 것도 당연했다.

‘이 정도로 끝났으니 다행인 건가.’

염소와 인간을 섞은 반인반수의 모습에서 끔찍한 악마의 모습으로 바뀌며, 놈의 몸 곳곳에는 노란 염소 눈이 돋아나 있었다. 저 눈들은 장식이 아니라 모두 제 기능을 하는 듯 보였다. 즉 놈에게는 사각지대가 없다는 소리였다.

그렇듯 불리한 와중에 놈이 몸소 다가와 어깨를 물어뜯었으니 시우로서는 오히려 기회였다. 어깨를 내주는 대신 놈에게는 더 큰 규모의 부상을 입힐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

시우는 보고 말았다. 방금 전 얼음 창에 의해 관통된 놈의 이마에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상처 부위가 빠르게 재생되는 것을.

‘언데드(Undead)?’

아무래도 놈은, 기사를 먹어 치우면서 언데드형으로 진화한 듯했다.

스켈레톤이나 밴시 등 언데드형 몬스터를 수도 없이 상대해 온 시우는 그들을 처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체내에 심장 대신 자리한 핵을 부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게이트에 등장하는 몬스터에 한해서다. 저런 괴물 같은 놈을 상대로 핵을 부수는 일이 가능한가?

한편, 그보다 더욱 시우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방금 그 냄새는…….’

한쪽 어깨를 감싸 쥐고 있던 시우는 콧잔등을 슬쩍 찌푸렸다.

예리한 칼날처럼 한껏 예민해진 후각을 통해 전달되는 달콤하고도 진한 향기.

처음에는 조디악 특유의 체취라고 생각했고, 다음에는 조금 떨어진 곳에 쏟아진 저 홍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방금 전 벤달기프가 가까이 다가와 어깨를 물어뜯었을 때 시우는 확신했다.

씁쓸하면서도 묵직한 우드 베이스에 달달하고 포근한 머스크 향이 한 방울 섞인 듯한 이 냄새는,

‘향수?’

아니, 조금 다르다.

‘매혹’ 계열의 고유 능력을 가진 자들에게서 보통 이런 향이 났다. 시우는 이런 종류의 체취를 머리가 아플 만큼 뿜어 대는 인물에 대해 알고 있었다.

‘마에스트로.’

하지만 이상했다. 어째서 벤달기프에게 마에스트로의 체취가? 그는 죽은 것이 아니었나?

“충, 성을…….”

츠츠츳…….

놈의 주변으로 방대한 마력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무슨 짓을 할 속셈인지는 몰라도 강력한 한 방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은 피부로도 느껴졌다.

‘어떡하지?’

왼쪽 팔로부터 느껴지는 극심한 통증 탓에 자꾸 아득해져 가는 정신을 애써 부여잡으며 사고하던 그때, 벤달기프가 내뱉은 한 마디에 시우의 눈이 번쩍 뜨였다.

“왕, 국…… 에…….”

왕국.

벤달기프는 아까부터 ‘왕’이니 ‘왕국’이니 하는 단어를 반복하여 뱉고 있었다. 처음에는 놈이 칭하는 ‘왕’이 데바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왕국’이란 무엇이지? 네뷸러를 뜻하는 것인가?

‘아니, 아닐지도 몰라.’

통증에 무뎌져 가던 시우의 사고가 급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전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저는 왕국과 당신을 지키는 기사이지 않습니까.’

─그거다.

벤달기프와의 대화를 떠올리던 시우는 번뜩 깨달았다.

놈은 지금 자신을 ‘기사’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이 환각인지, 세뇌인지, 그도 아니면 지독한 착각인지는 모른다. 어쩌면 방금 전 시우가 맡았던 그 기묘한 향기가 원인일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벤달기프가 현재 현실과 허상을 헷갈려 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승기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그 틈을 노려야 한다.

현실과 허상을 혼동하는 자에게 가장 효과적인 충격 요법은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일.

……역시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시우는 감각이 없는 왼손 대신 오른손을 뻗어 허공에 가져갔다.

띠링!

[12신수 ‘깊은 밤을 수호하는 개’가 지금 몸으로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무리라며 당신을 저지합니다.]

충성스러운 시우의 신수는 그의 스킬 사용을 말릴 생각인 듯했다.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스킬을 사용하려면 시우의 온 마력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것도, 그 후 시우가 어떻게 될지도.

‘할 수 있을까.’

덜컥, 시우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떨려 오는 손가락 끝. 그 너머로 검은 마력을 모으고 있는 괴물의 모습이 보인다.

스르륵, 시우가 손과 함께 한껏 들어 올렸던 턱이 온몸에서 마력이 빠져나가는 탈력감에 조금씩 아래로 추락하려던 그때였다.

‘고개 들어.’

“……!”

바람을 타고 온 은하의 목소리에 시우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너는 내 계약 상대야. 그리고 낯선 현대에서 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존재기도 하지.’

‘그러니 네가 머리를 숙일 필요는 없어.’

──내게도, 누구에게도.

[12신수 ‘깊은 밤을 수호하는 개’가 지금 그것은 무모한 짓이라며, 강제 현신을 시도합니다.]

“시끄, 러워.”

새파란 안광을 빛내며 시우는 떨어졌던 턱을 치켜들었다.

파지직!

시우의 손가락 끝에 더 빠르게 한기가 모여든다.

그래, 망설일 필요는 없다. 백색 성에 진입하는 순간 각오는 이미 다져진 것이었다. 다행히도 현재 시우는 체력 50%를 내놓은 대가로 마력이 평소보다 50%나 더 증가한 상태.

‘충분해.’

슈르르르…….

대기 중의 수분이 그의 오른손으로 몰려들며, 대량의 얼음을 생성할 준비를 단숨에 끝냈다.

놈이 마력을 모으고 있는 지금이 유일무이한 기회. 실패는 용납되지 않는다.

파직, 파지직…….

시우의 두 발을 중심으로 냉기가 뻗어 나가 눈 깜짝할 사이 그들이 서 있는 곳이 꽁꽁 언 빙판이 되었다. 잠시 땅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챙, 채쟁 채애앵─!!

놈에게서 뻗어져 나온 검은 스파크와 시우의 만들어 낸 새하얀 한기가 공중에서 사납게 충돌했다.

결과는…….

“만년설옥(萬年雪獄).”

파아아앗!

빙판 위로 높고 투명한 얼음벽이 사정없이 치솟았다.

사방을 둘러싼 얼음은 땅을 덮고 하늘을 가리는, 얼음 계열 스킬의 극의 ‘만년설옥’.

영원히 녹지 않는 얼음에 대상을 가둘 수 있는 궁극 스킬이었다.

끄륵, 끄르르륵……!

삽시간에 풍경이 변한 것을 눈치챈 벤달기프는 쿵! 쿵! 얼음벽을 깨부술 듯 두드리기 시작했다.

“소용없다. 넌 여기서 못 나가.”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얼음은 거울처럼 벤달기프와 시우의 모습을 둘러쌌다. 시우가 놈에게로 한 발자국 다가가자 저벅, 발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영원히 녹지 않는다니, 정말 대단합니다! 역시 대표님이십니다!’

이 스킬을 처음 본 제휘는 그렇게 찬사했지만, 당시 시우는 그에게 굳이 하지 않았던 말이 있었다.

─사실 영원히 녹지 않은 얼음 같은 것은 없다는 것.

이 얼음이 영원히 녹지 않기 위해서는 시우도 함께 그 속에 갇혀야만 했다. 죽기 직전…… 아니, 죽고 나서도 자신의 마력을 끊임없이 주입하여 영원히 대상을 봉인하는 원리였다.

이건 시우의 온 마력, 그리고 목숨까지도 버려야만 하는 스킬이었다.

‘원래는 유사시를 대비하여 데바에게 이 스킬을 사용할 생각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 여기서 놈을 해치우는 것이 우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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