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5. 망가진 기사의 충심 (275/306)


#275. 망가진 기사의 충심
2023.05.02.


한 떠돌이 검사가 있었다.

생활은 부유하지 못했지만 그에게는 무엇보다 값진 것이 두 개나 있었다. 하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훌륭한 검술 실력, 또 하나는 자신의 검으로 이 나라의 백성들과 왕가를 수호하겠다는 꿈이었다.

그는 곧 뛰어난 검술 실력을 바탕으로 정식 기사가 되는 것에 성공했다.

그러나 기사가 되어 목도한 현실은 그가 꿈꿔 왔던 것과는 달랐다. 백성들을 돌보고 나라의 번영을 위해 힘쓸 줄로 알았던 왕족과 관료는 하나같이 권력을 휘두르며 개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했고, 기사는 그들의 졸개 노릇일 뿐이었다.

“놀랄 것까지는 없잖아. 옆 나라라고 다를까 봐? 원래 왕족들이야 다 그런 거지.”

동료들은 깊게 생각할 필요 없다며 그의 어깨를 툭툭 다독였다. 기사는 그런 동료의 팔을 검집으로 후려쳤다.

“악! 무슨 짓이야!”

“말조심하시오.”

기사는 검집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주군을 모욕한다면 동료라고 해도 용서하지 않겠소.”

선악 따위 애초부터 그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장황한 꿈과 검 한 자루뿐이었던 자신에게 기꺼이 있을 곳을 마련해 주신 왕.

자신은 그분께 충성을 맹세했다.

‘나는, 왕을 지키는 기사다.’

한 기사가 주군을 욕한 동료를 묵사발 냈다는 소문은 작은 왕국에서 발 빠르게 퍼졌고, 그 소문은 머지않아 왕의 귀까지도 닿았다.

“그대로군.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그의 충직함을 높게 산 왕은 그를 직접 불러 근위단장으로 임명했다.

처음에는 소문만 믿고 슬금슬금 피해 다니던 다른 기사들도 시간이 흐르며 그를 따르게 되었다. 근위단장이라는 자리 덕분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탁월한 검술 실력과 우직한 성품, 그리고 왕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소문 덕택이 컸다.

“단장님, 한 수 부탁드립니다!”

“오늘도 훈련이십니까? 따르겠습니다!”

“역시 단장님이십니다.”

단장님, 단장님……. 기사단원들은 어느새 한 명도 빠짐없이 그를 우러르며 따랐다.

그는 더 이상 떠돌이가 아니었다. 전쟁고아도, 무일푼 손님도, 능력은 없으면서 말만 번지르르한 머저리 약혼자도 아니었다.
평화로운 나날은 꿈처럼 이어졌다.

“기사단원 중에 반역자가 있다고 들었다.”

그 명령을 받기 전까지는.

“짐에게 그대의 충성을 증명해 다오.”

기사는 믿을 수 없었다. 단원 중에 반역을 꾀한 자가 있다니, 그럴 리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왕국의 기사로서, 또한 근위단장으로서 왕께 충성을 맹세한 그는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

반역을 꾀하였든 그렇지 않았든, 왕이 죽이라면 죽여야 했다.

‘그것이 주군에게 내 충성을 보일 수 있는 유일한 증명.’

기사는 검을 쥐었다. 다음 날부터 그는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기사단원들을 차례로 한 명씩 처리하기 시작했다.

“다, 단장…… 님……. 저는…… 아닙, 니다…… 정말, 로…… 아니에…… 크윽.”

“사, 살려, 주세…….”

예상대로 자신이 반역자라고 밝히는 단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럼에도 기사는 멈추지 않았다.

“미안하다.”

촤악!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촤아악!

기사의 영롱하고 예리했던 칼날은 피에 절어 녹이 슬어 갔다.

이자가 아니라면 그자를, 그자가 아니라면 저자를.

왕이 그만해도 좋다고 명을 내릴 때까지 기사는 멈추지 않았다.

300명 남짓이었던 기사단의 인원이 절반이 될 때까지도.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함락하라!”

뿌우우우…….

묵직한 뿔피리 소리와 함께 이웃 나라의 침략이 시작되었다.

“전하! 침공입니다!”

기사는 가장 먼저 왕을 찾았다. 그러나 왕좌에 앉아 있어야 할 왕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왕께서는 대피하셨습니다!”

“왕께서…… 아니, 그자가 우리를, 왕국을 버린 거야!”

기사를 포함한 왕성 관리들은 혼란에 빠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들을 통솔하고 지휘해야 할 왕이 그곳에 없었을뿐더러, 가장 확실한 병력이었던 왕실 근위대는 반절이 된 상황이었으니까.

“그럴 리 없소.”

기사는 빈 왕좌를 응시하며 고개를 저었다.

“왕께서 그럴 리 없소!”

이후 그는 검을 들고 적군 한복판에 뛰어들었다. 혼자서 수십, 수백의 목을 베며 검뿐만 아니라 그의 갑옷도, 머리카락도, 얼굴도 피에 젖어 들어갔다.

“왕께 충성을! 왕국에 심장을!”

와아아아…….

그러자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던 기사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단장님을 따르라!”

“이 한목숨 바쳐 지원하겠습니다, 단장님!”

그가 벌였던 끔찍한 일을 기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원들은 그를 따랐다.

그러나 왕국의 패배는 이미 정해진 일이었다.

결국 힘을 다한 기사는 적장의 눈앞에서 지푸라기 인형처럼 풀썩 쓰러졌다. 말 위에 올라탄 채 그를 벌레 보듯 내려다보던 적장은 비웃음을 삼키지 않았다.

“어리석군. 그 정도 실력이라면 혼자 충분히 도망칠 수 있었을 텐데.”

“…….”

스릉, 적장이 칼을 빼 들었다.

당장 목이 잘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기사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주변을 확인했다.

눈을 감지도 못한 채 땅을 구르는 동료들의 머리, 산처럼 쌓인 시체, 그 위에 보란 듯이 꽂혀 있는 적국의 국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후회하는가.”

적장이 물었다.

‘후회하느냐고?’

기사는 대답 대신 흐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조금 더 멀리 시선을 던져, 불바다가 되어 함락되어 가는 성의 모습을 동공 깊숙이 새기듯 눈에 담았다.

“……입, 니다.”

기사는 피딱지가 말라붙은 입술을 느릿하게 움직였다.

“이것이…… 나, 의, 충…… 성…….”

“하.”

더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적장이 높이 검을 쳐들었다.

“보기 드물 정도로 멍청한 사내로군.”

그때였다. 적장의 검이 기사의 목에 닿기 바로 직전, 그 찰나의 순간에 변화가 일어났다.

쿠구구구!

순식간에 밤이 찾아오기라도 한 듯 검게 물든 하늘이 반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띠링, 띠링, 띠링…….

눈앞에 알아볼 수 없는 문자가 겹겹이 떠오르는가 싶더니, 기사의 눈앞에 눈부신 황금 빛으로 에워싸인 한 남자가 나타났다.

“웬 놈이냐!”

기사에게 검을 겨누고 있던 적장은 정체불명의 남자를 향해 검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우드득.

그리고 다음 순간, 적장의 목은 남자의 손아귀에 살벌한 소리를 내며 꺾여 버렸다.

툭……. 이미 시체의 눈을 하고 있는 기사의 코앞에 적장의 목이 빈 술통처럼 힘없이 떨어졌다. 기사는 공허한 눈을 들어 올렸다.

“……왕, 이시여.”

그때, 기사가 왜 남자를 ‘왕’이라 불렀는지는 스스로도 모르는 일이었다.

적장의 목을 단숨에 비틀어 버린 그 정체불명의 남자는 요요한 안광을 머금은 채 고요히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보아 왔던 채널을 모두 합쳐도 가장 어리석은 아이구나.”

채널……?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에 기사의 눈빛이 묘해졌다.

남자는 멍한 얼굴을 한 기사에게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 너로 정해야겠다.”

찬란한 황금 빛이 햇살처럼 뻗어 나와 기사를 감쌌다. 피를 흘리고 있던 몸 곳곳의 상처가 씻은 듯이 사라지고, 몽롱했던 정신이 점차 맑아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기사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를 온전히 응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보았다.

“아…….”

남자의 홍채 가운데에는 동공 대신 기묘한 별자리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나와 가자, 아이야.”

어떤 동물에게서도 본 적 없는 신비롭고도 불가사의한 눈동자에 시선이 빼앗긴 기사를 향해 남자가 다시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너의 왕이 되겠다.”

활활 타올라 까만 재로 변해 가는 왕성도, 정신이 어질해질 만큼 진한 피 냄새도, 아득한 곳에서 끊이지 않는 비명도 더는 기사에게 닿지 않았다.

기사는 제게 뻗어진 손을 향해 느릿하게 팔을 뻗었다.

“나의…… 왕.”

그것이 데바와의,

두 번째 주군과의 첫 만남이었다.

* * *

끄르륵…….

돌연 벤달기프는 목을 긁어내는 듯한 괴이한 소리를 내며 목 관절을 두득두득 꺾었다. 그러면서도 허겁지겁 자신의 기사를 갑옷째로 게걸스럽게 씹어 삼켰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이빨이기에…… 아니, 그것보다 시우는 놈의 행동 원리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이 만들어 낸 기사를 스스로 먹어 버리다니.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시우는 곧 그 이유에 대해 알게 되었다.

‘녀석의 모습이…….’

──변하고 있다.

아니, 모습뿐만이 아니었다.

벤달기프가 무기로 사용하고 있던 지팡이 형태의 검집이 어느새 거대한 낫으로 바뀌어 있었다.

슈우우…….

어디선가 피어난 검은 연기가 그를 휘감았다. 이윽고 연기가 머물렀다 사라진 곳에는 이전과는 다른 무언가가 생겨나 있었다.

와그작, 와그작…….

벤달기프는 주변의 얼어붙은 기사들을 굶주린 맹수인 양 끊임없이 먹어 치웠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그 수를 더하면 더할수록 벤달기프의 육체가 점차 거대하게 변해 갔다. 빼빼 마른 손과 발에 복부만 불룩하게 튀어나온 체형으로.

기이할지언정 온화한 빛을 띠고 있던 두 눈은 섬뜩하고 포악하게 변했다. 지금까지 시우와 전투하며 입었던 상처들은 어느덧 모두 회복되었을 뿐 아니라 어깨나 가슴팍, 이마, 뺨, 손바닥 등 신체 곳곳에 염소의 눈이 씨앗처럼 돋아났다.

반인반수의 모습을 하고 있던 벤달기프가 지금에 이르러서는 악마에 가까운 외형이 된 것이다.

크르릉…….

[12신수 ‘깊은 밤을 수호하는 개’가 녀석은 포식 행위로 힘을 흡수하고 있는 것이라며 이빨을 드러냅니다.]

시우의 신수는 동족 포식만큼 야만적이고 무식한 행위는 또 없다며 벤달기프의 행위에 대해 강한 분노를 표했다.

개의 조상은 늑대라고 알려져 있다. 늑대는 질서 있고 구조적인 무리 생활을 하는 동물이었다.

그러니 시우의 신수 ‘깊은 밤을 수호하는 개’가 동족 포식을 해 대는 벤달기프를 보고 경멸감을 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시우의 경우 신수와는 달리 벤달기프의 행위 자체에 분노할 이유는 없었다.

반은 인간 모습을 한 괴물이 인간 모습을 한 소환체를 씹어 먹고 있으니 동족 포식과 비슷하게 보일 수는 있지만…….

‘애초에 저 녀석은 자신이 마력으로 만든 결과물을 다시 흡수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잠자코 그것을 지켜보고 있을 생각 또한 없었다.

‘아마도 놈의 전투력은 기존보다 두 배, 아니 세 배 이상 증가했겠지.’

원래라면 놈을 해치운 뒤, 은하를 쫓아갈 생각을 하고 있던 그였지만…….

‘아무래도 그건 힘들 것 같군.’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당장에 벤달기프를 쓰러트릴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두려워서 반쯤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많은 적을 상대해 보았고 그만큼 목숨을 걸어 본 경험 또한 무수했기에 할 수 있는, 치밀하리만치 정확한 예상이었다.

“…….”

중앙 탑을 한번 눈에 담은 시우는 이번에는 조금 더 고개를 들어 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현재까지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을 보아하니 쌍어궁의 결계를 해제하러 간 아연 쪽도 아직 고전하고 있는 듯했다. 민주 역시 사자궁의 시선을 끌며 정신을 잃은 헤드 헌터 둘을 감싸고 있을 테고, 탑으로 앞서 진입한 선배는 지금쯤 데바를 찾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

시우는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천천히 벗으며 고요히 숨을 내뱉었다.

공기 중에 떠도는 한기, 그리고 수분이 그에게로 몰려들면서 검푸른 그의 머리카락이 서서히 백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12신수 ‘깊은 밤을 수호하는 개’가 크게 울부짖습니다.]

아우우우─

어디선가 늑대가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다.

각오로 물든 시우의 푸른 눈동자가 서슬 퍼런 안광을 품으며 벤달기프에게 향했다.

지금 자신이 해야 하는 일. 그것은 여기서 이 녀석을 처치하고 길을 뚫는 일이었다.

[체력을 50% 소모하여 마력 총량이 50% 증대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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