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2. 저마다의 싸움 (272/306)


#272. 저마다의 싸움
2023.04.29.


‘성공…… 인가?’

눈부신 빛이 전신을 휘감은 탓에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시우는 눈을 반복해서 깜빡이며 뿌옇게 번진 시야를 되돌렸다.

“……선배?”

뒤늦게 은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후각에 신경을 집중하자 공기 중에 은은하게 남아 있는 그녀의 체취가 느껴졌다. 그렇다면 은하 역시 시우와 함께 이곳으로 넘어온 것은 거의 확실했다.

‘시간 차가 있었던 건가?’

시우는 우선 천천히 걸음을 옮겨 보기로 했다.

얼핏 보아도 중앙 탑이 아까보다 훨씬 더 가까워진 것이 보였다. 아마도 마법진을 타고 이동하면서 탑을 중심으로 불고 있던 위협적인 칼바람의 내부까지 도달한 듯했다.

은하의 체취를 쫓아 움직이고 있던 시우는 마침내 결론지었다.

‘아마도 선배라면…….’

중앙 탑 안으로 곧장 진입했을 것이다. 그 증거로 그녀의 체취는 여기서부터 쭉 정면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시우가 조금 더 속도를 높여 탑의 입구로 향하려던 그때였다.

쿠구구구─

땅이 진동하는가 싶더니 검은 하늘에 번개처럼 흰 실금이 콰르릉 소리와 함께 번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놀란 시우는 번쩍 시선을 들어 주변을 확인했다.

‘중앙 탑이…….’

탑 꼭대기에 매달리듯 걸쳐 있던 빛이 돌연 사방으로 뻗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저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나쁜 예감이 들었다.

‘설마 눈치챈 건가?’

사자자리가 지키고 있던 기둥이 부서진 것을 깨달은 데바가 일을 서두르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서둘러야 했다.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기 전에 1초라도 빨리 데바를 저지해야만 한다.

시우는 가속을 붙여 최대한 빠르게 탑 근처로 이동했다.

탑이 가까워질수록 마치 짙은 안개가 깔린 듯 어둠이 깊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탑의 입구까지 도달했을 때,

‘누군가 있다.’

시우는 급브레이크를 밟듯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무의식적으로 기척을 죽인 그는 주변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한껏 예민해진 후각을 통해 가까운 곳에서 달콤한 향기가 전해져 온다. 농도가 진한 벌꿀 같기도, 잘 익은 과일 같기도, 금방 우려 낸 홍차 같기도 한 향기였다.

눈을 가늘게 뜬 시우는 바위 뒤에 몸을 숨긴 채 목만 슬그머니 빼내어 정면을 확인했다.

‘저건…….’

달그락─

찻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시우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보통 크기의 찻잔이 미니어처처럼 느껴질 정도로 커다란 손이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피에 듬뿍 젖은 듯한 붉은 피부는 분명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시우는 서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

‘그것’과 눈이 마주치는 찰나 시우의 온몸이 쩌적 얼어붙었다.

“손님이로군.”

직사각형 형태의 동공이 가로로 길게 찢어지는 것이 보였다. 시우는 저런 특이한 형태의 동공을 본 적이 있었다.

‘에단?’

순간적으로 그런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선명한 핏빛을 띤 에단의 눈과는 달리 ‘저것’의 눈동자는 호박석처럼 샛노란 홍채를 가지고 있었다.

따각, 따각…….

말굽 소리처럼 청아하고도 묵직한 발소리가 점차 다가왔다. 시우는 몸을 살짝 낮추며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전투를 준비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공격도, 도발도 아닌 정중하고도 중후한 목소리였다.

“마침 잘됐소. 잔이 두 개 준비되어 있거든.”

“…….”

시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역으로 관절이 꺾인 염소 다리. 울퉁불퉁한 혈관이 도드라진 붉은 피부. 가로 형태의 동공과 길게 내려오는 수염.

‘그것’은 염소와 노인이 뒤섞인 반인반수(半人半獸)의 모습을 한 기이한 괴물이었다.

시우는 놈의 왼쪽 가슴, 그러니까 심장 부근에 선명하게 새겨진 별자리 문양을 발견했다.

“조디악.”

낮게 중얼거린 시우의 어깨 위로 챙, 하고 얼음 결정이 생겨났다. 놈은 기이한 형태의 동공으로 빨아들일 듯 시우를 살피며 무심히 입을 열었다.

“그렇소.”

그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시우의 눈이 번쩍! 빛났다.

슈우욱……!

순식간에 손아귀에 쥐어진 기다란 창 형태의 고드름. 시우는 놈이 회피할 틈도 주지 않고 그것을 크게 휘둘렀다.

화악! 챙!

그러나 시우의 첫 공격은 놈에게 닿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공격조차 할 수 없었다.

“……?!”

얼음 창을 휘두르던 찰나 팔이 건전지가 다 된 기계처럼 우뚝 멈춰 버린 것이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큭……!”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고개가 점점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무릎이 털썩하고 접혔다.

겉으로만 보자면 마치 놈에게 무릎을 꿇고 경례를 하고 있는 꼴과 다름없었다. 땅에 시선을 고정한 시우는 억눌린 듯한 신음을 흘렸다.

‘몸이…… 말을 안 들어.’

보이지 않는 밧줄에 온몸이 꽁꽁 묶여 버린 듯, 손은커녕 눈꺼풀조차 마음대로 깜빡일 수 없었다.

속박 따위의 행동 불능 스킬에 걸린 건가? 하지만 놈은 그 어떤 특수한 행위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상대의 마력이나 기상에 제압당해 버렸다는 건가? S급 헌터이자 늑대의 주인인 백랑이?

아니, 그것은 더욱 말이 안 된다.

“고개를 들어도 좋소.”

놈의 ‘허락’이 떨어진 후에야 시우의 목 근육은 녹이 슨 철처럼 삐거덕삐거덕 움직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시우가 만들어 낸 얼음 창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스킬을 사용하는 것은 물론 고유 능력을 발휘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너…… 내게 무슨, 짓을…….”

여전히 무릎만은 굽혀진 상태로, 시우가 억지로 목소리를 짜냈다.

“나는 마갈궁(摩竭宮)을 수호하고 있는 ‘벤달기프’.”

돌처럼 단단히 굳어 버린 시우에게, 놈이 유유자적하니 다가왔다.

“차 한잔, 어떻소.”

* * *

[‘적막의 호수’에 진입하셨습니다.]

[알 수 없는 시선이 느껴집니다.]

꼬르륵…….

아연은 자신의 입술 사이로부터 보글보글 올라가는 기포를 보고 황급히 입을 앙다물었다.

‘여긴…… 물속이잖아?’

헤엄치듯 손발을 움직이자 느릿하게 물살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법진을 통해 쌍어궁 셰이핌의 영역으로 이동하는 것에는 성공한 모양이지만 설마 물속으로 이동할 줄이야.

‘아, 그냥 백랑이 오는 게 나았으려나.’

물을 다룰 줄 아는 시우였더라면 이곳에 진입하자마자 자유자재로 물을 조종했을 테다.

하지만 후회해도 이미 늦은 일이다.

아연은 스스로가 선택해서 이곳으로 왔다. 그 선택에 책임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어린아이는 아니었다.

다행히도 각성자는 일반인보다 여러모로 신체 능력이 월등했다. 더군다나 아연은 S급 헌터다.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우월한 폐활량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였다.

다만 그것이 물속에서 영원히 숨을 참을 수 있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길어 봤자 10분 정도겠지. 그것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을 때의 이야기다.

아연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쌍어궁의 모습은커녕 물고기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타임 리밋이라는 거군.’

물에 빠져 죽는 것이 먼저인지, 아니면 쌍어궁이 있는 곳을 찾아내서 녀석을 죽이는 것이 먼저인지.

아연은 수영에 꽤 자신이 있는 편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허투루 움직이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물속에서의 체력 소모는 공기 중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

가만히 물속에 떠 있는 것뿐이라면 10분, 최대 15분까지도 버틸 수 있겠지만 격하게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버틸 수 있는 시간이 급격히 줄어들 것이다.

어디 있을지도 모르는 적을 찾기 위해 무턱대고 헤엄치는 일은 수명을 깎는 행위나 다를 바 없다는 소리다.

‘게다가…….’

진입 당시 팝업된 시스템창에서는 ‘알 수 없는 시선이 느껴진다’고 했다. 그 말은 즉 이 영역의 주인, 셰이핌이 아연을 주시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소리였다.

자기는 안전한 곳에 몸을 숨기고, 침입자가 허우적대다가 물에 빠져 죽어 가는 꼴을 즐겁게 감상하기라도 할 속셈인가.

‘몰카범이랑 다를 게 뭐야?’

한껏 찡그려진 아연의 분홍색 두 눈동자에 혐오감이 불쑥 깃들었다. 인류의 존망 문제를 떠나서도 그런 변태…… 아니, 쌍어궁은 꼭 직접 죽여야 성이 풀릴 것 같았다.

수중에 둥둥 떠 있는 아연의 주변으로 차르륵, 하고 검은 사슬이 뻗어졌다.

사슬은 뱀처럼 구불구불 수중을 떠돌다가 어느 한곳에 착, 하고 안착했다. 아연의 사슬은 끝부분이 갈고리처럼 굽어져 있었는데, 그것을 이용하여 주변 암석 따위에 단단히 고정시킨 것이었다.

‘됐다.’

사슬을 밧줄처럼 부여잡은 아연은 그것을 당겨 이동하기로 했다. 직접 헤엄치는 것보다 그편이 체력 소모가 덜하기 때문이다.

아연은 물살로 인해 몸이 움직이지 않도록 한 손으로 암석을 잡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자신의 허리춤에 사슬을 칭칭 감았다.

‘오케이, 준비 완료.’

몸이 단단하게 고정된 것을 확인한 아연은 두 손을 가슴 앞에 가져왔다. 마주 본 손바닥 사이로 곧 끈적끈적한 점성을 가진 녹색 액체가 생겨났다.

그린 포이즌(Green Poison).

그것은 아연의 고유 스킬 중 하나로, 보통은 직접 적을 공격하는 데에 쓰이기보다는 단검 따위의 무기에 바르는 용도의 스킬이었다.

그것은 곧 물살의 흐름에 따라 느릿하게 수중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곳 어딘가에 쌍어궁이 숨어 있다면, 이 독은 언젠가 녀석에게 닿을 것이다. 물과 섞이는 바람에 아연에게도 독이 닿겠지만 그건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한테 그린 포이즌은 안 통하거든.’

자신이 쓴 독 스킬에 자신이 당하는 건 어불성설이 아닌가.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독이 닿을 것을 염려한 쌍어궁이 물을 걷어 내고 모습을 드러낼 것인지, 아니면 이 독에 서서히 중독되어 그대로 죽을 것인지.

아연이 물속에서 숨을 참고 견딜 수 있는 건 길어 봤자 10분. 독에 닿은 녀석이 죽음까지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아마 다르지 않을 것이다.

‘누가 먼저 죽는지 한번 볼까.’

꼬르륵…….

아연이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리자 잇새로 작은 기포가 올라갔다.

‘깡으로라도 버텨 주마.’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여기서 그냥 뒈져 버릴 정도로 조연급 캐릭터는 아닌 것 같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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