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1. 잠자는 사자의 코털 (271/306)


#271. 잠자는 사자의 코털
2023.04.28.


“유도요?”

“현재 우리는 네 명이고 적은 하나야. 그것만으로도 승산은 충분히 있어.”

“하지만…….”

“내가 녀석의 시선을 끌게. 그동안 너희 셋은 오른쪽 기둥 아래 마법진으로 가. 그곳에 쌍어궁이 있을 거야.”

은하는 오른쪽 기둥을 응시하며 덧붙였다.

“사자의 시선을 끌다 틈이 나면 나도 곧장 그쪽으로 향할 테니까.”

왼쪽 기둥이 부서질 경우, 오른쪽처럼 마법진이 생길 가능성을 시험해 봐야 한다. 그게 데바에게 다다르는 길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들의 최우선 목표는 셰이핌을 처치하여 결계를 해제시키는 것. 에단을 포함한 지원군들을 불러오기 위해서는 그것이 가장 중요하고도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왼쪽 기둥 밑을 확인하는 건 그다음이어도 돼.’

한편 놈을 유도하겠다는 은하의 말에 놀란 얼굴을 한 아연, 민주와는 달리 시우는 말없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렇군. 저 기둥은 우리의 힘으로는 부술 수 없지만, 놈이라면 가능하니까.’

짧은 사이, 시우의 푸른 눈이 잠든 사자에게 닿았다가 부서진 오른쪽 기둥, 그 아래의 마법진, 그리고 멀쩡한 왼쪽 기둥까지 차례로 훑었다.

“선배, 그렇다면 여긴 제가 맡겠습니다.”

“뭐?”

“선배는 이곳에 발이 묶여 있으면 안 됩니다.”

시우가 엄지를 들어 자신의 등 뒤, 고아한 황금 빛을 뿜어내고 있는 묘한 탑을 휙 가리켰다.

“선배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잖아요.”

헌터들 중 데바를 쓰러트릴 가능성이 가장 높은 건 흑염의 프린세스, 은하였다. 그런 그녀가 이런 곳에서 시간과 체력을 허비하는 것은 피해야 할 일이다.

“늑대 형이랑은 처음으로 의견이 맞네.”

그때,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민주가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리고 은하와 시우 사이에서 “끙차.” 하고 어깨에 메고 있던 바주카를 내려 두었다.

“내가 맡을게, 저놈.”

“……네가?”

“그래. 결계를 부수면 바깥에서 지원이 올 테고, 그럼 패밀리 녀석들도 성에 진입하겠지. 여기가 입구 부근이니까, 난 여기서 이놈이랑 놀면서 패밀리들을 기다리고 있을게. 그리고…….”

힐끔 고개를 돌린 민주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뮤턴트와 발키리를 쳐다보았다.

“성능이 별로라고는 해도, 내 포션이라도 있어야 저들을 이승에 붙잡아 두고라도 있을 테니까.”

“지원군이 올 때까지 네가 그들을 돌보겠다는 건가?”

“생판 남이라고 해도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까.”

“저들을 지키면서 사자를 상대할 자신이 있는 모양이군.”

“그렇지 뭐.”

턱을 들어 시우와 눈을 맞춘 민주가 씩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형보다는 발이 빠를 것 같거든.”

건방진 도발에 시우의 눈썹이 소리 없이 꿈틀 움직였다.

하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종합 전투력이 아닌 오로지 민첩성으로만 따지자면 시우보다는 민주가 한 수 위일 것이다.

더구나 민주의, ‘트릭스터’의 특기는 각종 무기나 장비, 또는 함정을 만들어 내서 적을 골탕…… 아니 처치하는 일이었다. 그러니 민주는 은하보다도 자신이 놈의 시선을 효율적으로 끌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다.

“괜찮겠어?”

다만 은하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

민주가 실력 있는 S급 헌터이며 한 길드를 이끄는 수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동시에 그는 보호받아야 할 미성년자이기도 했다.

게다가 은하는 몇 년 전 언노운 게이트에서 반쯤 죽어서 돌아왔던 민주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픽시 파우더를 구하지 못했더라면 민주는 아마 그때 죽었겠지.

“누나, 내가 경기도 화성에 ‘하얀 지붕’이라는 이름의 난민 수용소를 설립한 건 알고 있죠? 그리고 그곳에, 그때 그 네뷸러의 주민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것도요.”

달그락달그락, 야무지게 바주카를 만지작대며 민주가 말했다.

“그 사람들, 여전히 예전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어요. 새로운 이름도 지었고요. 한별이…… 아니, 53 기억하세요?”

53. 민주를 유난히도 잘 따르던 어린 여자아이였다.

“한별이라는 새 이름을 얻고 최근에 초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했거든요. 얼마 전에는 합창단에 들어갔대요. 몰랐는데, 노래를 꽤 잘하더라고요.”

“…….”

“그 사람들이 저한테 고맙대요. 새 삶을 살 수 있게 해 줘서. 헌터 일을 시작하고 누군가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를 들은 건 처음이었어요. 살짝 오글거리기는 했는데, 나쁘지는 않더라고요.”

거기까지 말한 민주는 바주카를 만지던 손을 멈추었다.

“다른 네뷸러에도 한별이 같은 아이들이 많이 남아 있겠죠? 여기서 데바를 막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그런 아이들이 생겨날 거고요.”

민주는 다 손본 바주카를 어깨에 가뿐히 들쳐 멨다. 그리고 도토리처럼 동그란 눈동자를 들어 은하를 똑바로 응시했다.

“내가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은하는 곧장 고개를 끄덕이지도, 그렇다고 젓지도 못한 채 민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건 장난기가 가득한 소년의 얼굴도 보호받아야 할 미성년자의 얼굴도 아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S급 헌터의 얼굴이었다.

망설임이 깃들어 있던 은하의 까만 눈 위로, 작은 한숨과 함께 눈꺼풀이 스르륵 내려앉았다.

“……알았어.”

결국 은하는 민주에게 사자궁을 맡기기로 했다.

민주가 철컥철컥 바주카포를 장전하는 동안 은하와 시우, 그리고 아연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틈이 나는 대로 쌍어궁이 있는 오른쪽 마법진으로 진입하기 위해.

“…….”

양산 손잡이를 꾹 눌러 쥔 은하가 민주의 뒷모습을 조용히 응시했다. 괜찮다. 민주를 믿자.

“트릭스터.”

그때 시우가 민주를 불렀다. 바주카를 장전하고 있던 민주가 힐끗 고개를 돌린 순간, 시우는 무언가를 그에게로 휙 던졌다.
펄럭─

“쪽팔리게 이런 데서 다치지 마라.”

그것은 백색 성에 진입하기 직전 주웠던 민주의 녹색 망토였다.

그것을 받아 낸 민주가 한쪽 입꼬리를 씩 올리며 망토를 둘렀다.

“……여기서 아무것도 못 하는 것보다 차라리 싸우다가 다치거나 죽는 게 덜 쪽팔릴 것 같은데.”

망토를 탁탁 털어 낸 민주가 철컥! 바주카포를 사자에게 겨누었다. 그러고는 스코프에 한쪽 눈을 가져가고 나머지 한쪽 눈을 윙크하듯 찡긋 감았다.

‘표적은…….’

사자의 이마 쪽에 겨누고 있던 포구가 점차 조금씩 아래로 내려간다.

‘놈이 누워 있는 바위.’

퍼어어엉!!

민주가 예고도 없이 쏘아 올린 포탄에 순식간에 눈앞이 휘황찬란한 무지개색으로 감싸였다.

크와아아아아!

고막이 찢어질 듯한 포효가 들려온다. 사자궁의 것이 틀림없었다. 경험이 없는 헌터였다면 저 포효만으로도 전의를 상실할 정도로 위협적인 음색이었다.

‘지금이다.’

휙!

가까운 곳에 몸을 숨기고 있던 은하, 시우, 아연은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튀어 오르듯 오른쪽 마법진으로 향했다.

그런데.

“……뭐야?”

돌연 시우가 당황한 듯한 목소리를 흘렸다. 그들이 마법진을 밟은 순간, 눈앞에 푸른 시스템이 떠오른 것이었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보호되고 있는 구역입니다.]

[입장 가능 인원, 최대 1인.]

[인원 초과로 진입이 거절되었습니다.]

‘한 명만 입장이 가능하다고?’

은하는 짧은 순간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루시의 말에 따르면 쌍어궁 셰이핌은 전투력이 거의 없는, 결계에 특화된 능력을 가진 조디악이라고 했다.

‘보통 그런 경우, 겁이 많고 신중한 성격일 가능성이 높다.’

입장 가능 인원을 최소한으로 줄여 둔 까닭도 그 때문일지 모른다.

어쩌면 적이 자신의 공간에 침입할 것을 대비하여 곳곳에 장치를 해 두었을 수도 있다.

‘지금 우리 중 가장 빠른 속도로 은밀하게 움직일 수 있는 헌터는…….’

일대일 전투에 특화되어 있는 데다 발 빠른 이동 스킬, 은신 스킬까지 가진 아연이가 적격이었다.

하지만 은하는 시우와 아연을 지나쳐 자신이 마법진 위에 섰다. 머릿속으로 내린 결론과는 다른 행동이었지만 그것이야말로 은하다운 행동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팟!

돌연 누군가가 은하를 강하게 밀어냈다. 신시우? 아니…….

“아무래도 여긴 내가 나설 차례인 듯.”

아연이었다.

우우웅─

아연이 마법진 위를 홀로 밟자 눈부신 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연아, 여긴 내가─.”

“노노.”

아연은 검지를 가로로 흔들며 쯧쯧 혀를 찼다.

“주인공은 원래 마지막 보스를 잡아야 하는 법. 피라미 같은 적들은 나 같은 주조연급이 죽이는 게 국룰이거든요?”

“무슨 소리를.”

“걱정 마요, 언니.”

빛에 온전히 휩싸이기 직전 아연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단검을 던졌다 받았다.

“그냥 쳐 죽이고 올 테니까.”

펑! 펑! 펑!

지금 이 순간에도 저쪽에서는 연속하여 바주카포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아연은 이미 눈앞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이쪽이다, 멍청아!”

사자궁, 얀을 상대하고 있는 민주가 크게 소리쳤다.

크르르르…….

도발당한 얀은 붉은 안광을 번쩍이며 이빨을 드러냈다. 놈이 언어를 구사할 수 없다는 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땅을 짚고 있던 앞발을 크게 쿵! 하고 찍자, 양 앞발에 갈고리처럼 날카로운 발톱이 튀어나왔다.

“옳지.”

싱긋 입꼬리를 올린 민주가 녹색 망토를 펄럭이며 직선으로 도약했다. 얀이 앞발로 그곳을 내려찍은 것은 바로 그다음 순간이었다.

콰지직…….

엄청난 힘이다. 놈이 찍은 곳을 중심으로 격렬한 흔들림이 느껴졌다.

뿌옇게 일어난 흙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은하는 그곳이 맨홀처럼 뻥 뚫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단순히 앞발로 내려찍었을 뿐인데, 그 괴력은 긴고아를 해제한 유환과 엇비슷한 수준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트릭스터를 지원하는 것이.”

민주의 전투를 보고 있던 시우가 모발 끝을 은은하게 희게 물들이며 말했다. 은하는 그런 시우를 저지했다.

“아니, 기다려. 무턱대고 우리까지 나섰다가는 오히려 방해가 될 가능성이 커.”

한쪽 손으로 시우를 가로막은 은하가 말했다.

민주는 얀과 ‘전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선을 끌고 있을 뿐이었다.

‘장기전이 될 거야.’

아연이 셰이핌의 결계를 깨고 지원군이 올 때까지 얀을 상대하는 것은 물론, 뒤쪽의 헤드 헌터 둘을 돌보기까지 해야 하니까.
은하는 민주와 얀 너머로 보이는 나머지 한 개의 기둥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아직 왼쪽 기둥이 남아 있어. 민주가 얀을 유도해서 저 기둥을 부쉈을 때, 저곳에 마법진이 나타나면 우린 그쪽으로 이동하자.”

“괴도가 셰이핌을 쓰러뜨리지 못하는 경우도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어차피 끝이야.”

은하는 단호하게 답했다.

쌍어궁 셰이핌에게 향하는 유일한 경로가 열렸다는 것은 셰이핌 본인은 물론, 데바까지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만일 아연이 셰이핌을 처치하지 못한다면 결계가 강화될 것은 틀림없다. 어쩌면 데바나 다른 조디악이 몸소 나타날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아연을 뒤이어 누군가가 그곳에 입장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미지수다.

모든 것이 확실하지 않은 상황. 기회는 한 번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 결론은…….

“아연이를 믿는 수밖에.”

그리 중얼거린 은하는 민주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민주는 지금 왼쪽 기둥 쪽으로 놈을 유인하고 있었다. 즉 마법진을 통해 이동한 것이 아연 한 명뿐인 것을 확인한 순간, 민주도 은하와 같은 판단을 내린 것이리라.

한편 사냥감을 놓쳤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얀은 민주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고개를 홱홱 돌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민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자도 고양잇과였지, 아마?”

[표적 확인.]

[트릭이 발동됩니다.]

“그럼 술래잡기, 좋아하겠네.”

퐁! 포퐁, 퐁!

주변에 남아 있던 무지개색 연막이 비눗방울처럼 뭉치기 시작했다.

버니 트릭(Bunny trick). 민주가 가진 고유 스킬 중 하나로, 뭉게뭉게 구름 같은 연막을 뭉쳐 토끼로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물론 이 스킬의 용도가 그것뿐이라면 쓸모가 없을 테다.

주변을 뛰노는 이 작고 귀여운 무지갯빛 토끼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무시무시한 살성 화약탄이었다. 살짝 손가락 끝이 닿기만 해도 팔 한쪽은 물론 신체 절반이 날아갈 정도의 위력.

또한 민주가 원한다면, 무지개색 연막이 자욱하게 깔린 이 공간은 얼마든지 화약 창고가 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 스킬의 최대 장점은…….

“그럼, 시작.”

토끼 모양을 한 이 깜찍한 화약탄들이 모두 자아(自我)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귀여운 화약탄은 진짜 토끼처럼 깡충깡충 공중을 뛰어다녔다. 기계처럼 일정한 움직임도 아니었다. 개중 몇 마리는 사자를 향해 달려들었고, 또 몇 마리는 도망가기도 했다.

“다 잡기 전까지 이 친구들은 안 없어져. 네가 날 죽여도 말이야.”

퐁, 포퐁!

앙증맞은 소리를 내며 공중을 껑충껑충 뛰어다니는 토끼에 얀의 시선이 흩어졌다. 놈은 시야를 방해하는 토끼들이 거추장스러운지 사방으로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쾅! 콰앙! 쾅쾅!

아무렇게나 휘둘러진 주먹에 운이 좋게도 몇 토끼가 명중하여 폭발했지만 녀석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 폭발에 손발이 날아가기는커녕 붉은 갈기 한 털이나마 태우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그런 것은 민주의 목적이 아니었다.

‘조금만 더.’

퐁, 포퐁!

계속해서 ‘버니 트릭’을 만들어 내며 민주는 천천히, 그러나 착실히 얀을 목적지로 이동시키고 있었다.

목적지는 왼쪽 기둥.

짜증이 극에 달한 얀이 괴악한 포효와 함께 앞발을 높게 쳐들었을 때.

“누나─!”

휙!

은하와 시우가 단숨에 도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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