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202)화
(202/306)
Lv.99 흑염의 프린세스 (2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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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사막에 핀 얼음꽃 (1)
2023.02.18.
아스트에게도 분명 손등에 저 표식이 있었다.
조디악의 몸에는 표식이 있다는 심안의 말이 맞았다.
은하는 다시 한번 양산을 바로 잡았다.
주변에는 석유인지 향유인지 모를 기름 특유의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 건조한 공기. 함부로 불을 썼다가는 공간 전체가 불바다로 변할지도 몰랐다.
사실 주변이 불에 휩싸이게 되는 것은 크게 상관없었다. 은하에게는 화염 내성이 있으니. 다만 문제는 지금 그녀가 서 있는 이 모래성이 어떠한 형태로 되어 있는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혹시 이 모래성이 공중에 떠 있는 형태라면? 바닥이 뚫리는 순간 추락해 버리고 말 것이다. 만일 이곳이 지하라면 꼼짝없이 압사당할 테고.
그러니 은하는 불을 사용하는 것이 이르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진정하라니까. 대화를 나누자고.”
은하의 눈빛이 바뀐 것을 감지한 예가임은 워워, 하고 두 손을 들어 보였으나 소용없었다.
촤아악─!
은하는 다시 한번 양산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세로가 아닌 가로였다.
“고작 그따위의 공격, 두 번은 안 통하지.”
그것은 결코 허세가 아니었다.
예가임은 아까보다 더욱 수월하게 은하의 공격을 회피했다. 방금 전에는 그나마 터번을 베어 낼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머리카락 한 올마저 닿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의 권능 ▶ ‘고양이의 발톱’ 활성화.]
[그림자 속에 숨은 고양이가 당신의 모든 움직임을 흉내 냅니다. 스킬을 포함한 모든 공격의 위력이 2배, 타수가 1회 추가됩니다.]
“……!”
그의 눈이 크게 뜨이는 순간,
촤아악─!
대기가 또 한 번 갈라졌다. 다급히 그가 상체를 꺾어 공격을 회피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한 박자 늦었다.
툭, 투둑…….
그가 목에 걸고 있던 황금 목걸이가 끊어지더니 바닥에 찰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이어서 그의 목에 선명한 붉은 선이 그어졌다. 조금만 더 깊게 베였다면 일격에 목이 잘려 버렸을 것이다.
예가임은 제 목에 슬쩍 손을 가져갔다. 손바닥에 묻어난 붉은 핏자국을 확인한 그는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사실 놀란 것은 은하도 마찬가지였다.
‘……예측한 건가?’
‘고양이의 발톱’은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의 권능이었다.
고양이는 12신수에 포함되지 않았다. 따라서 은하가 여태 만났던 이들 중 그 누구도 권능의 종류는커녕 고양이 신수의 존재 자체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런데 방금 예가임은 뒤늦게나마 은하의 2차 공격을 피했다. 마치 찰나의 순간, 두 번째 공격이 잇따를 것이라고 예측이라도 한 듯이.
“너 혹시…….”
목에 난 상처를 가볍게 문지른 예가임이 슬쩍 입술을 달싹였다.
“쌍둥이를 만났나?”
쌍둥이? 이번에도 의도를 파악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은하는 대답 대신 뒷발로 땅을 걷어차며 튀어 올랐다. 그를 향해 크게 양산을 휘두르는 순간, 그가 꼬리를 움직여 그것을 튕겨 냈다.
채애앵─!
금속이 부딪히는 맑은 소리가 주변으로 울려 퍼졌다. 그 반동으로 은하는 멀리 튕겨져 나갔지만 낙법 자세를 취해 부드럽게 착지할 수 있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시선을 들어 양산을 확인한 은하의 눈이 커졌다.
‘양산이…….’
다행히 부서지지는 않았으나 단단한 껍질로 감싸인 놈의 전갈 꼬리와 맞부딪히며 구부러져 버린 것이었다. 그 와중에 놈의 꼬리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아아, 그렇군.”
예가임은 뚜벅뚜벅 은하에게로 걸어왔다. 은하는 재빨리 양산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그를 노려보았다.
“……‘배신자’가 둘이었던 거로군.”
그가 또 이상한 말을 했다. 쌍둥이라든지 배신자라든지, 그게 무슨 소리인지 은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현재 상황에서 알 수 있는 점은 단 한 가지. 양산을 이용한 공격은 더는 먹히지 않을 것이라는 점.
예가임이 고양이의 권능에 대해 대충이라도 파악한 이상, 그의 말대로 두 번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저 단단한 꼬리. 웬만한 물리 공격은 저것에 의해 막혀 버릴 것이다. 이 이상 양산을 썼다가는 완전히 망가져 버릴지도 모른다. 드레스도 찢어진 상황에서 양산까지 망가져 버리는 일은 피해야 한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흑염.
이 공간에서 함부로 불을 사용했다가는 도리어 위험해질지도 모르지만…… 방법이 없다.
화르륵!
결심을 다진 은하 곁에 검은 불이 피어났다. 은하를 향해 다가오던 예가임은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가늘게 떴다.
기회였다.
‘최대한 주변에 불길이 닿지 않도록.’
──정확히 적을 노린다.
화아악!
불꽃이 탄알처럼 날아가 예가임에게 명중했다. 그러나 은하가 예측하지 못한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텁!
예가임의 가슴팍이 모래로 바뀌더니, 불꽃 구체를 꿀꺽 삼켜 버린 것이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저자는 몸이 모래로 되어 있다는 말인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는데, 그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가볍게 웃었다.
“사막의 지배자에게 화염 내성이란 미덕과도 같지.”
찰랑─
그의 귀에 달린 화려한 귀걸이가 맑은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은하뿐만 아니라 그 역시도 거의 최대치에 가까운 화염 내성을 가진 모양이었다. 양산을 이용한 공격도 쉽게 먹히지 않는 데다 강력한 화염 내성까지?
─즉, 그녀에게 최악의 상대라는 소리였다.
“…….”
은하가 소리 없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도 나쁘진 않아. 인정하지. 그 변질자(變質者)가 마음에 들어 할 만도 해.”
예가임은 다시 걸음을 옮기며 점차 거리를 좁혀 왔다. 은하의 바로 앞에서 그의 발이 뚝 멈추었다.
‘변질자……?’
은하와 예가임의 눈이 마주쳤다.
그는 스르륵 상체를 숙여 은하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황금처럼 샛노란 눈동자가 휘었다.
“그냥 내가 뺏어 버릴까?”
그리고 그 순간.
뻐어억─!
은하가 양산 손잡이를 집어 들어 그의 턱을 가격했다. 일반인이었다면 턱뼈가 으스러질 정도의 위력이었다.
“꺼져.”
다시 그와 거리를 넓인 은하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예가임은 얼얼한 턱을 매만졌다. 엇나간 턱뼈를 대충 끼워 맞춘 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왜 그렇게 화를 내고 그러나.”
“…….”
은하는 대답하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가 방심하기를 기다렸다가 빈틈을 노려 순간적인 공격을 가한다면 승산이 있었다. 방금처럼 말이다.
‘기회는 많이 없을 거야.’
녀석은 전투 센스가 상당하다. 똑같은 공격에 두 번 당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곳에서 도망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할 수 있어.’
은하는 양산을 꾹 쥐었다.
위력이 조금 줄어들지언정 속도를 높여야 한다. 꼬리로 받아치기도 전에, 몸을 모래로 바꾸기도 전에.
그러한 은하의 결심을 읽은 것일까.
“일단은 그거 손에서 놓고, 이야기를 좀 들어 보는 게 어때.”
“너와 나눌 이야기는 없어.”
“진정하라니까. 나는 괜찮은 제안을 하려는 것뿐이니.”
“……제안?”
양산은 여전히 손에서 놓지 않은 채 은하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그래, 제안. 너, 네뷸러의 일원이 될 생각이 없나?”
멈칫.
네뷸러의 일원이라고? 은하는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내게 여기 마을에 들어와 살라는 건가?”
“그럴 리가. 저들과 너는 달라. 너는 훨씬 더 우수하고 훌륭한 개체지.”
그리 말한 예가임이 은하를 향해 악수를 청하듯 손을 뻗었다.
“우리와 함께하는 게 어때. 네가 원한다면, 그리고 그분께 자격을 증명해 보이기만 한다면, 넌 영생뿐만 아니라 강력한 힘과 권력, 그 밖에도 수많은 것들을 누리게 될 거야.”
“…….”
은하는 시선을 내리깔아 제게 내밀어진 손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영생이나 힘 따위를 운운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나더러 조디악이 되라고?”
그의 손에서 시선을 뗀 은하가 물었다. 예가임은 대답하지 않은 채 빙긋 웃어 보였다.
은하는 그의 손을 철썩! 강하게 쳐 냈다.
“거절한다.”
“거절이 빠른걸.”
“생각할 가치도 없는 일이야.”
“과연 그럴까?”
그의 미소가 진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슈슈슈슉…….
단단한 모래로 되어 있던 성 바닥 위로 작은 소용돌이가 일기 시작했다. 마치 은하가 빠졌던 모래 웅덩이와 비슷한 형태.
‘또 함정인가?’
경계심을 담아 그것으로부터 한 걸음 멀어지자, 그 소용돌이의 중앙에서 동그란 모래 구체가 떠오르는 게 보였다.
구체의 중심 부근에 가로로 기다랗고 가느다란 줄이 생겼다. 그 줄을 중심으로 스르륵 구체가 벌어지며, 커다란 동공이 나타났다.
눈알 형태의 몬스터인가? 언제 시작될지 모르는 전투를 준비한 채, 유심히 그것을 관찰하고 있는데.
「빨리! 더 이상 붕괴되기 전에 나가야 해!」
「53! 괜찮아? 움직일 수 있겠어?」
「오, 오빠……. 무서워…….」
구체에 떠오른 동공 속으로 마을 주민들과 그들을 대피시키는 민주와 이준의 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이 구체는 예가임의 능력 중 하나로, 이곳과 떨어진 곳의 풍경을 보여 주는 용도인 듯했다.
은하가 있었을 때보다 붕괴 현상이 상당히 진행되었다. 두 개로 갈라져 있던 하늘은 산산조각 깨부숴졌으며, 그 깨진 틈새로는 새까만 점들이 모여 지지직거리고 있었다. 마치 고장 난 TV의 노이즈 화면 같기도 했다.
「틈을 잘 살펴봐! 찾아보면 분명 이 중 하나는 바깥으로 연결되어 있을 거야.」
민주는 깨지고 갈라진 공간의 틈을 이리저리 확인하며 다급하게 외쳤다. 그런 민주의 뒤를 불안한 얼굴을 한 55명의 주민들이 따르고, 이준은 그들을 향해 달려드는 검은 눈알들과 각종 몬스터들을 처리하며 후방을 맡고 있었다.
“가엾은 영혼들이야.”
예가임이 그들의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사랑하는 연인, 가족, 친구는 물론 제 이름조차 잊은 채 이곳에 갇혀 오랜 세월을 보냈지. 하지만 네 동료들이 그런 그들을 탑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려고 하는 모양이구나.”
하지만 그건 조금 고려해 봐야겠는데. 그가 덧붙이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주민들의 모습이 변했다.
「이, 이봐! 갑자기 왜 그래?」
「명령……. 명령…….」
마을 사람 중 한 남자가 돌연 근처를 걷고 있던 다른 주민에게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의 목덜미의 흉터가 빛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눈앞에 선 예가임의 눈도 그와 비슷하게 빛나고 있었다.
역시. 어떤 방법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지금 이런 식으로 타인을 ‘조종’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민주와 로제에게도 그랬을 테고.
「으아아악!」
모래 구체를 통해 비명이 들려온다. 마을 사람들의 것이었다. 민주와 이준이 그들을 저지하는 것이 보였지만, 단순히 무력을 써서 그들의 움직임을 봉쇄할 뿐 그 이상의 대처를 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공간은 계속하여 붕괴되고 있었다. 시기를 놓쳐 출구로 연결되는 틈새를 찾지 못한다면, 그들은 그대로 영영 저곳에 갇혀 버릴지도 모른다. 마을 사람들도. 그리고 민주와 이준도.
뿌득.
양산을 쥔 은하의 손등 위로 푸른 혈관이 돋았다.
“당장 멈춰.”
낮게 으르렁대는 목소리로 은하가 경고했다.
“글쎄, 어떡할까.”
그가 즐거운 듯 턱을 쓸며 고민하는 척을 했다.
“저들은 나의 백성들이자, 이 광활한 사막에서는 몇 없는 유희이기도 하거든. 이대로 눈 뜨고 코 베이고 싶지는 않아서.”
검지로 톡, 톡, 턱끝을 두드리던 그가 이내 빙긋 눈매를 휘어 웃었다.
“네게 선택지를 주는 것이 좋겠구나. 우리와 함께하겠는가, 혹은─.”
그의 검지가 스르륵, 모래 구체를 향했다.
“이자들을 버리겠는가.”
예가임은 지금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은하를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그를 차갑게 노려보던 은하가 힐끗 시선을 옮겨 모래 구체 속 사람들의 모습을 확인했다.
당장이라도 거절하는 것이 옳았다.
복수심에 눈이 멀어 몬스터를 도륙하며 피 칠갑을 했을 시절에도, 몬스터로 오해받고 오랜 동료가 그녀에게 칼을 겨누었을 때에도, 은하는 늘 인간이었다. 단 한 번도 아니었던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은하는 인간을 위해 싸워 왔고, 인간이기 위해 인간을 지켜 왔다.
그렇지만 여기서 은하가 또다시 거절한다면? 예가임은 은하의 눈앞에서 저들을 전멸시킬지도 몰랐다.
마을 사람들은 가족이라 생각하던 서로에게 주먹을 휘두르며 무기를 겨눌 것이다. 실시간으로 공간이 붕괴되고 있는 지금, 이준과 민주가 거기에 휩쓸리지 않을 거란 보장도 없었다.
“어쩌겠어?”
그다지 인내심이 많지 않은 예가임이 다시 물어 왔다.
“나는…….”
은하가 살짝 입술을 달싹인 순간이었다.
쩌적, 쩌적…….
모래성 벽면에 실금이 번지는 것이 보였다. 공격을 난사한 영향일까? 그렇지 않아도 위험하다 싶었다. 어쩌면 이대로 성이 무너져 내리는 걸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런 예상과는 반대로, 벽에 번진 실금 사이로 투명한 물체가 찌지직 소리와 함께 퍼져 가고 있었다.
‘얼음?’
분명 얼음이었다. 그 순간, 은하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한 얼굴.
“신시…….”
채애애앵!
벽이 완전히 부서지며 눈부신 햇살이 온 시야를 뒤덮었다. 쏟아지는 빛줄기에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는 순간,
“선배.”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중저음의 목소리.
은하는 서서히 눈을 떴다.
“저 왔어요.”
땀을 흘렸는지 조금 몸에 달라붙은 흰 셔츠, 서리가 내려앉은 듯 부분적으로 희게 물든 검푸른 머리카락, 저를 내려다보는 푸른 호수 같은 눈동자.
백랑 신시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