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201)화 (201/306)


#201. 천갈궁(天蝎宮) 예가임
2023.02.17.


드레스 리본으로 매듭을 묶어 단단히 머리카락을 고정한 은하는 허리를 숙여, 여인을 감싸느라 손에서 잠시 놓친 양산을 다시금 쥐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저곳,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 모래성의 형태를 가만히 응시한다.

“나도 같이 가.”

이준은 놓칠세라 은하의 팔목을 붙잡았다. 그러나 은하는 그의 손아귀에서 너무도 손쉽게 벗어났다.

“아니, 민주 혼자서 이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나가는 건 무리일 거야. 네가 도와줘야 해.”

“그럼 너는?”

“두 번이나 돌아왔잖아.”

힐끗 이준을 향한 검은 눈이 미약하게 휘어졌다.

“세 번이라고 못 할까.”

“……나더러, 또다시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나약한 머저리가 되라는 소리야?”

내색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툭 튀어나온 목소리는 기어코 불안감을 숨기지 못하고 흔들렸다.

은하의 팔목을 잡았다가 그대로 놓쳐 버린 이준의 손이, 아직도 허공이 우두커니 머물러 있었다. 거두지도, 그렇다고 다시 뻗지도 못한 채로.

은하는 그 손을 한 번 쳐다보았다가,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도와주겠다고 했잖아.”

“…….”

“부탁할게.”

“…….”

그 앞에서 이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 그건, 두 번이나 눈앞에서 은하를 잃은 이준에게 너무나도 잔인한 부탁이었다.

그렇지만 상대가 너라면, 무슨 수로 내가 거절을 할 수 있을까. 아랫입술을 꾹 깨문 채 시선을 내리깐 이준은 결국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래, 알았어.”

“고마─.”

──워. 그렇게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그 대신.”

이준은 기다렸다는 듯이 은하의 말꼬리를 잘라 냈다. 그리고.

와락!

은하를 단숨에 끌어안았다. 방금 전에는 그녀의 팔목을 속수무책으로 놓쳐 버렸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겠다는 듯 조금 더 단단히.

예상치 못한 포옹에 은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은하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이준은 그녀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보지 못했다. 아니, 사실 볼 자신도 없었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가 다시 느릿하게 뱉어 냈다. 조금 식은 피부가 코끝에 닿으며, 은하 특유의 체취가 한 움큼 다가온다. 그것을 폐부 깊숙이 들이켜듯, 이준은 몇 번 더 심호흡을 반복한 후에서야 천천히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평소 은하는 얼핏 보면 차가워 보일 정도로 눈매가 길게 트여 있었는데, 지금은 깜짝 놀란 탓인지 마치 토끼처럼 동그란 형태로 변해 있었다.

많이 놀라게 한 것 같아 뒤늦게 머쓱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조금 솔직하게 말하자면 다른 마음이 훨씬 컸다.

‘이런 얼굴도 하는군.’

그녀를 안 지 꽤 오래된 이준이었지만, 이런 표정을 한 은하는 처음 보았다.

그리고 그녀로 하여금 이런 표정을 짓게 한 장본인이 자신이라는 사실이, 지금 이 상황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금 기뻤다.

뻣뻣하게 굳어 버린 은하를 향해, 이준이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은하가 기억하는 것보다 조금 더…… 아니, 꽤 많이 크고 길쭉해져 버린 이준이 높은 곳에서 은하의 뺨을 아주 살며시 쓸어내렸다.

멍하니 눈만 깜빡이고 있던 은하가 스르륵 시선을 들어 이준을 올려다보았다.

은하의 시야에서 한 뼘보다 더 위. 그곳에서 이준이 웃었다.

“돌아오면, 이번에는 나한테 먼저 와 줘.”

내가 제일 많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이준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는 듯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은하는, 돌연 챙그랑! 하고 들려온 유리 소리에 번쩍 정신을 차렸다.

공간이 붕괴되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는 것이었다. 시간이 없다. 은하는 양산을 쥔 손에 힘을 주고, 이준을 바라보았다.

“……알았어, 약속할게.”

“응. 다녀와.”

다치지 말고. 입꼬리를 빙긋 올린 이준이 손을 흔들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인 은하는 그를 스쳐 지나갔다.

새까만 은하의 머리카락이 이준의 뺨을 스치는 찰나,

“…….”

그의 입가에 머물렀던 미소가 순간적으로 흐릿하게 변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정말 한순간일 뿐, 이준은 힘껏 만들어 낸 미소를 다시 유지하며 은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이준과 민주에게 뒤를 맡긴 은하는 그대로 저곳, 모래성을 향해 내달렸다. 단순히 신기루일 수도 있겠지만, 가까이에 가서 직접 확인해 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저 먼 곳까지 한 번에 갈 수 있느냐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상해.’

은하는 지금 분명 전속력을 내고 있었다. 힐끔 뒤돌아보자 마을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꽤 많이 온 것이다.

뒤쪽을 확인한 은하가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도 저 모래성은, 어쩐지 가까워질수록 다시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정말 신기루야?’

그리 생각한 은하가 문득 걸음을 멈추는 순간이었다.

쑤욱─

“……!”

은하가 서 있던 곳을 중심으로 돌연 거대한 소용돌이가 생겨나더니, 빙글빙글 회전하는 모래 웅덩이가 마치 늪처럼 그대로 은하의 발을 빨아들였다.

* * *

“……읏.”

모래에 잠식당했던 은하는 곧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우선 자신의 손에 양산이 있는 것을 확인한 뒤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확인했다.

또각─

은하의 발걸음에 흙 내음이 섞인 공허한 공기가 진동했다.

‘여긴 어디지?’

그렇게 주변을 살피던 중, 어깨에서 무언가 스르륵 흘러내렸다. 어깨 쪽 드레스가 거의 찢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떨어질 듯 위태롭게 달려 있는 레이스와 천.

은하는 마지막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갑작스럽게 은하를 삼킨 모래 웅덩이. 그대로 아래로 추락하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그 와중에 망가져 있던 드레스가 이제 거의 수명을 다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아직까지 탑을 빠져나가지 못한 상황. 갈아입을 여분의 옷도 없었고, 있다고 해도 전투가 이어질지도 모르는 지금 드레스를 벗을 수 없다.

흘러내린 어깨 천을 대충 올려서 고정한 은하는 다시 주변을 확인했다.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몸이 추락하는 듯한 감각이 선명했으니까…….

‘그렇다면 이곳은 지하?’

불현듯 아스트 때의 기억이 뇌리를 스친다. 사슬에 묶인 순간, 저항할 틈새도 없이 미궁으로 빠졌었지. 이번에도 비슷한 형식으로 여기 오게 된 걸까?

그러나 이곳은 미궁이나 감옥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야외도 아닌 듯하다. 얼핏 보기에는 어느 건물의 내부 같기는 한데, 그렇다고 하기에는 어디에도 창문이나 문 따위의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걸음을 멈춘 은하는 벽면을 손으로 살짝 짚어 보았다. 처음에는 돌인가 싶었지만, 자세히 보니…….

‘단단하게 굳은 모래네.’

은하는 제 손에 묻어 나온 미세한 모래알들을 응시했다. 이번에는 천장과 바닥을 번갈아 확인했다. 벽과 마찬가지로 모래 재질이었다.

그렇다면 이곳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던 그 모래성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그때.

“직접 여기까지 뛰어오다니, 재밌는 녀석이구나.”

가까운 곳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움찔 어깨를 떤 은하가 재빨리 양산을 휘두르는 순간 천장과 바닥이 뒤집혔다. 빨리 감기 버튼을 누른 듯 시야가 재빠르게 뒤바뀌고,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가까스로 몸의 중심을 잡았을 때쯤.

“멀미는 하지 않았나?”

조금 전 들려왔던 바로 그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단단히 굳은 모래로 빚은 듯한 커다란 왕좌, 그리고 그곳에 앉은 터번을 쓴 남자가 보였다.

의자 손잡이에 턱을 괸 채 오만하게 턱을 들고 이곳을 내려다보던 그는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은하를 향해 걸어왔다.

저벅, 저벅…….

거리가 좁혀질수록 피부 위를 생경하게 스치는 기분 나쁜 감각.

은하는 이 감각을 기억하고 있었다. 수여식 당시, 나비 여인에게서 느껴지던 바로 그 감각이었다.

“약속을 어기면 어찌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나 봐.”

비로소 남자가 은하의 눈앞에 섰다.

“공간이 붕괴하고 있는 와중에 역주행을 할 거라고 생각하진 못했지만, 뭐 그 덕분에 수고를 덜긴 했지.”

은하는 양산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길게 찢어진 눈매에 호박 원석처럼 빛나는 노란 눈동자, 마치 아이섀도를 펴 바른 듯 붉게 물든 눈두덩이.

척 보기에도 무거워 보일 정도로 커다란 황금 목걸이, 귀걸이, 팔찌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가 머리에 쓰고 있는, 커다란 보석이 박힌 터번이었다.

얼핏 보면 그저 이국적인 외모와 차림을 한 남성인 것 같았지만, 그가 움직일 때마다 따라 흔들리는 전갈 꼬리는 분명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저 꼬리를 보고 있자니 에단이 했던 말이 문득 뇌리에 떠올랐다.

‘전갈한테 물린 모양이던데. 원래 전갈한테 물리면 다 그래. 독에 ‘감염’된 거지.’

민주의 이상 증세를 목격한 에단은 분명 그리 말했다.

민주와 로제의 목덜미에 남아 있던 붉은 흉터.

거의 동일한 정신 착란 증세.

그리고 연구소에서 보았던 로제의 일기.

그 모든 기억이 머릿속에서 퍼즐처럼 끼워 맞춰진다. 은하는 눈앞에 선 남자와 시선을 똑바로 맞추고 입술을 달싹였다.

“……예가임.”

그 순간 남자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말려 올라갔다.

“우선 앉아서 얘기할까? 네게는 묻고 싶은 것이 많거든.”

“일부러 모래 웅덩이를 만들어 내서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건가?”

“그래, 너도 나를 만나기 위해 뛰었던 거잖아? 백날 신기루를 향해 뛰어 봤자 여기까지 닿지 못할 것이 뻔하니 내가 직접 데려온 것이지.”

그리 말한 예가임이 가볍게 손짓하자 은하의 등 뒤로 모래가 화악 솟아올랐다. 그것은 마치 찰흙처럼 빚어지더니 이윽고 의자 형태로 변모했다.

그러나 은하는 미동도 하지 않고 여전히 예가임을 응시한 채였다. 의자에 앉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은하를 바라보며 예가임이 “뭐, 좋아.” 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그 역시 은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녀가 입고 있는 드레스를 말이다.

“……그 드레스.”

예가임이 말문을 열었다.

“누구에게 받았지?”

왜 그런 것을 묻는 걸까.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의도가 어찌 됐든, 은하가 그에게 할 말은 단 하나였다.

“네게 대답할 이유는 없어.”

촤아아악!

은하가 그를 향해 양산을 세로로 크게 휘둘렀다. 큰 동작이었던 탓에 위태롭게 고정해 두었던 어깨 쪽 드레스 천이 투둑, 뜯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그딴 것을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날카로운 양산 끝이 대기를 가르는 찰나, 그가 휙 뛰어올라 가볍게 공격을 피했다. 일반 몬스터였다면 방금 전 공격으로 몸이 두 동강 나고도 남았을 테지만 그는 아니었다.

“놀랐잖아.”

예가임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가볍게 착지하며 키득키득 웃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툭…….

그가 머리에 쓰고 있던 터번이 스르륵 풀리더니 바닥에 힘없이 추락했다. 날카로운 양산 끝에 터번 표면이 베인 것이었다.

그의 시선이 터번을 따라 또르륵 아래로 떨어졌다. 이내 그가 재미있다는 듯 싱긋 눈을 휘어 웃었다.

“빠른데?”

그가 다시 고개를 들어 은하를 바라보았다.

터번에 반쯤 가려져 있던 이마가 완전히 드러났다. 그리고 그 이마 중심에서 빛나는─.

‘별자리 모양의 표식.’

……조디악의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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