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86)화 (186/306)


#186. 대답은 하나
2023.02.02.


은하는 나무로 된 대문을 응시했다. 물감이 번진 듯 얼룩덜룩하고 지저분한 흔적이나 녹슨 황금 호랑이 문고리를 보아하니 본래는 굉장히 화려한 형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문 곳곳에는 누군가가 돌 따위의 딱딱한 물건을 던진 듯한 자국이 선명하게 흉터처럼 남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아무렇게나 덕지덕지 붙어 있는 노란 부적 탓인지, 입구부터가 스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대문만 보아도 마을 사람들이 이 집을 도깨비 집이라 부르는 까닭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사람이 살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대문을 살피던 은하는 잠시 고민했다. 안으로 들어가서 확인하려니, 혹시나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이 맞다면 실례일 것 같아 그럴 수 없었다.

좀 더 골짜기를 둘러보는 것이 좋을까? 도저히 산군의 거점으로 보이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주변에는 이곳 외에 다른 집은커녕 창고 한 채 보이지 않았다.

“실례합니다.”

그때 시우가 먼저 나서 대문을 살짝 두드렸다. 낡아 빠진 대문은 그것만으로도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려 버렸다.

이렇게 쉽게 문이 열린다고? 시우의 얼굴에 잠깐 당혹감이 스쳤지만 이내 침착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으니, 산군이든 아니든 내부의 누군가가 곧 나오겠지. 만일 안쪽에 사람이 있다면 분명 그럴 것이다.

그리고 시우의 예감은 적중했다.

“누구신지?”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사내가 나타난 것이다. 다만 집 안에서가 아닌 집 밖…… 정확하게는 초가집을 감싼 울타리의 모퉁이에서였다.

오자마자 울타리 위에 걸터앉은 그는 저승사자를 연상시키는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깊숙이 눌러쓴 삿갓 탓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로 추측하건대 젊은 남자였다.

“초대를 받고 왔는데.”

시우가 그를 향해 말하자, 삿갓이 만든 그늘 아래로 남자의 입술이 작게 열렸다.

“……초대?”

“심안은 이곳에 있나?”

심안. 그 이명에 남자가 삿갓을 슬쩍 들어 올렸다.

구레나룻부터 이어진 수염이 뺨뿐만 아니라 턱 전체를 덥수룩하게 뒤덮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 저승사자보다는 산적에 가까운 인상이었다.

탓!

남자가 울타리에서 뛰어 내리더니 시우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삿갓 그늘에 가려져 있던 남자의 눈이 드러났다.

“수령님께 초대받았다는 증거는?”

삿갓 그늘에 가려져 있던 남자의 눈이 드러났다. 명백한 경계가 서린 눈동자. 시우 뒤에 서 있던 은하도 보았다.

“여기.”

은하가 흰 봉투를 꺼냈다. 그 위에 수려하게 그려진 호랑이 수채화. 그것을 눈에 담은 남자는 조용히 뒤돌아서더니 대문 앞에 섰다.

쿵. 쿵. 쿵.

문고리를 잡고 세 번 대문을 두드리고는 손바닥을 가볍게 문 표면에 가져갔다.

휘이이이잉─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바람이 불어오는가 싶더니, 주변의 동백나무에서 붉은 꽃잎이 한겨울의 눈발처럼 거세게 휘날렸다. 반사적으로 질끈 눈을 감고, 수 초 후 다시 떴을 때.

“……!”

은하의 눈이 커졌다. 주변의 동백나무와 거대한 대문을 제외한 모든 풍경이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이건…… 이 남자의 고유 능력?’

지금까지 헌터 생활을 해 오며 방어막이나 차단막을 치는 각성자를 본 적은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결계 생성 능력이었다.

사람이나 물건 따위를 숨기거나 단숨에 옮기는 능력일 가능성도 있다. 아니, 어쩌면 단순한 환각일지도 몰랐다.

‘그 집으로 사람이 들어가는 걸 분명히 봤다는데, 대문을 여는 순간 온데간데없이 모습이 사라졌다던가.’

마을 사람들이 이 집을 도깨비 집이라고 부르는 진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대문 문지방을 넘어선 남자는 은하와 시우에게로 고개를 돌려 힐끔 눈짓했다. 들어오라는 신호였다.

그를 따라 대문을 지나자 그곳에 펼쳐진 풍경은 더욱 굉장했다.

한국 전통 가옥 형식의 고풍스러운 건물은 마치 사극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어느 양반집의 모습이었다.

축구를 하며 뛰어놀아도 될 정도로 넓은 뜰. 가장자리에는 맑은 연못이 자리해 있었고, 비늘이 반짝이는 잉어들이 헤엄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총 세 채의 집은 디귿 자 형태로 뜰을 감싸고 있었는데, 삿갓을 쓴 남자는 그 세 건물을 지나 뒤뜰로 은하를 안내했다.

“본채는 이쪽입니다.”

은하가 그를 따르고, 시우 역시 은하의 곁을 걷고 있는데.

“백랑께서는 이곳에.”

돌연 남자가 시우의 앞을 가로막았다. 시우가 무슨 소리냐는 듯 푸른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초대받은 손님은 여기 이분 하나이시니.”

남자는 단지 그렇게 말할 뿐 자리를 비켜서지 않았다. 시우의 시선이 남자의 어깨 너머 은하에게 닿았다.

별수 없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었다. 이곳은 산군의 영역. 그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이상 고집을 피울 수는 없었다.

“……잠시.”

주머니를 뒤적인 시우는 그곳에서 무언가를 꺼내 은하에게 건넸다.

“이거 챙겨 가세요.”

손바닥보다 작은 전자 기기. 은하가 기억하던 것보다 디자인이 새로워졌지만, 아마도 단말기인 것 같았다. 전 세계에 탑이 등장하면서 단말기도 업그레이드된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건…….’

은하는 시우가 단말기와 함께 건넨 조그맣고 동그란 물건에 주목했다. 캡슐 같기도 하고 총알 같기도 하고…… 언뜻 보면 초소형 폭탄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디에 쓰는 물건인가 싶어서 손바닥 위 그것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는데, 시우가 저벅저벅 다가왔다.

귀에 그의 입술이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시우는 남자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특별 제작한 휴대용 신호탄입니다.”

……신호탄? 은하가 손바닥에서 시선을 들어 시우를 바라보았다. 은하의 손바닥 위로 시우의 손바닥이 소리 없이 겹쳐졌다.

“쓸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혹시라도 안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이걸 바닥에 던지세요. 그러면…….”

시우는 손에 살짝 힘을 주어 은하의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았다. 신호탄을 놓치지 않게끔, 단단하게.

“제가 가겠습니다.”

* * *

쪼르륵.

장인이 빚은 듯 반듯하고 수려한 도자기 잔 위로 연노란 빛깔의 찻물이 담겼다. 잔에 미리 담아 두었던 말린 꽃잎이 중앙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몸을 녹이시는 데 조금 도움이 되실 겁니다.”

유엘은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은하에게 정중히 내밀었다. 꽃잎을 동동 띄운 향긋한 화차(花茶)에 굳은 몸이 조금 풀어지는 듯했다.

찻잔을 건네받은 은하는 조용히 시선을 들어 방을 둘러보았다. 으리으리하고 화려한 외관과는 달리, 실내는 비교적 단출했다.

생활에 필요한 가구 몇 개가 달랑 놓인 그곳에는 장식품이라고는 두 개뿐이었다. 조금은 밋밋하지만 어딘가 기품이 느껴지는 민무늬 도자기, 그리고 유엘의 뒤쪽 벽에 걸린 수묵화. 검은 산과 흰 털의 호랑이 그림이었다.

“오시는 길이 쉽지는 않으셨지요?”

유엘이 물었다. 본인도 초대장이 불친절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이곳은 엄밀하게 숨겨진 장소라서요. 아무쪼록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거점을 숨기는 데에 이유가 있나요?”

첫 만남 때와는 달리 은하는 유엘에게 존대를 했다. 겉으로 보아서는 민주보다 한두 살 정도 많아 보이는, 아직은 완전히 소년티를 벗지 못한 외모였으나 어쨌든 한 조직을 이끄는 수장. 게다가 은하와 같은 헤드 헌터 중 하나였다.

“숨기는 데에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굳이 알릴 이유가 없기 때문이죠.”

빙그레 웃은 유엘은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잔을 내려 두었다.

“그때 일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정식으로 사죄드리겠습니다. 혹시 그날 이후 몸에 불편한 점은 없으셨습니까?”

“네. 전혀.”

짧게 입을 연 은하는 찻잔에 시선을 고정한 채 덧붙였다.

“그날 다쳤던 건 제가 아니니까요.”

은하의 대답에 유엘이 살짝 움직임을 멈추었다. 당신이 사과해야 할 대상은 내가 아니라 에단이다. 마치 그런 말투였다.

하지만 은하가 그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종류가 아니었다.

“오늘 내가 여기까지 찾아온 건 사과를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은하의 단도직입적인 태도에도 유엘은 그다지 당황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입가에 미소를 유지한 채 이렇게 말했다.

“그렇습니까. 잘됐네요. 사실 저도 당신을 여기까지 부른 이유가 또 한 가지 있었거든요.”

졸졸졸…….

근처에 시냇물이 흐르는 걸까. 청아한 물소리가 얇은 창호지를 넘어 흘러들어 왔다.

앞에 놓여 있던 찻잔을 옆으로 치우고, 그가 고개를 들었다.

“먼저 말씀하시겠어요?”

“탑에 대한 정보를 주었으면 합니다.”

은하는 뜸조차 들이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

“……제가 그 질문에 대답할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 듯이 보이네요.”

유엘의 말에 은하는 부정하지 않았다. 유엘은 이유 모를 그녀의 확신에 의문을 품었다.

“왜죠? 아실 테지만 우리 산군은 그다지 정의로운 조직이 아닌데요. 헌터들의 길드와는 다르죠.”

“지금까지 유일하게 탑을 봉쇄한 자가 당신이라 들었어요.”

“그건 사실입니다만 우연과 운이 겹친 것일 뿐, 애초에 우리는 인류의 위협 같은 건 상관없고 세상을 구한 영웅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 않아요.”

그가 거짓을 말하고 있는 건 아닐 테다.

듣자 하니 산군의 조직원은 크게 둘로 나뉜다고 했다. 각성을 하지는 못했으나 오로지 수련만으로 각성자에 준하는 전투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 각성은 했지만 정식으로 협회에 헌터 등록을 하지 않고 어떠한 활동도 행하지 않는 자들. 두 쪽 다 모종의 이유로 칩거를 고집하고 있다고.

실제로 그들은 약 3년 전 남해안에 초대규모 언노운 게이트가 출현했을 때에도 협회의 지원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이 산 구석에 박혀서 무얼 하고 있었는지는 모른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지구에 탑이 나타났고 여태까지는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았던 산군이, 심지어는 그 우두머리가 직접 나서서 탑을 봉쇄했다. 그것도 인류 최초로.

어째서일까. 지금까지는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았던 그들이, 왜 탑이 나타나자마자 움직이기 시작한 걸까.

마음에 걸리는 지점은 또 한 가지 있었다.

유엘은 에단을 공격하면서도 은하를 포함한 그 외 인간은 일절 공격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에단에게 검을 겨눌 충분한 명목이 있었던 것이다.

‘에단이 탑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든가.’

거기까지 생각한 은하는 추측했다.

“산군이 게이트나 몬스터에 관심이 없다는 건 충분히 알겠습니다. 그런데─.”

찻잔에서 시선을 거둔 은하는 눈앞의 유엘을 바라보았다.

“탑은 닫고 싶은 거잖아요.”

아닌가요? 은하가 덧붙여 물었다.

아마 인류의 존망이라든지 그런 거창한 이유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엘은 탑을, 탑과 관련된 것을 제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산 어딘가에 숨어 지내듯 살던 산군이, 지금은 서서히 활동을 시작하고 있는 것일 테다. 그게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으니까.

“…….”

유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아주 헛짚은 것은 아닌 모양인지 분위기가 사뭇 바뀐 것이 느껴졌다.

그의 미미한 변화를 감지한 은하의 눈빛에 확신이 더해졌다.

“정보를 주세요. 아무거나 좋습니다. 탑에 관련된 정보가 필요해요.”

“만일 내게 정보를 얻는다면 그다음은요?”

유엘이 고개를 들었다.

“어쩔 생각이신가요?”

……어쩔 거냐고?

달칵, 은하는 잔을 내려 두었다.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새까만 눈동자가 유엘을 똑바로 담았다.

“닫겠습니다. 내가.”

대답은 하나였다.

* * *

“수령님께서는 아직이신가?”

별채 창문을 통해 본채 쪽을 기웃대는 남자는 ‘의영’. 산군의 일원이자 수여식 당시 부채를 꺼내 에단을 공격했던 남자였다.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어.”

공기놀이를 하듯 땅콩을 허공에 던졌다 받았다 반복하는 남자는, 마찬가지로 산군의 일원 중 하나인 ‘가란’이었다.

의영이 가란을 향해 볼멘소리를 냈다.

“넌 불안하지도 않냐?”

“수령님께서 직접 초대하신 거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하지만 그 여자, 수상한 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잖아. 게다가 옆에 그런 이상한 걸 달고 다니기까지 하는데 아무리 봐도 이상─.”

“입을…….”

그 순간, 의영이 홱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 끝에 있는 건 시우였다. 은하가 본채로 향한 뒤, 이곳 마루에 걸터앉아 있는 듯 없는 듯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그가 약 30분 만에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함부로 놀리는군.”

아차, 의영이 입을 닫았다. 워낙 조용히 있었던 터라 이곳에 백랑도 함께 있다는 것을 순간 깜빡 잊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었다.

일반 길드에 속한 헌터들이 게이트에 입장하여 몬스터를 잡고 경험치를 쌓는 동안, 산군은 이곳 지리산 천왕봉과 가까운 거점에서 고된 수련을 통해 강인한 몸과 맑은 정신을 갈고닦았다.

수련치가 일정 수치에 달하게 되면 가장 먼저 변화하는 것은 촉각이었다. 타인이 단순히 신체에 닿지 않아도 피부로 살기라든가 경계심, 애정, 혹은 그 사람이 가진 특유의 기운까지도 크고 작게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의영은 흑염의 프린세스에게 비범한 기운을 느꼈다. 그 뒤에 있던 분홍색 남자에 비하면 미약한 수준이었으나 그녀 역시도 무릇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굳이 말하자면 몬스터의 그것과 닮은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만일 백랑이 나서서 그녀를 대변하지 않았더라면, 의영은 그녀가 괴담 속에 나오는 존재라고 오해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확신은 서지 않았다. 그녀의 진짜 정체가 무엇인지. 그런데…….

“다시 한번 그딴 말을 입에 담는다면 그때는─.”

위협적이라기보다는 높낮이 없이 무덤덤한 말투. 시우의 시선이 베어 버릴 듯 날카롭게 의영에게 향한다.

“산군을 적으로 간주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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