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81)화 (181/306)


#181. 불청객 (1)
2023.01.28.


얼음이 내리꽂힌 땅 주변으로 새하얀 서리가 앉는 것이 보였다. 얼어붙은 땅 위로 검은 그림자가 겹쳐진다.

켈록, 기침을 뱉은 의영은 이쪽을 향해 가까워지는 검은 구두 한 쌍을 발견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시선을 서서히 들어 구두의 주인을 확인하자 그의 눈이 일순 커진다.

“당신은─.”

날렵하게 뻗은 눈매, 한겨울의 호수처럼 차갑고 고요한 눈동자. 서리가 내려앉은 듯 백색으로 물들었던 머리카락.

“……신시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은하가 중얼거렸다.

그에 반응한 걸까. 시우의 머리카락이 마치 눈이 녹아내리듯 서서히 본래의 검푸른 색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시우는 은하 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대로 정면을 향해 걸어 심안 앞에 우뚝 섰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 이곳에서 오늘 수여식이 열린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테고.”

그다지 감정이랄 게 실려 있지 않은 건조하고 나지막한 목소리. 그것은 은하가 기억하는 그대로였으나 어쩐지 조금 더 낮아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알기로 산군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이런 분란을 일으킬 정도로 정신이 나간 조직이 아닌데 말이야.”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차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시우가 주변을 스윽 훑었다.

가벼운 개량 한복 차림새를 한 세 남자. 가장 오른쪽에 선 남자는 시우와 함께 글로벌 랭킹에 있는 심안. 그리고 그 뒤에 가만히 서 있는, 붉은 한복의 호리호리한 남자는 가란. 검은 한복에 키가 큰 남자가, 아마도 의영.

그들을 차례로 응시한 시우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마땅한 이유는 있겠지?”

그 물음에 대답한 것은 심안이 아니라 의영이었다.

“수여식 도중 근처에서 소동이 있었습니다. 탑과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것과 지금 이 상황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지?”

“그야…….”

의영이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닫았다. 저 멀리, 이쪽을 향해 뛰어오는 무리가 보였기 때문이다.

“심안 님!”

늑대의 길드원으로 추정되는 남자 셋과 박제휘 매니저, 그리고 센터 직원이 또 세 명이었다. 직원 중 한 사람이 유엘 앞에 섰다.

“센터 쪽 사건이 정리된 것 같습니다. 지금 트릭스터 님을 포함하여 일부 헌터들이 협회의 지휘 아래 현장을 수습하고 있답니다.”

……뭐라고? 의영은 예상치 못한 보고 내용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분홍색 머리카락의 남자 쪽을 한 번, 그리고 유엘 쪽을 한 번 쳐다본다. 늘 그렇듯 검은 천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는 탓에 유엘의 표정을 제대로 읽을 수 없었지만, 의영만큼 동요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일반인 피해는?”

유엘이 협회 직원에게 물었다.

“의식 불명인 자가 7명 정도 있다지만 다행히 사망자는 없다고 합니다.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요.”

“……그렇습니까.”

유엘은 다른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슈우욱.

그의 손에서 푸른 검이 사라졌다. 그리고 시우 쪽을 향해 똑바로 서서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오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미안합니다.”

“사과할 대상이 잘못된 것 같은데.”

시우의 말이 옳았다. 유엘은 아무 말 없이 은하 쪽으로 스르륵 시선을 옮겼다.

“죄송합니다, 흑염의 프린세스. 당신을 휘말리게 만든 건 의도한 바가 아니었으나 이것은 명백한 우리 산군의 불찰입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리 말한 유엘이 의영을 향해 힐끗 눈짓했다. 의영은 흠칫하더니 이내 상체를 깊이 숙였다.

“……죄송합니다.”

유엘과는 반대로 조금은 불만이 섞인 듯한 목소리였지만 허리를 90도로 꺾어 인사하는 모양새는 분명한 사과였다.

그러나 심안도, 의영도 정작 사과해야 마땅한 자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은하는 그들의 사과를 받아들이기에 앞서 에단 쪽을 확인했다. 애초에 사과를 받을 생각은 없는 듯 이쪽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심지어 그토록 심각했던 부상은 그사이 피가 멎은 듯했다.

오히려 겉으로 보기에는 은하 쪽이 더 엉망진창이었다. 나비 여인과의 전투도 있었던 데다 심안의 칼에 의해 머리카락까지 일부 잘려 나갔으니 그럴 만도 했다.

“…….”

은하는 제게 고개를 숙인 의영과, 그 곁에 선 심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들이 에단을 공격한 이유에 대해 확실하게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보는 눈도 듣는 귀도 많았다. 섣불리 이야기를 꺼내기 힘들었다.

‘어렴풋이 그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고.’

제자리에 우두커니 선 은하를 향해 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추후에 치료 비용을 포함한 책임을 지도록 하겠습니다. 이쪽에서 조만간 사람을 보내죠.”

유엘은 제 휘하의 두 사내에게 눈짓했다.

사라락─

푸른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유엘이 멀어진다. 두 사내는 은하와 에단 쪽을 힐끗 쳐다보더니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유엘을 따라 자리를 벗어났다.

그렇게 점차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중,

‘에단.’

은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다행히 피가 멎었다고는 해도 부상이 심각했으니. 그녀가 에단을 향해 황급히 고개를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선배.”

겨울 공기를 닮은 기척이 훅 다가오는가 싶더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차갑고 단단한 두 팔에 몸이 감겨 있었다. 곁에서 “우왁!” 하는 제휘의 비명이 들린 것도 같다.

다음 순간, 은하는 시우가 자신을 뒤에서 껴안았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다소 당혹스러운 얼굴로 목을 돌려 그를 바라보는데, 정작 은하 본인보다 더 당황한 것은 주변에 있던 늑대 길드원들이었다.

그들은 마치 희귀한 자연 현상을 보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가 않는지 눈을 비비는 자도 있었다. 그들을 향해 얼른 눈 감으라는 듯 휘휘 손짓하는 제휘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신시우.”

은하는 제 어깨를 감싼 두 팔에 슬쩍 손을 올렸다. 이만 놓으라는 뜻이었다.

“……아.”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걸까. 짧게 신음한 시우가 한 박자 늦게 스르륵 팔을 풀었다.

“죄송, 합니다.”

머리를 쓸어 넘기는 그의 푸른 눈에는 당혹감과 쑥스러움이 서려 있었다. 자신이 먼저 끌어안아 놓고는, 누가 보면 은하가 그런 줄 알 법한 얼굴이었다.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시우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할 것이다. 방금 전 심안과 대화할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정작 마주 보고 서니 할 말을 고르지 못하는 듯 시우의 시선이 여기저기로 움직였다. 하고 싶은 말도, 듣고 싶은 말도 많았지만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되니 도통 정리가 되지 않았다.

열렸다가 닫히기를 몇 번이고 반복한 입술이 겨우 내뱉은 말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다친 곳은 없습니까?”

은하를 향한 물음이었지만 눈은 쉽사리 그녀를 향하지 못했다.

“난 괜찮아.”

태연한 대답이 돌아오고 나서야 그의 눈이 겨우 은하에게 닿았다. 그의 푸른 시선이 그녀의 상태를 훑듯 천천히 움직이더니, 이내 일부 잘려 나간 옆 머리카락에 닿았다.

뚫어져라 그것을 응시하던 중,

“대표님.”

늑대의 길드원 중 하나가 쭈뼛쭈뼛 시우에게 다가왔다. 그제야 시우는 은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서서히 등을 돌렸다.

“우선, 자세한 이야기는 돌아가서 하도록 하죠. 준비해.”

“예, 마스터.”

시우의 명령에 남자가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전형적인 상사와 부하의 모습. 그러고 보니 후드 티와 청바지 따위의 캐주얼웨어를 즐겨 입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 눈앞의 시우는 깔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꽤 출세했나 봐.”

은하가 무심히 뱉은 말에 시우 대신 제휘가 불쑥 끼어들어 답했다.

“이전의 대표님이 아니세요. 우리 대표님의 지난 3년간의 업적을 들으신다면 아마 헌터님께서도 깜짝 놀라실 겁니다.”

자, 우선 가시죠. 제휘는 은하의 등을 떠밀었다.

미리 주차해 둔 차로 걸어가던 은하는 문득 협회장과의 미팅이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걸음을 멈추었다.

“이대로 돌아가도 되는 건가요?”

“예, 그쪽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알아서 정리해 두겠습니다.”

제휘는 상황을 살피며 대답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산군과의 마찰도 있었던 모양이고…… 어찌 됐든 수여식이 무사히 종료되었으니 목표는 달성했다. 지금부터는 대표님과 헌터님의 대화가 최우선이었다.

제휘는 몇 걸음 앞 시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우리 대표님,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으실까……. 말주변이 없고 무뚝뚝하신 분이니, 마음과는 별개로 입이 움직여 주지 않아 답답하실 테다.

‘이럴 때야말로 내가 나서야 할 차례겠지.’

제휘는 그들의 성공적인 재회를 돕기 위해 굳은 결심을 했다.

“타시죠.”

차에 타기 직전, 시우는 직접 은하에게 차 문을 열어 주었다. 그 덕분에, 먼저 차 앞으로 뛰어가 준비하고 있던 제휘가 할 일을 잃고 멍하니 두 눈만 깜빡였다.

“고마─.”

……워. 그리 말하려던 은하가 멈칫 굳었다. 차에 올라타려는 은하를 휘릭 스치고 지나간 분홍색 그림자 탓이었다.

시우가 열어 준 문으로 가뿐히 차에 올라탄 이는, 뒤쪽에서 조용히 그들을 따라 걷던 에단이었다.

‘하느님, 맙소사!’

맞다. 이 사람이 있었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에단의 행동에 어처구니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소름이 다 돋았다. 비명이 새어 나올 뻔한 입을 가까스로 틀어막은 제휘가 본능적으로 휙 시선을 돌려 시우의 눈치를 보았다. 시우가 풍기는 기운이 심상치가 않았다.

은하와의 재회에 지금까지 에단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시우였다.

틀림없다. 이자가 제휘가 말했던 그 ‘획득물’일 테다. 까맣게 잊고 있던 일을 이제야 상기한 시우의 미간에 불쾌한 주름이 졌다.

얼려 버릴 듯 싸늘한 눈빛에도 아랑곳없이 차에 탄 에단은 은하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보란 듯이 툭툭 옆자리를 두드렸다.

“은하, 뭐 해? 타지 않고.”

피범벅인 그의 손이 깔끔한 카 시트 위에 닿으며 핏자국이 선명히 묻어났다.

시우의 주변으로 차갑고 매서운 바람이 일었다. 그것을 느낀 제휘가 꽝꽝 얼어 버린 얼음처럼 굳었다.

“크, 크흠…….”

차마 시우를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는 제휘는 그는 삐거덕삐거덕 움직여 냉큼 운전석에 올라탔다. 난 몰라, 모른다고.

시우는 차 문을 잡은 채 명령하듯 짧게 굵게 입을 열었다.

“내려.”

그러나 에단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은하에게만 시선을 고정한 채, 얼른 타라는 듯 옆자리를 두들긴다.

빠직─

아슬아슬하게 연결되어 있던 무언가가 끊기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 듯했다. 시우의 모발 끝이 새하얗게 번지려던 순간,

“나는 앞에 탈게.”

은하는 시우를 지나쳐 조용히 조수석 문을 열었다. 주어진 현 상황에서는 나름대로 현명한 결단이었으나, 그 선택의 결과는 꽤 끔찍했다.

“…….”

“…….”

에단과 시우는 졸지에 뒷좌석에 함께 나란히 앉게 된 것이었다.

안전벨트를 맨 은하는 백미러를 통해 뒷좌석의 풍경을 힐끗 바라보았다.

팔짱을 낀 채 석상처럼 움직이지 않는 시우와, 시우 반대편 창문에 비스듬히 턱을 괴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에단. 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가시 방벽이 자리해 있는 듯했다.

“어, 어쩐지 차 안이 좀 춥지 않습니까? 하핫, 저만 그런가요……?”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그, 그렇죠? 제휘는 슬그머니 히터를 틀었다.

그럼에도 차 안은 도통 따듯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16749043316005.pn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