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180)화
(180/306)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8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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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산군(山君)
2023.01.27.
“응? 말해 봐, 어떻게 죽일 건데?”
놀리는 듯 가벼운 목소리.
잠깐 굳어 있던 유엘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크게 검을 휘둘렀다.
부웅!
푸르른 검의 잔상이 허공에 둥글게 그려졌다.
“아얏.”
에단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치 얼굴에 상처를 입었다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꽁꽁 감쌌던 그가, 몇 초 후 빼꼼 붉은 눈을 드러냈다.
가느다랗게 눈매를 휘며 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방금 건 농담.”
완전히 드러난 에단의 얼굴에는 상처가 없었다. 피한 것이었다. 그것도 완벽하게.
일격에 그를 죽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반인이라면 피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였다. 적어도 스치기라도 했어야 정상이었다.
아니, 검이 가슴을 뚫었는데도 저렇듯 멀쩡히 서 있는 시점에서부터 확신한 일이었다.
──눈앞의 그는, 인간이 아니다.
“…….”
유엘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유엘은 인간이 아닌 자와 싸운 경험이 있었고, 또한 승리했다. 만일 승산이 없다 생각했더라면 이곳까지 그의 뒤를 밟아 쫓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자세를 바꾼 유엘이 에단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매섭게 다가온 검날에 에단의 눈매가 가늘어졌고,
파앗!
이번에는 유엘이 사라졌다. 하지만 에단과 같은 종류는 아니었다. 에단은 충분히 그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을 수 있었으니까.
“……?”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에단을 향해 달려드는 유엘이 여러 명처럼 보였다. 환각? 그게 아니라면 분신? 확실한 것은, 눈앞의 이 조그만 인간이 생각보다 실력자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결코 에단에게 위협이 되리라는 뜻은 아니었다.
휘익! 휘릭, 휙!
에단은 가볍게 상체를 뒤로 꺾어 제게 날아드는 다수의 검날을 차례로 회피했다. 그렇게 마지막 검까지 손쉽게 피해 버리는데,
크르릉!
어디선가 맹수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찰나 에단은 빠르게 주변을 확인했다. 맹수는커녕 새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서 부웅 휘둘러진 검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반원 형태의 푸른 잔상을 남겼다. 그런데 마지막 공격만큼은, 그 잔상이 조금 달랐다.
‘……호랑이?’
호랑이 형태를 한 잔상. 이것도 환각의 일종일까? 에단의 입가에 웃음기가 사라지는 순간,
콰직!
붉은 핏방울이 시야에 흐드러지듯 튀었다. 가까스로 왼팔을 들어 공격을 막아 내려고 했으나 왼팔이 호랑이의 이빨에 뜯겨 버린 것이었다.
‘환각이 아니었군.’
에단은 왼팔을 들어 그곳의 상처를 확인했다. 반쯤 뜯겨 나간 살점이 금방이라도 뚝 떨어질 듯 위태롭게 덜렁거린다.
마치 거추장스러운 액세서리를 다루듯 그것을 움켜쥐고 단숨에 으드득 뜯어냈다. 그 과정에서 에단은 미세한 표정 변화 하나 보이지 않았다.
상처 부위로부터 새빨간 피가 콸콸 쏟아진다.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 핏방울들은 에단의 발밑에 기어코 작은 웅덩이를 만들어 냈다.
아래를 무심히 응시하던 에단이 시선을 들어 눈앞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바닥에 떨어진 피보다 붉은 두 눈동자에 얼핏 차게 식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리고.
스르륵…….
에단의 커다란 손이 유엘을 향해 느릿하게 뻗어진다. 그것은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유엘의 시야 정중앙까지 도달했고, 이제 ‘힘’을 방출하기만 하면 됐다.
그런데,
움찔─
유엘을 공격하기 바로 직전, 에단의 기다란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약속해. 아무런 사고도 치지 않겠다고.’
“…….”
에단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석상처럼 가만히 굳어 버린 에단을, 유엘은 놓치지 않았다.
파지지짓─!
그가 쥔 검의 형태를 따라 푸른 전류가 일었다. 마치 번개처럼 빠른 속력으로, 그가 검을 휘둘렀다.
일반인이었다면 즉사할 위력. 그러나 눈앞의 남자는 죽지 않을 것이다. 이건 그런 확신을 담은 한 방이었다.
콰아앙!
벼락이 떨어지듯 바닥으로 내리꽂히는 검. 그 여파로 주변에 자욱한 흙먼지가 일었다.
검이 꽂힌 그 자리에서 푸슈슉 흰 연기가 솟아올랐을 때, 유엘은 비로소 자신의 공격이 빗나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홱 고개를 돌려 에단의 그림자를 찾는다. 기척은 왼쪽에서부터. 자욱한 흙먼지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유엘은 그곳을 향해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횡단한 검이,
콰아앙─!
왼쪽 틈을 가로로 가르듯이 베어 내고,
콰지지직!
에단을 쫓아 다시 오른쪽에서 내리꽂는다.
콰과광─!!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공격에 안개처럼 뿌옇던 흙먼지는 이제 한 치 눈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어졌다.
“하아, 하아…….”
유엘의 어깨가 가쁘게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럴수록 검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며, 감각을 세워 주변 기척을 확인했다.
‘북서쪽. 거리는…… 아마도 2m 남짓.’
유엘은 검을 땅에 끌며 그쪽으로 걸었다. 날카로운 검의 날이 땅 위 자갈을 스치며 스산한 소리를 냈다.
검을 끊임없이 휘두르며 공격을 가했지만 그중 타격감을 느낀 것은 두 번뿐. 손끝 감각으로 미루어 봤을 때, 아마도 슬쩍 스친 수준이 분명했다. 남자는 대부분의 공격을 회피했고 큰 부상을 입지 않았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유엘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상대가 ‘그 존재’가 맞다면, 쉽게 쓰러트리지는 못할 것이라고는 예상한 바였다. 그러나 치명상 하나 입히지 못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더 놀라운 점은 따로 있었다. 그렇게 회피하면서도 상대는 단 한 번도 반격해 오지 않았던 것이다.
순간 이동을 했다고 착각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는 자였다. 유엘이 앞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진즉에 눈치챘을 테고, 그가 공격에 치중하고 있는 사이 얼마든지 틈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 텐데…….
‘어째서?’
불쑥 의문이 들었다.
“뭐 해? 벌써 끝이야?”
흙먼지 사이로 장난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퍼뜩 정신을 차린 유엘이 검을 쥔 손에 다시 힘을 주는 순간이었다.
멈칫.
‘……다른 기척이 느껴진다.’
건조하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며, 분홍색 머리 남자와는 또 다른 체취가 코에 닿는다. 왼쪽을 향해 비스듬히 고개를 돌리는
순간,
타닥…….
신발 밑창이 자갈을 밟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주변을 에워싼 흙먼지가 아직은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상태. 그 뿌연 공간을 틈타, 가느다란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에단? 거기 있어?”
은하였다.
매캐하게 현장을 뒤덮은 흙먼지 속을 걷던 그녀는 그곳에서 두 개의 그림자를 발견했다.
에단으로 추측되는 장신의 그림자. 그리고 그것보다 조금 더 작은…… 소년의 그림자였다.
우선은 에단으로 여겨지는 그림자를 향해 달음박질했다.
“에단?”
그를 발견한 은하의 눈이 극명하게 커졌다.
“어라, 은하네.”
에단이 힐끔 시선을 돌려 은하를 바라보았다.
“찾았잖아. 어디 갔다 왔어?”
평소와 다름없이 예사스러운 목소리였다.
그러나 은하는 그 물음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모습이 전혀 평소와 같지 못했으니까.
은하의 시선이 그의 가슴팍에 닿았다. 마치 심장이 뚫린 듯 선명하게 남아 있는 핏자국. 그뿐만이 아니었다. 군데군데 찢어진 옷자락과 선명한 생채기들은 둘째 치고, 살점이 뜯겨 나간 왼쪽 팔은 출혈이 심각했다. 땅에 그림처럼 이어진 새빨간 핏자국으로 그가 움직인 경로를 확연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은하는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장소 때문이 아니었다.
‘……도대체 누가.’
에단과 직접 겨루어 본 적은 없었지만, 그가 범상치 않은 전투 능력치를 가졌다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아무리 몸 상태가 심각했다고 한들, 은하가 고전했던 미노타우로스를 상대로 상처 하나 없이 전투를 마친 에단이었다.
그뿐인가. 에단은 ‘그’ 아스트를 정리했다.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이 아니니 그가 아스트를 죽였는지 어딘가에 가두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찌 됐든 에단이 그에게 어떤 짓을 한 이후 네뷸러가 봉쇄되었으니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그런 에단을 이렇게까지 궁지에 몰아넣은 상대가 있다니.
“너 왜…….”
은하가 더듬더듬 입술을 달싹이자 에단이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휘이잉.
바람이 불어오며 그의 분홍색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휘날렸다. 그 순간 은하는 다음 말을 잇는 것도 잊고 제자리서 쩍 하니 굳어 버렸다.
‘약속해. 거기서 아무런 사고도 치지 않겠다고.’
──설마, 하고 생각하는 그때였다.
“흑염의 프린세스, 군요. 오시지 않을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저벅,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에단의 근처에 또 하나의 그림자가 있었단 사실을 상기한 은하는 에단을 감싸듯 등 뒤로 숨긴 채 퍼뜩 고개를 돌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은유엘. ‘산군’을 이끌고 있습니다.”
흙먼지가 걷힌 그곳에,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작은 소년이 나타났다.
“세간에는 심안이라 알려져 있지요.”
심안. 그 이명에 은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휘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기억에 오류가 없다면 그가 아마 인류 최초의 탑 봉쇄자일 것이다.
“흑염의 프린세스…… 아니, 차은하 헌터. 지금 등 뒤에 숨기고 있는 것이 어떤 존재인지, 당신은 그걸 알고도 감싸고 있는 건가요?”
“무슨 뜻이지?”
“정말 모르십니까.”
“…….”
거듭된 질문에 은하가 입을 다물었다. 검은 천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심안의 두 눈은 은하를 꿰뚫고 있는 듯했다.
정적이 내려앉은 공간. 바람마저 멎은 그 고요 속에서, 검은 천에 가려진 유엘의 ‘눈’은 보았다.
그녀를 감싸고 있는 기운이 조금 달라지는 것을.
“……당신, 알고 있었─.”
정적 끝에서 유엘이 다시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이었다.
“수령님!”
타다닷!
두 쌍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한복 차림의 두 남자. 유엘의 왼팔과 오른팔 격인 가란과 의영이었다.
유엘 앞에 선 그들은 재빠르게 눈을 굴려 현재 상황을 파악하는 것처럼 보였다. 무언가를 감지한 의영이 한복 소매에서 부채를 꺼내 들었다.
“수령님, 이쪽은 제가.”
유엘이 무어라 이야기도 하기 전이었다. 늘 그렇듯 성질이 급한 의영이 부채를 펼쳤다. 손바닥만 하던 부채는 펼치는 순간 물을 먹은 스펀지처럼 그 크기가 배증했다.
촤아악!
그는 에단을 향해 거대한 부채를 휘둘렀다.
“의영!”
유엘이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는 이미 늦었다. 부챗살 사이사이에 숨겨져 있던 작은 표창이 마치 유도탄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에단에게 날아갔다. 그런데 다음 순간.
투두둑…….
공중의 표창이 죽은 나방처럼 바닥에 힘없이 추락했다.
“……!”
부채를 휘두른 장본인, 의영이 눈을 크게 떴다. 표창이 날아드는 순간, 은하가 에단을 막아섰고 양산으로 단숨에 표창을 튕겨 냈던 것이다.
다만 미처 막아 내지 못한 소수의 표창이 있었고, 그 탓에 그녀의 머리카락 일부가 잘려 나갔다.
사라락─
새까만 실과 같은 은하의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공중에 휘날린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크게 다칠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흑염의 프린세스, 왜…… 컥!”
의영이 멍하니 입을 연 순간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은하의 등 뒤에 있던 에단이 어느 틈에 의영에게 다가가 그의 목을 으스러트릴 듯 움켜쥐었다.
“선을 넘었구나.”
읊조리듯 나지막이 입을 여는 에단. 온몸에 쭈뼛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서늘한 음성이었다.
“으, 으윽!”
의영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그 손 놓으십시오.”
스릉─
그에 상황을 지켜보던 유엘이 에단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그들의 동료 가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에단은 오히려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우드득.
뼈가 꺾이는 살벌한 소리가 들렸다. 의영의 목에서 나는 소리인지, 그것을 쥐고 있는 에단의 손에서 나는 소리인지는 모른다.
“크헉…….”
의영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간다. 잠시 망설이던 유엘은 검을 바로 쥐었다. 이대로 둔다면 의영의 목이 꺾여 버릴 것이다.
유엘이 에단을 향해 검을 휘두르려던 찰나, 은하가 입을 열었다.
“에단, 그만해.”
멈칫.
유엘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것 같았던 에단이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은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에단에게 다가가 그의 팔목을 강하게 붙잡았다.
“놔.”
“…….”
에단의 눈이 힐끔 은하를 향했다. 평소와는 다른 빛의 붉은 눈. 그것을 바라보며 은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놓으라 했─.”
콰지지지직─!
그 순간, 무언가 날카로운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무언가가 그들을 향해 날아든 것이었다. 정확하게는, 의영과 에단 사이를 향해서였다.
공격을 피해 의영의 목을 놓은 에단이 스르륵 고개를 돌렸다.
에단과 의영 사이를 막듯 대각선으로 내리꽂힌, 투명하고 푸르고 서늘한 것. 고드름처럼 기다란 창의 형태를 한 그것은 바로,
‘얼음?’
드라이아이스처럼 새하얀 한기를 내뿜는 얼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