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170)화
(170/306)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7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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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30년이 지나도 여전히
2023.01.17.
정신이 몽롱해지는 이 향기는 바로 이준의 고유 능력 페로몬의 일종이다.
그의 신체에 닿거나 그가 부리는 뱀에게 물리는 것이 아니라면 상태 이상 ‘매혹’에까지 걸리지는 않는다. 다만 개미나 나방 따위의 작은 곤충들, 미숙한 각성자, 각성하지 못한 일반인은 향기만으로도 충분히 그에게 미혹될 수 있었다.
그 때문일까, 이준의 주변에는 어디선가 잠들어 있던 작고 하얀 겨울 나방들이 팔랑팔랑 날개를 움직이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마치 그를 흰 별 가루가 감싼 듯한 모습이었다.
‘어째서 여기에 백이준이.’
혹시 은하가 돌아온 것을 알게 된 백이준이 그녀도 모르는 사이에 또 뱀을 붙여 둔 것일까?
‘……감시를 위해서?’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방금 이준의 행동은 마치 저것으로부터 자신을 감싸는 것처럼 보였다.
‘왜?’
이준은 천천히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느릿한 움직임이었으나 크게 부풀었다 줄어드는 가슴팍은 그가 그다지 평온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준의 긴 재킷 자락이 부드럽게 휘날리며 차가운 아스팔트 위로 구두 굽 소리가 뚜벅뚜벅 이어졌다.
‘서울시 반하동 287-14번지. 그 묘비를 돌봐 달라. 그것이 제 상사가 제게 내리신 명령이었습니다.’
이준의 수행인이라 밝혔던 남자. 그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이준은 은하가 아닌 바닥에 쓰러진 ‘그것’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상체를 숙여 녀석의 숨이 완전히 끊어진 것을 확인하는 듯했다.
“……다친 곳은?”
여전히 ‘그것’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이준이 물었다. 숨이 차는지 말을 끝내자마자 그가 느릿한 한숨을 뱉었다.
그 순간 은하의 표정이 묘해진다. 마치 걱정하기라도 하는 듯한 목소리가 은하가 기억하는 이준의 목소리와 너무도 닮았기에.
하마터면 “응, 너는?” 하고 대답할 뻔했다. 예전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
그러나 은하는 입을 다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이준이 스르륵 상체를 일으켜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은회색 눈동자. 은하의 기억보다는 조금 더 가라앉은 빛깔이었다.
파사삭…….
발밑에 쓰러져 있던 ‘흑염의 프린세스’가 픽셀화되어 공중에 흩어졌다. 잘게 부서진 듯한 가루가 소금처럼 공중에 흩날렸다.
그것을 본 순간 은하는 확신했다. 역시 저것은 사람이 아니라 몬스터였던 것이라고.
몬스터 사망 후의 패턴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몬스터가 특별한 보상 아이템을 가지고 있어 확률에 의해 그것을 드롭하는 경우. 둘째, 아무런 아이템도 드롭하지 않고 사체만 남는 경우.
두 가지 경우 모두 아이템을 획득하거나 시간이 지나면 픽셀화가 되어 사체가 말끔히 사라진다.
이렇듯 죽이자마자 사라지는 경우는 특별한 케이스였다. 은하는 지금까지의 경험에 의거하여 생각했다.
─이것은, 높은 확률로 ‘본체’가 아니다.
껍데기뿐인 꼭두각시이거나 복사본. 그것도 아니면 환영(幻影). 셋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았다.
은하의 날카로운 오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지금 이곳에, 이 녀석의 본체로 느껴지는 기척은 없었다.
“쓸데없는 짓을 했네.”
흩날리는 가루 속에서 은하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기회였는데.”
“……정보? ‘저것’과는 대화가 불가능해.”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니.
이준은 은하를 꼭 닮은 괴담 속 ‘흑염의 프린세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하지만 은하는 분명 ‘저것’이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비록 일반적인 대화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가능할 수도 있었어.”
“아니, 불가능해. 몬스터잖아.”
그냥 두었다면 저것은 분명 은하를 공격했을 테다. 이준은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은하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너도 지금 나와 대화하고 있잖아.”
“…….”
이준이 멈칫 굳었다.
은하는 그 앞에서 높낮이 없는 어조로 다시금 입을 열었다.
“너, 내가 몬스터라고 생각하잖아.”
“아니, 난…….”
“그래서 뱀까지 붙여 둔 것 아니었어?”
휘이이잉─
다시 바람이 불어왔다.
페로몬의 잔향이 은은하게 코끝을 스친다. 이준이 은회색 눈동자를 들어 은하를 바라본다.
어째서일까. 은하를 응시하는 이준의 표정이 흐렸다. 아니, 마치 무언가를 꾹 억누르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슬며시 쥔 이준의 주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건…….”
스르륵 주먹을 푼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가, 이내 다시 닫았다.
마주쳤던 시선이 다시 어긋났다.
“…….”
“…….”
그리고 긴 침묵이 찾아왔다.
그 침묵 끝에서, 은하는 천천히 뒤돌아섰다.
우연히 ‘흑염의 프린세스’와 마주쳤고 어떻게든 정보를 얻을 수 있으려나 싶었는데 그것이 무산되었다.
하지만 저 녀석이 괴담의 존재가 맞다면, 추측하건대 아마 ‘사망’이라는 개념도 없을 테다. 그야말로 유령처럼 또다시 어디에선가 모습을 나타낼지도 몰랐다. 게이트 내부에서 몬스터가 재생성되는 것처럼 말이다.
‘만일 녀석에게 ‘사망’이라는 개념이 있었다면 이렇듯 몇십 년 동안 꾸준히 헌터들 입에 오르락내리락하지도 않았겠지.’
그동안 ‘저것’을 쓰러트린 헌터가 단 한 명도 없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역시 정보가 필요하겠어.’
두 눈으로 자신과 꼭 닮은 얼굴을 본 이상 모른 척하고 있기도 힘들었다. ‘저것’이 자신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아야겠다.
다만 막연히 ‘저것’과 다시 조우할 날을 기다리기보다는, 어떻게든 주변을 수소문해서 괴담에 대해 알고 있는 자를 찾아보는 것이 빠를 것이라 생각했다.
‘돌아가자.’
이준이 ‘흑염의 프린세스’를 쓰러트려 버린 이상, 여기 머물러도 더 얻을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 오늘 은하가 이곳에 온 이유는 괴담 때문도 이준 때문도 아닌, 에단을 찾기 위해서였으니까.
이준에게서 등을 돌린 은하가 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은하야, 난…….”
등 뒤에서 이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수천 번이고 이준에게 불렸던 이름일 텐데 참 낯선 기분이 드는 것이 말이다.
“으, 은하야, 나는…….”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는 마치 흐느끼는 것처럼 느껴져서, 단호하게 등을 돌렸던 은하는 저도 모르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깨달았을 때는 이미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춘 뒤였다.
생각해 보면 늘 그랬다. 뒤에서 겁에 질린 듯,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듯 그가 떨고 있으면 은하는 늘 걸음을 멈추어 뒤돌아보았다.
‘백이준, 괜찮아?’
그리고 손을 뻗어 그를 일으켜 주었다. 그때는, 그 시절에는 그랬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난 괜찮아, 백이준.”
건조한 한마디.
단지 그것만을 남기고 은하는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잠깐……!”
타닷, 조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급하게 은하를 쫓은 이준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흰 셔츠 아래 숨겨진 가슴이 크게 오르락내리락하며 그의 입술 사이로 흰 입김이 거칠게 피어올랐다.
“……왜?”
은하가 짧게 물었다. 왜 막아서느냐고.
그러자 긴 속눈썹에 그늘이 진 그의 눈가가 붉게 물드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색소가 옅은 은회색 눈동자가 흐릿하게 번졌다.
아랫입술을 짓이기듯 꾹 깨물었던 그가 이내 토해 내듯 말문을 열었다.
“──미안해.”
툭. 투둑.
그의 뺨을 타고 유리구슬과 같이 투명한 눈물이 방울져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땅 위로 빗방울처럼 후드득 떨어지는 그것들을 따라 은하의 시선 역시 아래로 천천히 떨어졌다.
“미안해, 은하야. 정말…… 미안해.”
그리고 다시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본다.
슈트 재킷을 걸친 넓은 어깨는 마치 길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사과할 자격조차 없다는 걸 알아. 내가 너를, 은하 너를…… 알아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은하야, 난…… 나는…….”
이준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손등을 들어 눈가를 가렸다. 그 아래로 구슬 같은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져 내린다.
최대한 울음을 참아 보려는 듯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붉은 입술이 희게 번질 정도로 세게 깨물어도, 잔뜩 억눌린 목소리가 기어코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이준은 지금 은하에게 사과하고 있었다. 즉 용서를 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건 용서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적어도 은하에게는 그랬다.
그들에게 일어난 오해와 엇갈림은 누구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그저 세월이 그만큼 흘렀기 때문에.
그날 은하는 이준을 구했기 때문에. 홀로 남은 이준이 그 긴 시간을 버텼기 때문에.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난 후에야 은하가 돌아왔기 때문에.
서운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이 변하기에 충분한 세월이다. 기억과 마음 역시 변하지 않으리란 법은 없으니까.
다만 그것이, 아주 조금 쓸쓸했을 뿐.
은하는 스르륵 그를 지나쳤다.
“……!”
검은 머리카락이 눈앞에 나부끼는 순간 이준은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세상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S급 헌터 마에스트로에게 이렇게 나약하고 한심한 모습이 있다는 것을.
하지만 은하는 이 모습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시절과는 입고 있는 옷도, 서 있는 위치도, 서로의 상황도 모두 달랐지만 30년이 흘러도 내가 나인 듯, 그도 그런 것이다.
이준은 멀어지는 은하를 향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이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시금 아래로 내렸다. 이어서 그의 고개 역시 툭, 하고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이제는 사과하기도 너무 늦어 버린 걸까. 뿌연 시야 가운데, 아스팔트 위로 떨어지는 눈물 자국이 겹치고 또 겹친다.
“여전히 울보네.”
그 순간, 가까운 곳에서 건조한 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앞에 툭 하니 다가오는 검은색 구두.
이준은 더듬더듬 시선을 들어 올렸다. 이미 저 멀리 걸어간 줄 알았던 그 애가 바로 눈앞에 서 있었다.
다 큰 성인 주제에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는 이준. 그런 이준을 차마 혼자 두지 못하고 걸음을 되돌려 그의 앞에 서는 은하.
“일어나, 백이준.”
사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30년, 혹은 그 이상이 흘렀어도.
* * *
인천항 근처, 인적이 드문 어느 골목.
타다다닷─
휴대전화를 손에 꼭 쥐고 달리던 남성이 어느 순간 멈춰 섰다. 조금 전, 은하에게 도움을 받았던 바로 그 남자였다.
그는 최근 들어 랭킹 1위 흑염의 프린세스가 귀환했다는 소문을 믿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랬기 때문에 늦은 퇴근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검은 드레스의 여자를 보고 그녀가 바로 한국 최초의 로프티 헌터이자 1세대 헌터 차은하일 거라고 확신했다.
사인을 요구하는 그에게 ‘흑염의 프린세스’는 대뜸 양산을 휘두르며 공격을 가했다. 반사적으로 그것을 피하긴 했지만 양산 끄트머리가 어깨에 스치며 상처를 입었다.
어깨에서 떨어지는 피를 본 순간, 그의 머릿속을 스친 것은 ‘흑염의 프린세스 괴담’이었다.
눈앞의 검은 여자가 랭킹 1위 차은하가 아니라 괴담 속 흑염의 프린세스라는 것을 깨달은 뒤에는 이미 늦어 있었다. 남자는 도망치려고 했으나 따돌리는 것은 무리였다.
이렇게 죽는 건가, 하고 단념했을 때 나타난 것이 바로─.
‘도망가세요.’
그 귀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평범한 복장의 여성이었다. 그는 그녀의 도움으로 무사히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후우.”
뛰던 것을 멈추자 양산에 스친 어깨 쪽 상처가 욱신거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상처 따위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남자는 손안에 꼭 쥐고 있던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았다. 액정 빛에 비친 그의 얼굴에서는, 이제 공포나 두려움 따위 찾아볼 수 없었다.
‘대박……!’
휴대전화에 찍힌 사진을 확인한 남자는 한쪽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곳을 벗어나기 직전, 긴가민가하는 마음으로 사진을 몰래 찍길 정말 잘했다. 너무 긴장해서 딱 한 장밖에 못 찍었지만.
흰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검은 머리카락의 여자 사진이었다.
어두운 밤인 데다 오늘따라 달이 밝았던 탓에 역광이었지만 이 정도면 뚜렷하게 찍힌 편이었다. 비록 사진에 찍힌 건 옆모습이었지만 해당 남성처럼 그녀의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단번에 알아볼 것이다.
남자는 그 자리에서 당장 인터넷 어플리케이션을 켰다. 재빠르게 액정을 두드리던 손가락이 잠시 멈추었다.
‘어디 보자, 제목은…….’
어둠 속에서 남자의 눈이 반짝 빛났다. 이어서 멈추었던 손가락이 다다닥, 바삐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제목] 인천항에서 랭킹 1위 흑염의 프린세스 만난 썰 푼다 (인증 有)
그 글이 ‘화제의 글’로 메인에 걸린 것은, 그로부터 이틀 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