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16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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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99 흑염의 프린세스 (16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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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익숙하고도 낯선
2023.01.10.
“돌아왔으면서 왜 연락을 안 해요! 진짜 너무해! 언니, 진짜, 내가, 으흑……!”
은하의 품에 안긴 아연은 벌써 30분째 엉엉 울고 있었다. 덕분에 은하의 상의가 소나기를 맞기라도 한 듯 쫄딱 젖어 버렸지만, 은하는 차마 아연을 내치지 못했다. 그녀가 너무나도 서럽게 울었던 탓이다.
예상치 못한 그들의 방문에 처음에는 당황했다. 제휘나 성윤이 그들에게 알린 것일까? 하지만 그들은 결코 은하의 허락을 받지 않고 주변에 그녀 소식을 떠들고 다닐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연은 오늘 오전 너튜브에서 우연히 ‘몬태나주 흑염의 프린세스 영상’을 보았다고 했다. 영상 속 은하를 본 그녀는 ‘어머, 이건 우리 언니가 틀림없어!’ 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오피스텔까지 찾아왔다고.
그렇게 오피스텔까지 오는 길에, 마찬가지로 영상을 보고 같은 생각을 한 민주와 마주친 거라고.
사실 은하는 몰랐지만, 그들은 종종 이 오피스텔을 방문했다. 따라서 제휘와도 이전보다 꽤 안면을 튼 상태였다.
“내가, 끅, 울 언냐를 못 알아볼 리가 없잖아요오오……! 다들 그 몬스터랑 울 언냐가 똑같이 생겼다고 하지만……! 흑, 그 X끼는 언니보다 훠어얼씬 못생겼단 말이야아아……!”
은하는 다소 서투르지만 최대한 부드러운 손길로 아연의 등을 토닥여 주며 힐끔 옆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귤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이제는 제법 청년 티가 나는 민주였다.
민주를 보니 그제야 3년이라는 세월이 조금 실감이 됐다. 아연과 제휘는 그렇다 치더라도, 중학생이었던 민주가 고등학생이 될 정도의 세월이었으니 말이다.
“키가 좀 컸네.”
은하가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자 지금까지 꾹 울음을 참고 있던 민주의 눈에서 또르륵, 하고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네.”
민주는 손등으로 힘차게 그것을 닦아 내고는 방긋 웃었다.
“……채소, 많이 먹었어요.”
웃는 얼굴을 보니 여전히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기억 속 그대로의 민주였다. 그 앞에서, 은하도 비슷한 미소를 머금었다.
“잘했네.”
“흑, 누, 누나아…….”
그 말을 방아쇠로 민주도 타다닥 은하에게로 뛰어들었다. 이제는 한계인 모양이다.
“야! 저리 안 꺼져!”
“비켜, 이제 내 차례야.”
“차례가 어디 있어?”
감동의 재회도 잠시, 아연과 민주는 은하의 품속에서 짐승처럼 서로를 물어뜯고 싸우기 시작했다. 만나기만 하면 싸우더니, 그건 3년이 지나 조금 더 어른이 된 이후도 마찬가지인 모양. 그 사실이 기쁜 한편─
“…….”
은하의 얼굴에 곤란함이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 말린담.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띠리리리리─
벨 소리가 들렸다.
휴대폰도 초인종도 아니었다. 이건, 거실 벽면에 위치한 인터폰 소리였다.
「안녕하세요, 여기 1701호인데요.」
“아, 네.”
옆집이었다.
「애 우는 소리 좀 안 나게 할 수 있나요.」
──그리고 클레임이었다.
* * *
밤 11시가 다 되어 가는 늦은 시각.
하늘에서는 펑펑 눈이 내리고 있었다. 시간이 늦은 만큼 주변을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었고, 바닥에 소복이 쌓인 눈 위에는 단 한 사람의 발자국만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은하의 오피스텔 근처 가로등 아래.
“…….”
빛을 잃은 은회색 눈동자는 오롯이 한곳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피스텔 입구를 향해서였다.
‘요한, 잠시 할 이야기가 있어. 들어가도 될까?’
어젯밤 안드레아가 이준을 찾아왔다.
그의 방문이야 매일 있는 일이었으니 놀랄 것은 없었다. 이준은 늘 그렇듯 침대에 몸을 반쯤 기댄 채 그를 맞이했다. 식사를 하라는 둥 미국이 어떻다는 둥 그런 이야기는 들을 생각조차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늘 혼자 이준을 방문했던 안드레아가 누군가를 데려온 것이다.
‘백 헌터님.’
데이빗 무어. 이준의 수행인 중 하나로, 이준의 명을 받아 오랜 기간 한국에서 은하 모친의 묘비를 돌보았던 자였다.
안드레아의 말에 따르면 데이빗은 몇 달 전부터 미국에 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새 돌아온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사이 그만큼 시간이 흘렀던 까닭일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그런 것 따위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이준은 금방 안드레아와 데이빗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런데.
‘백 헌터님, 그분께서 돌아오셨습니다.’
한마디. 오직 그 한마디가 시체의 그것처럼 죽어 있던 이준의 눈빛을 확연히 달라지게 만들었다.
‘너…… 지금, 뭐, 라고…….’
‘흑염의 프린세스. 차은하 헌터님이 돌아오셨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이준은 문자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역시 살아 있었어. 은하야. 은하야.
가슴이 벅차올랐다. 지금 당장 그 애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다친 곳은 없는지, 아무 일도 없었는지 물어보고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방문을 열기 직전, 이준은 문고리에 손을 뻗은 그 상태 그대로 쩍 하니 굳어 버렸다.
─과연 내게 그 애를 만날 자격이 있나.
불현듯 떠오른 그 생각이 그의 발목을 강하게 잡아챈 것이었다.
살아 있으면? 다친 곳이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쩔 텐가. 나는, 나는…….
‘감히, 몬스터 주제에.’
‘내가 말했잖아. 넌 헌터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그 애는 너 따위 괴물이 흉내 낼 만한 애가 아니야.’
또다.
또다시 그 애에게 겨누었던 수많은 칼날이 그대로 돌아와 그의 가슴을 난도질했고, 또다시 숨이 가빠졌다.
이준은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아니, 이제 와서 그 애를 찾아가다니. 내게 그럴 자격 따위 없다. 절대로 없었다.
그렇게 이준은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일어섰다가,
또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하루가 흘러 있었고, 또 정신을 차려 보니 이곳까지 와 있었다. 우습게도 말이다.
은하의 현주소는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 애에 관련한 정보라면 찾아보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준은 이곳에서 돌아가지도, 들어가지도 못한 채 오래도록 한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은하야.”
닿지도 않을 테지만 한 번 그 애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재회한 뒤로 한 번도 제대로 불러 본 적 없었던, 하지만 늘 부르고 있었던 바로 그 이름이었다.
한참을 그곳에 우두커니 서 있던 이준은 서서히 몸을 돌렸다. 돌아가자. 역시 이곳에 오는 것이 아니었다.
와 봤자 자신은, 아무것도 못 할 테니까. 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럴 자격 따위 없으니까.
“───.”
그렇게 몸을 돌리는 순간, 뒤쪽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가 싶더니, 저 멀리 오피스텔 현관의 자동문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이준은 저도 모르게 황급히 몸을 숨겼다.
은하.
은하였다.
쿵, 쿵, 쿵…….
한 번 내려앉았던 심장이 이번에는 미친 듯이 방망이질하기 시작했다. 석상처럼 가로등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이준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만을 내밀었다.
“옆집 아줌마, 엄청 예민하게 구네.”
짜증스럽게 투덜거리는 귤색 머리카락 소년과,
“네가 시끄럽게 구니까 그렇지.”
그런 그를 놀리듯 혀를 내미는 단발머리 여자,
“……눈이 오네.”
그리고 당연한 듯 두 사람 사이에 선 채 공중을 향해 느릿하게 손을 뻗는,
‘은하.’
그 애가 있었다.
30년 전, 이준이 기억하는 은하는 늘 낡은 군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30년이 흐른 후, 이준은 그녀가 까만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습만 보았다. 그러니 은하가 저렇듯 일상복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낯선 모습을 한 채 눈이 펑펑 쏟아지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은 은하는 손에 내려앉는 눈송이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아니, 이준은 알았다.
방금 그녀는 웃었다.
그것은 손바닥에 닿자마자 금방 녹아 버리는 눈송이처럼 아주 희미하고 가볍고 또 새하얀 미소였다. 그것은 정말이지 이준이 기억하는 그대로여서 도저히 그곳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째서.’
저렇게 그대로인데 어째서.
‘난 널 알아보지 못했을까.’
사아아아─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어왔다. 이준을 스쳐 지나간 그것이 저 멀리 그녀에게 닿았다. 그녀의 새까맣고 기다란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은하는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귀 뒤로 넘겼다. 그 행동조차 이준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그것이었다.
“안 되겠다. 내가 올라가서 한 소리 하고 올게요.”
“나도, 나도 갈래.”
민주와 아연이 씩씩대며 다시 현관으로 들어서려고 하자, 그런 그들을 은하가 저지했다.
“안 돼. 너희가 집에서 시끄럽게 구니까 민원이 들어온 거지.”
“아니, 이 집 비싼 곳 아니에요? 그 정도 방음도 안 되냐고.”
“그 정도로 너희 목소리가 컸던 거지.”
“그, 그치마안……! 좋은 걸 어떡해요!”
아연이 빼액,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으흑, 주, 죽은 줄 알았단 말이에요……!”
이제 좀 진정이 되었다 싶었더니 다시 감정이 북받쳐 오른 모양이었다. 그런 아연을 바라보는 은하의 눈빛에 일순 희미한 곤란함이 스친다. 왜냐면, 저 애는 사람을 위로하는 일에 그다지 능숙하지 못하니까.
하지만 이준은 알고 있었다. 사실은,
“……우리 눈사람 만들까?”
은하는 누구보다 사람을 위로할 줄 아는 애라는 것을.
다만 그것은 그녀의 미소처럼, 이 눈처럼, 굉장히 희미하고 옅어서 조금은 알아차리기 힘들 뿐이라는 것을.
이준은 못 박힌 듯 한자리에 선 채, 세 사람이 바닥에 쌓인 눈을 뭉쳐 데굴데굴 굴리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들이 눈사람을 완성하고,
아연이 완성한 눈사람 머리통을 민주에게 휙 던져 버리고,
민주가 어디선가 거대한 바주카를 꺼내 아연에게 눈 대포를 쏘아 대고,
그 모습을 보며 은하가 나지막한 웃음을 터뜨릴 때까지도,
이준은 제자리에서 하염없이, 그저 하염없이 그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