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47)화 (147/306)


#147. 미궁에서 마주친 붉은 눈
2022.12.25.


“그렇습니까.”

아스트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는 하늘에 뜬 두 개의 달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고 보니 당신은 문을 통해서 이곳에 왔다고 하셨지요. 사실 이곳에 문 같은 것은 없답니다, 은하.”

은하는 달빛이 비춘 그의 수려한 옆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스트는 달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어 갔다.

기분 탓일까. 주변 기온이 조금 바뀐 것 같다. 피부 위로 서늘할 만큼 차디찬 바람이 닿는다.

그 위를 유영하듯,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진다.

“여긴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이랍니다. 그리고 신이 가장 사랑하는 곳이기도 하죠. 그렇기 때문에 이곳은 신역. 선택받은 자만이 올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문 따위를 통해 보통의 인간이 손쉽게 들락날락할 수 있는 공간이, 결코 아니라는 거지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은하의 눈빛이 사뭇 달라졌다.

‘보통의 인간’. 그는 분명 그리 말했다.

“그럼 당신은, 이곳 사람들은 인간이 아니라는 소린가요?”

“…….”

아스트가 침묵했다.

졸졸졸……. 분수가 뿜어내는 물줄기 소리가 조용히 귓가에 흘렀다. 선이 고운 턱을 들어 하늘을 응시하던 아스트가 스르륵 시선을 돌려 은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당신도 그렇지 않습니까?”

“…….”

이번에는 은하가 침묵했다.

그 순간, 뇌리를 스치는 과거의 기억.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당신을 향해 묻습니다.]

[──언니는, 인간이고 싶으냐고.]

“……난.”

은하는 고개를 들어 아스트를 바라보았다. 그가 왜 그런 걸 묻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답은 정해져 있었다.

“난 언제나 인간이에요.”

그 어떤 상황에도 그랬을 거고 그러할 거라고 믿었다. 의심하지 않는다.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아스트의 푸른 눈과 맞닿은 검은 눈동자는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아스트는 그런 그녀의 눈을 깊이 살피다가 이내 웃었다.

“그렇군요.”

아스트는 허리를 굽혀 분수대에 흐르는 물로 손을 뻗었다. 새하얀 손바닥 위에 투명한 물이 담겼다.

“당신은 ‘지구’에서 왔다고 했지요?”

톡, 그의 수려한 손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내린다.

“곧 ‘지구’로의 통로가 생길 겁니다. 당신이 열고 온 그런 문 따위가 아니라, 제대로 된 통로가 말이죠. 당신이 어떻게 하여 통로가 생기기도 전에 이쪽으로 넘어온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무슨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푸른 눈이 허공으로 향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던 아스트는 천천히 턱을 쓸며 말했다.

“딱히 그렇지만도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가 작게 중얼거린 그때였다.

“……!”

팟!

갑작스럽게 피부를 뒤덮은 기이한 감각에 은하가 높이 튀어 올랐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콰직─!

방금 전까지 은하가 서 있던 바로 그곳에, 황금빛 칼날이 사납게 박혔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본능적으로 공격을 피하긴 했으나 상황 파악이 잘 되지 않았다.

아스트가 날 공격했어?

……왜?

만일 1초라도 늦었더라면, 저 칼날에 두개골이 두부처럼 썰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아찔한 기분으로 바닥에 박힌 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저벅,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스트였다.

“정말 아쉽습니다.”

스릉─

그는 땅에 박힌 황금빛 검을 뽑아 들었다. 달빛에 반사된 검은 서늘하고 아름답게 빛났다. 그림자가 진 그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말씀드렸지요. 이곳은 보통의 인간에게는 허용되지 않은 곳이라고.”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호의적이고, 상냥하고, 다정한 미소.

“잘못된 방법으로 이곳에 방문했지만, 당신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최초의 방문객. 전 예의를 지키려고 했습니다만─.”

솨아아아…….

바람이 불어온다. 동시에 그의 향기가 전해져 왔다. 비 온 뒤의 흙 내음을 닮은, 포근하고 따스한 향기.

그러나 낯선 향기.

“먼저 거부한 것은 당신입니다.”

타앗!

그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은하는 그로부터 한 걸음 물러섰다.

‘살기……!’

팟! 팟!

은하의 양어깨에 흑염의 피어올랐다.

계획한 것이 아니었다. 무언가 안면을 향해 날아오기 직전 자동으로 눈이 감기듯,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슈우우욱……!

위기를 느낀 흑염은 어떠한 명령 없이도 아스트를 향해 일직선으로 돌진했다.

그러나.

“……!”

은하의 눈이 커졌다.

분명 직격한 것처럼 보였던 흑염구가 아스트에게 닿자마자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말도 되지 않는 일이지만, 마치 그가 불길 자체를 흡수한 것처럼 보였다.

‘어떻, 게……?’

은하가 눈을 깜빡이는 순간이었다.

차르륵!

번쩍 정신을 차렸을 때, 은하는 온몸이 금빛 사슬로 묶여 있었다. 도대체 어느새에? 흑염이 날아가던 순간? 아니다. 그땐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아무런 전조도 느끼지 못했는데……? 방심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다. 은하가 미처 깨닫지 못했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이 사슬은 어디선가 날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저 눈 깜짝할 새 ‘나타난’ 것이었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공중에서 생성된 것처럼…….’

아주 오랜 기간 헌터로 활동하며 은하는 무수한 전투를 겪었다. 대부분은 몬스터였고, 일부는 은하와 같은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 어떠한 전투에서도, 은하가 이 정도로 속수무책으로 당한 적은 없었다. 적어도 자신이 무슨 공격을 받았는지 아주 파악하지 못한 적은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이렇듯 분명한 실력 차를 두고 전투를 벌인 적이 단 한 번도 없단 소리였다.

사슬에 칭칭 감긴 채, 은하는 시선을 들어 아스트를 바라보았다. 이 사슬 역시 은하의 화염처럼 각성자가 사용하는 ‘이능’의 한 종류일까?

알 수 없다.

그가 인간인지 아닌지도 여전히 확실치 않으며, 우호적이던 그가 갑자기 돌변하여 공격한 이유도 모르겠다. 다만.

“……지구로의 통로가 열린다는 것은 무슨 소리지?”

홱 고개를 든 은하가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여전히 온몸은 사슬에 칭칭 감긴 채였다.

“그런 걸 대답해 줄 이유는 없는 듯하군요. 왜냐면─.”

아스트가 저벅저벅 은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나 은하는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당신, 어차피 다시는 ‘그 채널’로 돌아가지 못할 테니까.”

“읏……!”

대체 그게 무슨! 은하는 어금니가 깨질 듯 이를 악다물고 온몸에 가득 힘을 주어 사슬을 끊어 내려고 했다.

그러나 불가능했다. 벗어나고자 하면 그럴수록 사슬은 마치 의지를 가진 양 은하를 점점 더 강하게 압박해 왔다.

“짧지만 즐거웠습니다, 인간.”

그가 웃었다.

붓으로 그린 듯한 턱선을 따라, 달빛을 머금은 기다란 금발이 미끄러지듯 흘러내린다.

그것은 여전히 인간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미소였다.

* * *

훈련생 시절, 은하를 담당하던 훈련관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힘을 단련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세상의 모든 존재를 둘로 나누는 것. 적 또는 아군으로 말이다.

당시 은하는 그 말을 가슴 깊이 담아 두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은하가 보통 상대하는 것은 인간이 아닌 몬스터였으니까. 지성도 인격도 언어도 가지지 못한 몬스터 말이다.

놈들은 무조건적인 적이었다. 생각할 필요도 없이 말이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당시 훈련관은 알고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살다 보면 헌터가, 인간이 싸워야 하는 것은 비단 그런 몬스터뿐만이 아니리란 것을 말이다.

‘조금 더 빨리 깨달았어야 했는데.’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러니 이유 없는 호의도 없을 거라고, 그렇게 일찍 생각하고 의심했어야 했는데…….

현대 생활을 하며 시우와 제휘, 그 밖의 사람들을 만나는 와중에 호의에 익숙해진 탓일지도 몰랐다.

“……젠장.”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은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 아스트. 마음 같아선 당장 아스트에게 돌아가 양산으로 그의 뒤통수를 세게 휘갈기고 싶었으나…….

‘무리야.’

그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강하기 때문에?

아니, 그게 아니었다.

은하는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어두침침한 이 공간은 어딜 가나 두꺼운 돌로 깎인 벽이 무수히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마치 미로 형태의 감옥에 갇힌 기분이었다.

은하는 자유를 찾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사슬에 속박되어 있던 몸이, 이곳으로 이동되면서 해방된 점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또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이곳은 어두컴컴하고 폐쇄적인 공간이긴 했으나 그다지 위험해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코를 찌르는 몬스터 특유의 악취도, 함정처럼 보이는 구석도 아직은 없다.

‘문제는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 인데.’

주변을 둘러보던 은하의 시선이 우뚝 멈추었다. 자신을 알게 모르게 따라다니던 뱀이 사라졌다.

여기까지 따라오진 못한 모양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길모퉁이에서 무언가 발견한 은하는 그것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뼈?’

뼈. 정확하게 말하면 두개골이었다.

크기나 형태로 보았을 때 인간의 것은 아니었다. 몬스터의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아마도 야수형…….

휙!

은하는 재빨리 사방을 확인했다. 여전히 몬스터의 악취나 흔적은 전무하다. 그뿐만 아니라 은하를 제외한 생명체의 기척 따위 일절 없었다.

은하는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려 정체불명의 두개골을 빤히 응시했다.

‘완전히 안전한 곳은 아니라는 거군.’

고요하고 어두운 공간이었지만 언제 돌변할지 모른다.

이곳에서 빨리 탈출하는 것이 좋겠다고 다시 한번 결심한 은하는, 돌로 만들어진 벽을 양산 끝으로 툭툭 두드려 보았다. 단순한 행동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벽의 두께가 가늠이 되었다.

‘이 정도면 가능해.’

그렇게 판단한 은하는 벽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다음 순간, 양손으로 양산 손잡이를 강하게 쥐고─.

“흡!”

뻐어어억!

강하게 내리쳤다.

“…….”

하지만 은하의 예상과는 달리, 돌로 된 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파괴력이 부족했던 걸까? 양산을 아래로 내린 은하는, 이번에는 벽을 향해 양산 대신 손바닥을 펼쳐 들었다.

슈우웅…….

하얀 손바닥 곁에 무수하게 몰려드는 검은 빛 무리. 흑염이었다. 올챙이처럼 작은 그것들이 모여 하나의 작은 블랙홀을 생성한 순간.

콰과과과광!

엄청난 폭발이 일었다.

그에 따라 시야 가득 자욱하게 퍼지는 흙먼지. 은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정면을 응시했다.

이윽고 흙먼지가 완전히 가라앉았을 때.

“……뭐야.”

은하가 작게 중얼거렸다.

흠집 하나 나지 않은 벽이, 그대로 시야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이전에도 이런 경험이 있었다.

[시스템이 언니를 ‘몬스터’로 인식하기 때문에.]

[그리고 몬스터는 게이트에 손상을 입힐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아니, 설마.

얼떨떨한 얼굴로 벽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데.

“……!”

휙!

은하가 돌연 왼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방금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가만히 서서 청각에 온 신경을 집중하자 이어서 또 한 번 같은 소리가 들려온다.

꾸르륵─

‘이건.’

은하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꾸르륵, 꾸륵…….

마치 비둘기의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굶주린 배에서 나는 소리 같기도 했다. 혹시 그게 아니면 몬스터의 소리일까?

굳은 듯 한 자리에 서 있던 은하는 그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소리의 근원지와 가까워질수록 양산을 쥔 손에 슬그머니 힘이 들어갔다.

‘피 냄새.’

은하는 콧잔등을 미약하게 찌푸렸다.

이윽고 마지막 모퉁이를 돌았을 때, 그 소리의 주인공과 조우할 수 있었다.

다만 그곳에 있는 것은 은하가 예상했던 그러한 몬스터가 아니었다. 솜사탕처럼 폭신하고 달콤해 보이는 핑크색 털…… 아니, 머리카락?

“……뭐야.”

휘릭, 체리처럼 새빨간 눈동자가 순식간에 이곳을 향했다.

사람. 은하 외의 또 다른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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