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1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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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99 흑염의 프린세스 (1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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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네 이름을 다오
2022.11.23.
가까이서 마주한 놈의 얼굴은 멀리서 볼 때보다 더욱 기괴했다.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의 립스틱을 훔쳐 바르기라도 한 듯, 입술 위로 아무렇게나 칠해진 붉은 물감.
왼쪽 입술부터 뺨까지는 녹은 것인지 썩은 것인지 안쪽 잇몸부터 치아를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히히, 히히히히…….
기묘한 웃음소리와 함께 믿을 수 없는 각도로 자유자재로 꺾이는 목.
녀석은 바닥에 닿을 정도로 기다란 팔을 질질 끌며 천천히 중앙으로 걸어왔다. 놈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시체 썩은 내가 진동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이름을 빼앗긴 자?’
녀석을 똑바로 응시하던 은하가 멈칫 굳었다. 그녀의 새까만 눈동자에 한순간 옅은 당혹감이 일렁였다. 왜냐하면,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첫째, 13번째 신수인 자신에 대해서는 타에 언급하지 말 것. 둘째, 당신의 이름을 자신에게 줄 것을 요구합니다.]
[말 그대로, 네 이름은 자신의 것이 되니 더 이상 네가 쓸 수 없게 되는 것이라 말합니다.]
은하도 이름을 빼앗긴 상황이었으니까.
그 순간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광대저씨의 목소리.
‘자네…… 자네가 왜…….’
그 반응은, 강력한 몬스터를 조우한 헌터의 반응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뭐랄까, 마치 아는 얼굴을 본 것 같은─.
“……!”
생각에 잠겨 있던 은하가 번쩍 시선을 들어 올렸다.
‘설마, 눈앞의 이 몬스터는…….’
──한때는 사람이었던 걸까?
확실한 근거랄 것까지는 없었지만, 한 번 머릿속을 헤집은 의심은 점차 확신에 가깝게 번지기 시작했다.
“자네……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광대저씨는 저글링을 멈추고 놈에게로 슬금슬금 다가가고 있었다.
“나요, 권삼용. 알아보지 못하겠는가?”
저 반응. 은하의 추측이 맞다면 지금 눈앞의 저 기괴한 몬스터는 역시…….
[던전 동기화 ▶ 52.1%]
툭.
‘이름을 빼앗긴 자’는 광대저씨의 말에 반응하는 대신, 기다란 두 팔로 땅을 짚더니 휙 다리를 들어 물구나무를 섰다.
끼긱, 끼기긱…….
얼굴 쪽으로 두 다리를 꺾어 어깨에 건 녀석은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며 목을 360도로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목이 회전하면 할수록 붉게 달아오르는 얼굴. 이윽고 떡하니 움직임을 멈춘 녀석이 뺨을 쩌억 찢으며 크게 입을 벌렸다.
[Lv.60 ‘이름을 빼앗긴 자’가 스킬을 사용합니다. ▶ 불 뿜기]
화르르륵─
광대저씨가 피할 겨를도 없이, 놈의 벌어진 입 사이에서 불길이 쏟아졌다. 역시 대화는 불가능한 듯했다.
탓!
광대저씨 앞에 선 은하가 재빨리 양산을 펼쳐 불길을 막아 냈다. 흑염에 휩싸여도 끄떡없는 양산이었기에, 이러한 일반 화염 따위는 손쉽게 튕겨 낼 수 있었다.
“아는 얼굴인가요?”
양산으로 불길을 막으며, 은하가 등 뒤를 향해 물었다.
“오래전 복계산에서 행방불명되었던 친우이네. 살아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이런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광대저씨의 말을 듣고 있던 은하는 점차 자신이 가졌던 추측에 대해 확신하게 되었다.
만일 눈앞의 이 기괴한 몬스터가 정말 인간이었던 존재라면 죽음 직전이나 이후 어떠한 외부 작용으로 인해 이 모습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또한 그 작용이란, 높은 확률로 ‘이름’과 연관이 있으리라.
‘그렇다면 설마 나도…….’
띠링!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어, 언니? 지금 뭔가 굉장한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에이, 아니지? 하고 고개를 빼꼼 들이밉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고양이가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소나기 같은 식은땀을 흘립니다.]
[내가 언니를 저런 모습으로 만들 리가 없지 않느냐며, 이름을 잃었다고 해서 모두가 저렇듯 몬스터로 변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마치 도둑이 제 발을 저리는 듯한 모습에 은하의 눈매가 가늘게 변했다. 그러다 입술을 달싹이려던 순간,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언니와 난 정당하게 계약을 맺은 것이고, 저자는 요정에게 홀려 이름을 빼앗긴 것이다. 그러니 같은 선상에 둘 수 없는, 아예 다른 상황이라고 강하게 주장합니다.]
……요정?
“아가씨!”
등 뒤에 있던 광대저씨가 다급하게 외쳤다.
“불 쇼 다음에는 칼 던지기야!”
“그게 무슨─.”
고개를 돌린 은하가 멈칫 입을 닫았다.
[Lv.60 ‘이름을 빼앗긴 자’가 과녁을 소환합니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다트 판을 닮은 거대한 과녁이 다수 생겨났다. 그리고…….
“으아아악!”
“뭐, 뭐야?! 이거?!”
각 과녁 위로 헌터들이 무작위로 소환됐다.
그들은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과녁 위의 수갑에 손발이 단단히 채워진 탓에 꼼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샤인 J! 보호막! 보호막을 중첩해서 걸어!”
과녁에 매달리지 않아 상황을 지켜보던 B급 헌터 건슬링어가 외쳤다.
“보채지 마! 나도 알고 있어!”
다급히 대꾸한 그녀는 지팡이를 거칠게 휘둘렀다. 그녀가 선 이곳으로부터 과녁에 매달린 그들까지의 거리는 멀지 않았다. 이 정도면 충분한 사정거리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무리 스킬을 사용해도 그들에게 보호막이 씌워지기는커녕, 아까 미리 걸어 두었던 기존의 보호막마저 벗겨지고 있었다.
“젠장……!”
기다리다 못한 건슬링어가 낮게 욕설을 읊조리며 총을 들었다.
탕, 타당, 탕탕탕!
몬스터를 향한 연이은 난사. 그러나.
[경고! 공연 진행 방해로 무대에서 강제 퇴장당합니다.]
삐─
경고음과 함께 떠오른 시스템창. 어떠한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건슬링어가 제자리에서 고꾸라졌다.
“……컥!”
허공에 생겨난 두꺼운 링이 그의 허벅지, 복부, 어깨, 목을 강하게 속박했다. 숨통이 막힌 그가 괴로운 듯 발버둥을 쳤지만 소용없었다.
[공연이 재시작됩니다!]
[Lv.60 ‘이름을 빼앗긴 자’가 스킬을 사용합니다. ▶ 칼 던지기]
휙! 휙! 휙!
놈이 과녁을 향해 세 개의 단도를 동시에 던졌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 이대로라면 과녁 위의 헌터가 크게 다칠 것이다. 어쩌면 즉사할지도.
‘위험해.’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인 은하는 짧은 찰나 주춤했다. 세 개의 단도가 이 수많은 과녁 중 어디로 날아드는지 빠르게 읽어 내야 했는데, 공중에서 휙휙 방향을 꺾어 버리는 탓에 궤도를 읽기가 쉽지 않았다.
“왼쪽부터 1번, 3번, 7번 과녁이네!”
등 뒤로 광대저씨의 외침이 들려왔다.
첫 번째, 세 번째, 일곱 번째? 은하는 그가 시키는 방향을 확인했다. 그리고.
챙! 챙! 챙!
양산을 휘둘러 단도를 튕겨 내는 것에 성공했다.
“다음은 여섯 개가 동시에 날아올 거야!”
광대저씨는 쉬지 않고 다시 외쳤다.
[던전 동기화 ▶ 60.2%]
[던전 동기화 ▶ 69.3%]
[던전 동기화 ▶ 72.8%]
이후로도 그는 놈이 던지는 칼의 개수, 목표 과녁을 은하에게 알려 주었다.
제아무리 칼의 속도가 빠르다 한들 은하가 쫓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미리 궤적만 읽어 낼 수 있다면 충분했다.
그 후로도 놈의 공격은 계속됐다. 대부분 서커스 공연을 주제로 한 공격이었다.
은하에게는 생소하기 짝이 없는 전투 방식이었지만, 공연 순서나 연출에 훤한 광대저씨의 도움으로 우위에 설 수 있었다. 하지만…….
‘끝이 나지 않아.’
은하는 살짝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이렇게 되면 틈을 타서 보스를 직접 공격하는 수밖에 없는데…….’
빈틈을 노려 보스를 공격한 다른 헌터들은 건슬링어가 그러했듯 온몸이 속박되어 ‘무대 퇴장’을 당한 상태였다.
억지로 공격에 성공한다고 하여도 놈은 눈 깜짝할 새에 재생할 것이다. 언데드형 몬스터의 대표적인 특징이었다.
‘어떻게 하지?’
[던전 동기화 ▶ 82.6%]
이제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위험을 감안하고서라도 놈의 급소를 노린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혹시라도 은하마저 ‘무대 퇴장’을 당하게 된다면 더 이상 승산이 없을 것이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놈의 공격을 회피하며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중, 은하는 문득 고양이의 말을 떠올렸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언니와 난 정당하게 계약을 맺은 것이고, 저자는 요정에게 홀려 이름을 빼앗긴 것이다. 그러니 같은 선상에 둘 수 없는, 아예 다른 상황이라고 강하게 주장합니다.]
‘요정……!’
은하는 던전 활성화가 되기 전 우연히 해치웠던 팅커벨, 연둣빛 날개의 ‘원혼의 탐식자’를 떠올렸다.
번쩍 고개를 든 은하가 재빨리 주위를 훑었다. 어딘가에 숨어 있을 ‘진짜’를 찾기 위해.
[Lv.60 ‘이름을 빼앗긴 자’가 스킬을 사용합니다. ▶ 맹수 조련]
크르르…….
검은 갈기를 가진 거대한 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날카로운 송곳니. 그 아래로 뚜욱, 침이 떨어져 내렸다.
당장에라도 돌진할 기세. 그러나 은하는 제자리에 가만히 선 채 목 주변을 더듬어 펜던트를 꺼냈다.
“추적.”
우우웅. 펜던트가 은은하게 빛난다. 은하는 손바닥으로 그것을 가볍게 감싸 쥐었다.
[Cast Spell ‘위치 추적’ 감지]
[당신은 ‘위치 추적’을 요청하셨습니다. 유물 ‘검은 장미 펜던트’를 활성화하시겠습니까?]
[추적 개체 파악 중. 해당 작업에는 다소 시간이 소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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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광대저씨가 짧게 외쳤다.
두두두두─
검은 갈기의 사자가 은하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은하는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선 채, 눈을 감고 주변 기척에 집중했다.
[던전 동기화 ▶ 90.7%]
맹수와의 거리가 코앞까지 좁혀진 순간.
[추적 개체를 발견했습니다. 좌표 134, 962. 즉시 안내를 요청하시겠습니까?]
황금빛으로 물든 홍채가 번쩍 드러났다.
타악!
사자의 이마를 뾰족한 구두 굽으로 지르밟고, 그것을 발판 삼아 공중으로 가볍게 도약한다.
[남은 거리 1m 미만]
[안내를 종료합니다.]
공중을 장식한 붉은 전구. 지금은 보인다.
포로롱…….
그 사이에 숨어 있는 어렴풋한 붉은 날개가. 개울가에서 보았던 연둣빛 날개의 ‘원혼의 탐식자’와는 조금 다른 외형.
눈이 마주치는 순간 은하는 확신했다.
‘놈이다.’
[Lv.60 ‘원혼의 지배자’가 도주합니다.]
파아아앗─!
검은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그 순간, ‘원혼의 지배자’가 움직임을 멈추고 은하를 향해 작은 입술을 뻐끔거리기 시작한다.
「내 친구야, 네 이름을 다오.
이곳은 안식의 땅, 네 이름을 이곳에 묻자.」
크와아아아아─!
고통스러운 비명. ‘이름을 잃은 자’가 이곳을 바라보며 절규하고 있었다. 찢어진 듯 벌어진 입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내 친구야, 네 이름을 다오.
우린 영원히 함께할 거야.」
스스스스. 검은 연기가 은하 주변을 감쌌다. 재빨리 땅에 착지했지만 검은 연기는 이미 은하의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내 친구야, 네 이름을 다오.
네가 원하는 건 뭐든 이뤄질 거야.」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놈은 지금 자신의 이름을 빼앗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 친구야, 네 이름을─.」
중얼중얼 주문을 외던 ‘원혼의 지배자’가 흠칫 몸을 떨었다.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파앗!
다시 한번 공중으로 높게 도약한 은하. 검은 머리카락이 대기를 가르며 넓게 휘날린다.
“미안하지만 줄 이름이 없어서.”
[던전 동기화 ▶ 98.9%]
[중단되었습니다. 필드가 원상 복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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