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1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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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99 흑염의 프린세스 (1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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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망자의 군락 (4)
2022.11.20.
은하는 힐끔 광대저씨를 쳐다보았다.
산 중턱에서 만난 그는 코끝이 빨개진 채 몸을 희미하게 떨고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추위에 몸이 언 것이 보였다.
만일 끊임없는 전투를 하고 있었더라면 열이 올라 저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은하는 그가 지난 3시간 동안 핵을 얼마 모으지 못했으리라는 사실을 짐작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여태 모은 게 고작 3개뿐이야.”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에 꽁꽁 언 손을 녹이며 광대저씨는 쓰게 웃었다.
눈앞의 새까만 모닥불은 은하가 대충 근처 나뭇가지를 모아 지펴 준 것이었다. 마침 잠깐 쉬려고 했던 참에 그가 짧게나마 몸을 녹일 수 있게끔 배려한 셈이었다.
타오르는 불길 곁에, 나뭇가지에 꽂은 마시멜로가 먹음직스럽게 구워졌다. 광대저씨가 미리 챙겨 온 것이었다.
그는 가장 맛있게 구워진 마시멜로를 잡고 은하에게 건넸다.
“먹게.”
“감사합니다.”
은하는 거절하지 않고 그것을 받았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 배가 고픈 상태였다.
이러한 자격시험 따위가 익숙하지 않았던 은하는 미처 음식을 챙겨 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훈련이나 토벌 시에는 항상 부대에서 알아서 비상식량을 챙겨 주었고, 현대에 나온 후로는 늘 제휘가 따라붙었던 까닭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것을 챙겨 온 광대저씨는 마시멜로에 입을 대지 않고 복잡한 눈빛으로 모닥불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지난번 촬영 때부터 느꼈는데…….”
허공에 너풀거리는 까만 불길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광대저씨가 힐끗, 다른 곳으로 눈을 옮겼다. 은하의 옆자리. 핵이 터질 듯 가득 담긴 보따리를 보며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가씨는 왜 그 정도 전투 능력을 가졌으면서 컨셉 헌터 일을 하는 건가? 아, 물론 이 일이 나쁜 일은 아니지만…… 아가씨라면 게이트 격파로도 충분히 먹고살 만해 보여서 말이네.”
마시멜로를 우물우물 씹던 은하가 짧게 답했다.
“전 컨셉 헌터가 아닙니다.”
“으응?”
머쓱하게 뒷덜미를 긁적이던 광대저씨가 은하에게로 눈을 돌렸다. 새까만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다시 한번 차분하게 부정했다.
“그냥 다들 그렇게 오해하는 거죠.”
“오해?”
“네.”
마시멜로를 다 먹은 은하는 모닥불을 향해 나뭇가지를 휙 던지며 덧붙였다.
“전 저를 컨셉 헌터라고 소개한 적이 없어요.”
“아…….”
잠시 말문을 닫은 광대저씨는 당시의 상황을 떠올렸다.
분명 그때 그녀는 자신과 함께 컨셉 헌터 석에 앉아 있었다. 몇 달 전의 일이라 흐릿해졌긴 해도 그녀가 PD나 작가를 찾아가 따져 묻는 것을 본 기억은 없었다.
“그럼 왜 그때 방송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나? 일반 헌터라고 말했다면 방송사 측에서도 어떻게 조치를 취해 주었을지도 모르지 않나.”
천천히 고개를 든 그녀가 광대저씨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컨셉 헌터가 나쁜 일은 아니잖아요.”
모닥불 때문일까, 햇볕조차 들지 않는 이곳에서 그녀의 흰 얼굴은 유독 밝았다.
“헌터에 컨셉이든 일반이든 그런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
광대저씨는 그 앞에서 말문을 잃은 듯 멍하게 눈만 깜빡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입꼬리도 빙그레 곡선을 그렸다.
“……그래, 그렇지. 아가씨 말이 맞아.”
모닥불로 시선을 떨군 그는 탁탁 소리를 내는 불꽃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이 아가씨라면…… 어쩌면.’
광대저씨는 왠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냥 자존심 따위 버리고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그녀는 이유나 조건 따위 묻지 않고 도와줄 것을.
그러나 이것은 시험, 즉 ‘경쟁’이었다. 더구나 그녀는 이미 혼자서 저만큼의 핵을 쓸어 담은 상태였다. 그 정도의 실력자란 소리였다.
전투 차원에서 자신은 그녀에게 하등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 뻔했다. 아니, 도움은커녕 발목이나 잡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그러니 그녀의 도움을 얻고 싶다면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쓸모를 어필해야만 했다.
모닥불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광대저씨는 이내 결심한 듯 고개를 들어 은하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혹시 나와 파티를 맺을 생각은 없나?”
“파티?”
은하 역시 힐끔 광대저씨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는 딱히 파티는…….”
“이것 말고도 내게는 식량이 많이 있네. 와이프가 이것저것 챙겨 주었거든.”
광대저씨는 자신의 배낭을 열어 은하에게 보란 듯 내밀었다. 그의 배낭 속에는 각종 쿠키나 캔디 등 군것질거리뿐만 아니라 김밥, 생수, 심지어는 소화제 따위의 상비약까지 들어 있었다.
“보면 알겠지만 혼자서는 다 먹기 힘들 정도로 양이 많아서 말이야.”
“…….”
은하는 배낭 속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전까지는 아무 생각 없었지만 막상 음식을 보니 배가 고픈 것 같기도 했다.
시험 종료까지 앞으로 약 7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다. 물론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고 해서 죽진 않겠지만, 가능하다면 제때 식사를 챙겨 먹는 편이 좋으리란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광대저씨는 자신의 배낭을 거두고 이번에는 은하의 보따리를 가리켰다.
“보아하니 짐이 상당히 많은 듯한데, 나라면 짐꾼 역할을 톡톡히 해낼 수 있네. 이래 봬도 컨셉 헌터 일이 없는 동안에는 짐꾼으로 벌어먹고 살았거든.”
그 외에도 그는 자신이 가진 깜짝 트랩(Trap)이라는 스킬로, 몬스터를 함정에 빠뜨릴 수 있다고 덧붙였다.
무지개 풍선으로 시야를 가리거나 나팔 소리를 크게 울리는 등의 방법으로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전투 불능 상태에 빠뜨리는, 고작 그 정도의 스킬. 한 방에 몬스터를 쓰러뜨릴 위력은 없으나, 쉬는 동안 주변에 트랩을 설치해 두면 그들이 오기 전에 미리 알아차릴 수도 있고 시간을 벌 수도 있다고.
은하는 광대저씨의 말을 가만히 들으며 고민에 잠겼다.
여기서 만일 거절해 버린다면 아마 그는 제대로 된 파티를 구할 수 없을 것이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거기까진 은하가 고려해 줄 의무는 없었지만…….
‘확실히 두 손이 자유로워지면 지금보다는 훨씬 전투가 편리해질 거야.’
인벤토리를 당장 비우기도 힘든 상황인 데다 앞으로 핵이 더 불어날 것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더군다나 저 배낭 속의 식량도 탐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김밥에서 솔솔 풍겨 오는 참기름 냄새를 맡는 순간, 아까부터 배가 꼬르륵꼬르륵 소리를 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은하에 비해 전투력이 현저하게 낮은 그에게 전투 지원을 바라는 일은 힘들 터. 즉, 다른 의미로서의 ‘짐’이 늘게 되는 셈이다.
결국 은하는 가장 중요한 점에 대해 물어보기로 했다.
“배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데요?”
“아가씨가 획득한 핵의 5%만 챙겨 주게. 아니, 1%만 챙겨 줘도 괜찮네.”
“……그걸로 충분하세요?”
“아주 충분하지.”
버스에서 들은 바로는, 다른 파티의 경우 5 대 5, 적어도 6 대 4의 분배 비율을 따르는 것 같았는데.
5%라면 은하가 100개의 핵을 얻으면 그중 5개를 나눠 주는 정도였다. 그쯤이라면 은하에게 있어서 실보다 득이 컸다.
일렁거리는 불춤을 가만히 지켜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은하가 이윽고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좋습니다. 단, 한 가지 더 조건이 있어요.”
은하의 새까만 눈이 힐끗 광대저씨를 향했다.
“전투 시에는 이유 불문하고 제 명령에 따라 주셔야 합니다. 크게 다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크게 다친다니. 고작해야 레벨 5에서 10 정도의 스켈레톤에게? 아무리 E급이라 해도 헌터는 헌터인데.
헌터에 컨셉이든 일반이든 그런 건 없다더니, 역시 이 아가씨도 색안경을 끼고 있었던 걸까…….
내심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광대저씨는 내색하지 않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겠네.”
그리고 약 30분 뒤.
은하가 그러한 조건을 건 까닭에 대해서, 광대저씨는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저, 저게 대체…….’
광대저씨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눈앞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달그락달그락…….
벌떼처럼 모여드는 스켈레톤. 광대저씨와 은하는 이미 오래전에 포위당한 상황이었다.
숲이 깊어질수록 놈들의 수가 급증하는 건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예상을 훨씬 뛰어넘을 정도로 많은 수에 광대저씨는 제 옆에 선 은하의 눈치를 살폈다.
“물러서세요.”
팟.
은하가 광대저씨를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지레 놀란 그가 움찔 뒷걸음질 치는 순간.
[Lv.5 ‘스켈레톤’이 목표를 포착하였습니다. 사격을 준비합니다.]
끼긱…….
원거리 공격형 스켈레톤들이 이곳을 향해 석궁을 당겼다.
피슈우웅─
같은 방향으로 일제히 발사된 화살에 광대저씨는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눈을 질끈 감았다.
소나기처럼 빗발치는 그것들을 향해 은하가 양산을 크게 부웅 휘둘렀다. 그리고.
투두두두둑…….
쏟아지던 화살들은 단단한 양산에 의해 반으로 꺾여 추락했다.
짧고 간결한 단 한 번의 움직임. 그것으로 충분했다.
볼품없이 박살 난 화살을 구두로 지르밟은 은하가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
넋이 나간 얼굴로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광대저씨.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그의 안위를 확인한 은하는 그제야 다시 놈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Lv.5 ‘스켈레톤’에게 강력한 지배의 힘이 깃듭니다. ▶ 재생]
[Lv.5 ‘스켈레톤’에게 강력한 지배의 힘이 깃듭니다. ▶ 재생]
[Lv.5 ‘스켈레톤’에게 강력한 지배의 힘이 깃듭니다. ▶ 재생]
광대저씨와 은하를 중심으로 커다란 원을 그리고 선 스켈레톤.
방심하는 순간 놈들의 화살은 다시 한번 망설임 없이 날아들 것이다. 은하는 둘째 치고 광대저씨가 벌집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터.
언제까지고 날아드는 화살을 제압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등을 지키면서 싸우는 일은 생각보다 까다롭다. 더군다나 녀석들은 끊임없이 재생할 것이니, 그럴 겨를조차 주지 않고 빠르게 끝장내야 한다.
20마리가 넘는 녀석들을, 단 한 번에.
우둑…….
은하는 양산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핏기 없이 새하얀 손등 위로 푸른 혈관이 불끈 돋아났다.
“숙이고 계세요.”
“……!”
은하의 짧은 한마디에 광대저씨는 바닥에 엎드리듯 황급히 상체를 숙였다. 이유를 물을 틈도 없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부우우웅!
양산을 쥔 은하가 제자리서 크게 한 바퀴 돌았다.
사라락─
마치 춤을 추는 듯한 모습.
흑단으로 지어진 드레스가 둥그런 우산 형태로 부풀어 오르고, 새까만 양산은 그보다 더 커다랗고 둥근 원을 그리며 공기를 가로지른다.
양산이 남긴 둥근 잔상. 그 위로 나부끼는 검은 머리카락. 그러나…….
‘몬스터들한테 양산이 닿지 않아.’
상체를 숙인 채 눈만 들어 상황을 지켜보던 광대저씨는 꿀꺽 침을 삼켰다. 양산의 길이가 짧아 도저히 이곳을 포위하고 있는 스켈레톤에 닿지 않았던 것.
달칵. 스켈레톤 중 하나가 또다시 석궁을 조준했다.
둥글게 회전한 은하가 제자리에 탓 하고 멈추어 서자, 놈들은 어떠한 신호도 없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피슈웅!
‘아, 안 돼!’
광대저씨가 번쩍 고개를 드는 순간이었다.
콰과과과과광─!
한 박자 늦게 들려온 엄청난 굉음. 방금 전 공격의 여파? 아니, 그것은 은하의 공격을 흉내 낸 고양이의 일격이었다.
굉장한 여진에 주변의 비쩍 마른 나무들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광대저씨가 슬그머니 다시 눈을 뜨자 그곳에는…….
“괜찮으신가요?”
초연한 얼굴의 흑염의 프린세스만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당연히 스친 상처 하나 없었다. 은하에게도, 광대저씨에게도 말이다.
“아, 아아…… 덕분에 난 아무렇지도 않네.”
광대저씨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너무 짧은 사이 일어난 일이라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다만 그는 보았다.
그녀의 까만 구두 아래 낙엽처럼 떨어진 화살 파편들을.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이 박살 난 가엾은 뼛조각들을. 그녀의 손에, 미세한 흠집 하나 없이 멀쩡한 까만 양산을.
광대저씨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전투 시에는 이유 불문하고 제 명령에 따라 주셔야 합니다. 크게 다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그 말의 진짜 의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