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아…….”
목이 꺾일 만큼 은하를 올려다보던 아연이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투둑투둑.
눈을 제대로 뜨고 있기 힘들 정도로 굵은 빗줄기. 그러나 아연은 굳은 듯 뻣뻣하게 은하를 응시하고 있었다.
빗줄기 사이로 두 시선이 오랫동안 얽혔다. 엉망인 모습으로 바닥을 뒹구는 아연의 모습. 그것을 물끄러미 주시하던 은하가 이번에는 등 뒤, 베르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뭡니까? 그 눈빛은.”
베르데가 조금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목격자가 있다고 한들 문제 될 것은 없었다.
한국을 포함하여 전 세계 곳곳에서 매해 열리는 헌터 옥션. 수많은 이능력자가 모여드는 곳에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없을 리 없었다.
물론 여기서 저 건방진 한국 헌터를 죽여 버리면 국제적 문제가 되겠지만, 이 정도 불화는 문제없을 것이다. 카를로스의 소환견들이 주변을 지키고 있기도 하니 경찰이 나타나면 알려 줄 것이다. 즉.
‘괜히 쫄 필요는 없지.’
심지어 이런 듣도 보도 못한 헌터에게 말이다.
“언니, 그냥 가세요.”
비틀비틀 상체를 일으킨 아연이 퉤, 붉은 침을 뱉으며 말했다.
베르데를 응시하던 은하가 다시금 아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은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마치 이렇게 묻고 있는 듯했다.
다친 곳은 없냐고.
괜찮은 거냐고.
“……상관 말고 가라니까.”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은하를 향해 아연이 다시 한번 말했다.
상태 이상 ‘침묵’이 곧 풀린다.
이제 상대의 능력도 다 파악한 후였다. 스킬이 돌아오기만 한다면, 아연은 쉽게 그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복수도 언제든지 가능했다.
그냥 앞으로 몇 분만 참으면 됐다. 그래, 몇 분만.
더군다나 F급 컨셉 헌터인 그녀가 그들을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연의 ‘침묵’이 풀리기도 전에 그녀는 아연보다 더 심한 꼴을 당할 것이다.
‘이 언니를 지키면서 전투하는 건 힘들 거야.’
아연의 스킬과 특성은 일대일 전투에 특화되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불리한 싸움에서, F급 헌터인 그녀의 존재는 걸리적거리기만 할 뿐.
그러니까…….
“그냥 가─.”
“말했잖아. 팸플릿 돌려주러 왔다고.”
“필요 없어요. 그건 그냥 언니한테 준 거니까.”
“빚을 돌려주러 왔단 소리야.”
“…….”
말문이 막힌 아연이 은하를 빤히 응시했다. 무표정. 속내를 읽을 수 없는 얼굴로 은하가 쓰고 있던 양산을 접었다.
또각.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요즘 헌터들은 고유 능력을 같은 헌터에게 사용하는 일이 빈번한가 봐.”
은하의 중얼거림에 베르데의 얼굴이 묘하게 굳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헌터요? 내 나라에서는 남의 물건을 훔치는 자를 헌터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는 얕은 웃음을 머금으며 한 걸음 은하에게 다가왔다.
“그냥 도둑이지.”
베르데가 덧붙였다.
“도둑?”
“당신이 감싸고 있는 그 소녀가 우리 아이템을 훔쳤어.”
“그걸 어떻게 알지?”
“그 애밖에 없으니까. 오늘 우리와 접촉한 사람이.”
당연하다는 듯 대꾸하는 베르데. 은하의 까만 시선이 그에게서 아연에게로 옮겨졌다.
‘그거 들었어? 1교시 체육 시간에 2반, 털렸다더라.’
‘강아연이네. 걔 맨날 체육 시간마다 배 아프다고 양호실 간다며. 그럼 딱 각이 나오지 않냐?’
‘아연아. 선생님한테만 솔직하게 말해 줄래? 왜 그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