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2)화 (2/306)

#02

낡은 군용 수송 차량이 가로등 하나 없는 비포장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경주. 창밖으로 보이는 이정표를 확인한 이준은 불안감에 젖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은하야, 경주에 가 본 적 있어?”

“아니.”

은하는 짧게 답했다. 손에는 맛도 영양도 없는 비상식량이 들려 있었다.

이준은 멋쩍게 웃으며 뺨을 긁적였다. 어제 입었던 상처가 아직 채 낫지 않은 손으로, 은하는 부지런히 음식을 입으로 나르고 있었다. 이쪽은 쳐다볼 생각도 없는 듯했다.

은하와 이준은 훈련소 동기였다.

그러나 이준은 아직 은하에 대해 모르는 점이 많았다. 이해할 수 없는 점은 더 많았다.

이를테면 오늘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데 저런 태연한 얼굴로 음식을 씹어 넘길 수 있는 점이라든가, 몇 개월 동안 함께 사지를 누빈 동료의 이름 하나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점이라든가 말이다.

차은하.

그녀는 확실히 일반 사람과는 무언가 달랐다. 원래라면 절대 가까워질 리 없는 성격이었지만 이준은 사실 은하를 동경하고 있었다.

그녀는 훈련소 시절부터 눈에 띄게 강했다. 페로몬이라는 별 볼 일 없는 고유 능력을 가진 자신과는 달리 그녀는 강력한 화염을 사용했다. 그야말로 전투에 최적화된 능력이었다.

만일 그녀가 없었다면 지난번 평택 게이트 투입 당시 자신은 아마 죽었을 테다.

‘어떻게 목숨을 건졌더라도 아마 불구가 되었겠지.’

그때 마주한 머리 세 개가 달린 늑대는 지금 생각해도 오금이 저렸다.

그 후유증이 채 낫기도 전에 다음 게이트가 있는 경주로 이동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준은 옆자리에 앉은 은하를 힐끔 쳐다보았다.

우물우물 소리도 없이 음식을 삼키는 모습을 한참 쳐다보다가, 다시 한번 말을 걸어 보기로 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다시 그녀와 대화할 기회가 생길지 모르는 일이니.

“줄곧 궁금했던 건데…… 은하 너 혹시 신수와 계약은 맺었어?”

“아니.”

“진짜? 왜? 엄청 강하니까 당연히 벌써 계약한 줄 알았어.”

은하는 잠깐 이준에게 시선을 두었다가 이내 다시 거둬 버렸다. 은하는 성격이 모난 것은 아니었지만 붙임성이 좋은 편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동기 중 최고의 엘리트 은하와 친해질 모처럼의 기회인데.

이준은 끈질기게 대화를 이어 가고자 했다.

“은하 너는 12신수 중에 용이 잘 어울리겠다. 제일 강하니까.”

“그래?”

“응.”

“…….”

“…….”

그리고 다시 대화는 단절되었다.

망했다. 아직 경주에 도착하려면 두 시간이나 남아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두 사람 사이의 벽은 생각보다 두꺼운 듯했다.

이준이 거의 포기 직전에 이르렀을 무렵이었다.

“……미국에서 왔다고 했지?”

남은 음식을 검은 봉투에 담으며, 문득 은하가 입을 열었다.

“어? 아, 응. 아버지가 미국인이거든.”

“그래?”

은하는 이준을 뚫어져라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금발이구나.”

“으응.”

그걸 이제야 눈치채다니. 이준은 어쩐지 조금 서운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내 삼키기로 했다.

“미국에 퀸리시 칼리지라고 알아?”

“아니, 처음 듣는데. 어디에 있는 대학이야?”

“샌프란시스코.”

나지막이 답한 은하는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내가 가려고 했던 대학이야. 애견 미용사가 꿈이었거든.”

“그런데 왜─.”

가지 않았어? 그리 물으려던 이준은 아차, 하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자신보다 한 살 어렸다. 즉, 그녀가 열아홉일 때 게이트가 열렸다는 소리였다.

“널 보니까 문득 생각이 나네.”

“미안.”

“왜 사과해?”

“그냥…….”

조금 소심하게 답한 이준의 눈이 힐끔 은하를 향했다.

어느새 이준에게서 시선을 거둔 은하는 턱을 괸 채 무심히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살짝 열린 창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바람에 은하의 긴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새까만 융단과 같은 머리카락이 어찌나 긴지 옆에 앉은 이준의 코까지 간질일 정도였다.

이준이 슬쩍 상체를 뒤로 움직이자, 은하가 이쪽을 쳐다보았다.

“…….”

그러더니 아무 말 않고 손목의 고무줄로 머리를 높게 올려 묶었다. 분명 피비린내가 배어 있을 줄로만 알았던 그녀의 머리카락에서는 이준과 같은 보급 비누 냄새가 났다.

피 칠갑을 한 채 몬스터를 썰어 대던 그 차은하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분한 얼굴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있잖아.”

이준은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나중에 우리 집 강아지 미용해 볼래? 비숑 프리제라는 견종인데, 이름은 윌리엄이야.”

“…….”

“아, 되게 순해.”

제안을 하면서도 조금 쑥스러워진 이준은 두 뺨을 슬쩍 붉혔다.

은하는 조금 커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창 너머로 한 방울씩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툭, 툭─

버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이윽고 거세게 변했을 때, 자그마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래, 좋아.”

빗방울 소리에 묻힐 정도로 아주 작고 희미한 웃음이었지만, 이준은 아마도 그 웃음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참. 내 이름은 백이준이야.”

***

과거를 떠올리던 이준이 힐끔 옆을 바라보았다. 벌써 그녀와 함께한 지도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 고된 세월은 그들을 꽤 번듯한 헌터로 성장하게끔 했다. 늘 발목을 잡곤 했던 이준 역시 현재에 이르러서는 1인분 몫을 채울 정도의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아직도 그 약속 기억해?”

이준은 몇 걸음 앞서 걷던 은하에게 슬쩍 다가갔다.

“무슨 약속?”

“우리 윌리엄 미용해 주기로 한 거.”

“아아.”

은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지.”

“이번 임무가 끝나면 아버지께서 윌리엄을 데리고 한국에 오신대.”

은하의 까만 눈이 이쪽을 향했다. 이준은 늘 그렇듯,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그 눈을 똑바로 응시하지 못하고 아래로 시선을 깔았다.

“그, 그, 그래서 말인데, 게이트에서 나가면 내일…… 그… 뭐냐, 우리 집…… 노, 노, 노, 놀러 올래?”

맙소사. 말을 왜 이렇게 더듬는지 모르겠다. 맘처럼 움직여 주지 않는 혀를 깨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럴게.”

문득 너무 쉽게 들려온 승낙의 목소리에 이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 물지?”

“어?”

“윌리엄 말이야.”

“아. 으응. 착해.”

“그래. 기대되네.”

살며시 웃은 은하가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멀어졌다.

이준은 한동안 그곳에 멍하니 서 있었다. 예전에 비하면 은하가 자주 웃어 주는 기분이 들었다. 만일 자신의 영향이 조금이라도 있는 거라면, 그것만큼 기쁜 일은 또 없을 것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 은하는 이미 저만치 떨어져 게이트 입구 앞에 서 있었다.

“뭐 해? 빨리 와.”

그녀가 손짓했다.

이준은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이렇게나 내일이 기다려지는 것이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군번줄은 챙겼어?”

“물론이죠, 분대장님.”

“장난하지 말고 확인해.”

황금색 군번줄은 헌터의 상징으로 전문가의 ‘자격증’과 군인의 ‘인식표’, 두 가지의 역할을 가지고 있었다.

서로의 목에 군번줄이 걸린 것을 재차 확인한 두 사람은 헌터 무리에 섞여 게이트에 진입했다.

이번 게이트의 색은 흰색.

가장 최하위 난이도로 분류되는 C급 게이트라는 소리였다.

당시 C급 게이트에 투입된 것은 은하와 이준을 포함해서 무려 11명이었다. 한 분대의 헌터가 투입되니 크게 긴장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사고란 항상 예기치 못하게 일어나는 법이었다.

***

“저, 저게… 대체 뭐야……!”

누군가 겁에 질린 목소리를 냈을 때, 이미 그들은 포위된 상태였다.

검은 호랑이가 한 마리, 두 마리…… 점점 불어나더니 이윽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들에게 포위당해 있었다.

몸통과 이빨, 하물며 발톱까지도 검은 호랑이는 눈동자만이 시뻘겋게 빛나고 있었다.

성인 남성의 두 배 정도 크기인 놈들은 단순히 앞발을 내리치는 것만으로 사람의 머리통을 수박처럼 깨부쉈다.

“으아악!”

도망가는 자를 집요하게 쫓은 호랑이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몸통을 갈기갈기 찢었다.

11명의 헌터 중, 살아남은 헌터는 백이준과 차은하 둘뿐이었다.

이준은 겁에 질린 얼굴로 옆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은하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으, 은하야. 도망가자.”

“아니, 섣불리 움직이면 안 돼.”

은하는 나지막이, 그러나 또렷하게 경고했다.

“봐. 뛰거나 공격하지만 않으면 얌전해.”

그제야 이준은 검은 호랑이들의 행동 패턴을 읽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대로, 놈들은 가만히 선 두 사람은 공격해 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고 이곳에 서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뛰지 말고 천천히 걸어가면 분명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거야.”

은하의 말에는 신빙성이 있었다. 그건 그녀와 3년이란 세월을 함께해 온 이준이 증명할 수 있었다.

그녀는 훈련소 시절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모두의 귀감이 되는 존재였다. 전투적인 면에서도, 전략적인 면에서도 말이다.

“근데 은하야, 내부에 몬스터가 남아 있으면 출구가…… 어?”

이상한 일이었다.

본래 게이트는 입장하는 순간 출구가 닫히는 시스템이었다. 닫힌 출구는 내부 몬스터가 전멸할 때까지 결코 열리지 않았다.

그런데 웬일인지, 저 멀리 열린 출구가 보였다.

“백이준, 내 말 이해했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걷는 거야. 절대 놈들을 자극하지 마.”

“아, 알았어.”

두 사람은 호흡을 맞춰 조심스레 한 발짝, 또 한 발짝 내딛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크르릉!

그동안 얌전하던 호랑이가 공격 태세를 잡았다. 거기서 한 발자국만 더 움직이면 물어뜯어 버리겠다는 경고로 다가왔다.

이준은 돌처럼 제자리에 굳어 버렸고, 은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 걸음 내디뎠다.

“봐, 괜찮잖아. 천천히 걸어와.”

굳어 버린 이준에게 은하가 손짓했다. 용기를 얻은 이준이 또 한 걸음 발을 내디뎠을 때.

크르릉!

다시 호랑이가 공격 태세를 잡았다.

은하는 힐끔 시선을 돌려 출구를 확인했다. 여전히 출구는 열려 있었다. 언제라도 나갈 수 있다는 듯.

이쯤 되면 싫어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한 사람은 놀이 상대가 되어 주길 바라는 모양이야.”

“……뭐?”

순간, 소름 끼치도록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게이트 내에 빼곡하게 자리 잡은 호랑이들도, 그리고 놈들에게 포위된 두 사람도 미동이 없었다.

이준은 은하를 힐끔 바라보았다.

짧은 사이 만감이 교차했다. 어쩌면 인생의 주마등을 본 듯도 싶었다.

그녀와는 훈련소 시절부터의 인연이었다. 그녀가 없었다면 몸도 마음도 약한 데다가 고유 능력마저 보잘것없는 자신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은하야, 내가──.”

“윌리엄은 다음에 봐야겠네.”

은하는 특유의 담담한 어조로 이준의 말꼬리를 툭 잘라 냈다.

“어?”

“내가 남는다고. 나보다는 네가 사는 것이 나을 테니까.”

이미 결심을 끝낸 듯, 그녀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기 시작했다.

“잘 들어. 내가 열을 세는 동안 혼자서 출구로 걷는 거야. 혹시 무슨 사고가 일어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뛰어.”

“그게 무슨 소리야, 은하야.”

이준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감지한 것인지, 은하가 까만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나가기 전에 물이랑 비상식량이 남았으면 주고 가. 며칠을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만일 가능하다면 한 놈이라도 길동무로 삼아야지.”

“은하야.”

“난 바깥으로 나가더라도 딱히 돌아갈 곳이 없어. 그런데 넌 아니잖아.”

은하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이준을 응시했다.

침묵하는 이준에게 은하가 한 발짝 다가왔다.

“뭐가 두려운 건데? 친구를 잃을까 봐?”

그녀가 낮게 웃었다.

“아니면,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까 봐?”

그녀의 말에는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석상처럼 굳어 있는 이준의 등을, 은하가 강하게 떠밀었다.

“차, 차은하!”

허겁지겁 뒤를 돌아보았다.

크르릉! 위협이 섞인 낮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은하는 이준을 보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검고 숱 많은 속눈썹을 아래로 내리깐 채 자신의 왼쪽 손목을 매만지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왼쪽 손목의 해진 소원 팔찌를.

“은하야, 난─.”

못 가겠어. 그리 말하려는 순간.

“잠시 뜨거울 거야.”

은하가 웃었다.

그녀의 하얀 손바닥이 이준을 향한다. 그리고, 작은 손바닥 가운데에서 붉고 선명한 불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퍼엉!

그녀의 손바닥에서 작은 폭발이 일었다. 불꽃의 크기는 미미했으나 호리호리한 체격의 이준을 밀어내기에는 충분했다.

폭발의 여파로 인해 이준의 몸이 출구를 향해 밀려났다. 마치 물에 떠내려가는 사람처럼 속수무책으로.

졸지에 게이트 밖으로 나온 이준은 헐레벌떡 고개를 들었다.

게이트의 문이 빠른 속도로 닫히고 있었다. 대기가 진동했고 문 틈새로 보이는 그녀의 얼굴, 팔, 다리에 검은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은하야! 차은하!”

급히 손을 뻗었으나 검은 스파크가 강하게 튀는 바람에 그대로 튕겨 나오고 말았다.

“흉터는 안 질걸.”

놀리는 듯 조금 장난기가 섞인 말투.

그것이 이준이 들은 은하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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