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뱀파이어의 성 (12)
긍정에 침묵이 감돈다.
예방 접종, 리허설.
이 상황을 미리 경험해야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 있을까.
“……내가, 이런 상황에서 패배했나?”
아버지의 얼굴.
하지만 정우는 로이에게 물었다.
어색한 상황에다 반감이 절로 들었지만, 그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본인 스스로가 둘을 따로 구분하셨기에.
따로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대답을 들은 거나 다름이 없었다.
벗어 두었던 가면을 썼으니까.
아버지나 로이가 아닌, 로드로서 자신을 대한다는 의미였다.
정우는 마음이 무거웠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갈 거라고 예상이나 해본 적이 있을까.
“우린 대가로 제약을 걸었어. 네게 말할 수 있는 건, 제한적이야.”
로이가 말했다.
“그러니… 이번에 얻을 수 있는 모든 걸 얻길 바란다.”
아버지가 말했다.
빌어먹을!
정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 * *
다시 전투가 이어진다.
아니, 일방적인 그것이었다.
정우는 차마 지팡이를 휘두르지 못했다.
방어.
오로지 정우가 택한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정우 역시 아버지와 마찬가지였다.
전생이 로이라는 것도 충격이다.
하지만 정우가 다니엘보다 한정우를 우선시하는 것처럼.
로이보다 아버지가 우선이었다.
우정보다 부정이.
‘우선일 수밖에 없잖아!’
때문에 정우의 태도는 일관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가면을 쓴 아버지.
로드의 공격은 거세진다.
단 하나의 수하도 남지 않은, 잊힌 고성의 주인으로서.
침입자를 단죄하는 결연함을 가지고, 아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 기세는 이전과 비교하여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다.
단호함.
정우는 핏빛 검에서 그걸 확인했다.
“……쿨럭.”
기어이 방어의 여파가 몸을 휩쓸었다.
짧게 흔들린 눈동자가 다시금 정우를 몰아붙인다.
‘방법을… 찾아.’
아버지를 이대로 버릴 순 없었다.
아버지를 구하기 위한 성장이, 오히려 아버지의 목숨을 끊는 순간이 된다는 게 억울하기만 했다.
정우의 머릿속은 복잡했지만.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고민만큼은 멈추지 않았다.
던전과 몬스터.
던전 브레이크와 클리어.
알고 있는 것과 경험했던 것들을 총정리하였다.
던전을 클리어하는 순간 생겨나던 구멍으로 던전의 대부분의 마력이 빠져나가던 것이 떠올랐다.
던전 브레이크 역시 마찬가지다.
구멍은 없었지만.
일본에서 클리어한 던전 브레이크의 순간, 마력이 흩어지는 것만큼은 확인했으니까.
콰득!
제대로 막지 못한 정우가 그랜드 캐니언의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커억…!”
둔탁한 충격이 등과 머리를 짜르르 울렸다.
무겁게 가라앉은 붉은 눈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정리를 끝마쳤다는 느낌.
그 일방적인 정리에 정우는 눈물을 삼켰다.
‘…젠장!’
욕설을 내뱉으며 기어이 마법을 사용한다.
하지만 그 수준은 이전과는 달리 약했다.
그저 상대를 밀어내는 정도.
‘……생각해!’
정우는 스스로를 다그쳤다.
입에서 피가 한 줄기 흘렀다.
입안에서 알싸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곳을… 미해결 지역으로 남겨 둘까?’
정우는 거기까지 생각했다.
이대로 후퇴한다면, 이 지역은 미해결로 남을 것이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북한, MJ 그룹, 일본, 대마법사에 유지석까지.
자신이 만들 물건 몇 개의 제작권을 아예 넘겨준다면, 그랜드 캐니언의 일부를 방치하는 건 일도 아닐 것 같았다.
하지만.
‘…아버지이긴 하지만 로이다.’
그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이건 희생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무언가를 가르치려는… 교육.
이만한 각오를 어떻게 무시할 수 있을까.
하물며.
‘예방 접종…….’
제 목숨을 주사기 약물 삼아 예방 접종을 하겠다는 발상까지 할 정도인데.
‘그만큼 중요하단 소리인데… 왜, 하필!’
아버지인 것인지.
정우는 지식의 신을 만나야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구하겠어….’
그 결정과 별개로 정우는 아버지를 구하겠다고 결정했다.
‘이유를 찾아!’
아버지가 스스로의 목숨을 내던지겠다고 결정한 이유.
그것만 해결하면, 이 빌어먹을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아버지를.
친구를.
죽이지 않고.
* * *
태양이 그랜드 캐니언 사이로 숨어 버렸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은 어둑함이 주변을 장악할 때까지도.
‘찾아….’
정우와 로드의 대치는 계속되었다.
정우의 결정을 눈치챈 로드는 거칠게 굴며 반격을 유도했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공격을 유도하는 덴 실패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로드의 눈빛 역시 묘해졌다.
‘정확하게 내가 꺼려 하는 수준을 파악했다.’
가볍게 방어하기엔 무겁고.
강하게 반격하기엔 가볍다.
피하기엔 어렵고.
막기엔 부담스럽지만, 피하는 것보다 나았다.
그냥 죽는 것이 가능하다면야 자살이라고 못할까.
애먼 마법에 얻어맞고 쓰러지는 것쯤은 어렵지가 않았다.
하지만 안 된다.
힘으로 쟁취하지 못한 ‘왕관’은 의미가 없었다.
하물며 정우의 공격은 자신의 강인한 육체를 무너트리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한나절을 얻어맞아도 반나절이면 회복될 정도의 공격.
강한 공격을 이끌어 내야 하는 딜레마 속에서 정우의 행동은 묘했다.
‘시간을 끈다고 해결될 문제였다면… 진즉 해결했을 거다.’
이건 하나의 거대한 시계나 마찬가지였다.
수없이 많은 톱니바퀴 중에서도 자신이 맡은 건, 이 계획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중추였다.
그조차 잊고 정우를 아들로 키운 건.
‘고약한 심보이자… 큰 보상이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보상이었다.
지식의 신과 조우할 때가 떠올랐다.
패배가 목전으로 다다랐을 때.
자신을 비롯한 몇 명은 지식의 신을 찾았다.
지식의 신 역시 정우가 패배한 후의 상황을 모르지 않을 터.
당연히 자신의 목숨을 위해서라도 협조할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직접 만난 지식의 신은 어떤가.
‘…괴짜.’
그는 괴짜였다.
제 스스로의 목숨 따위는 아깝지 않은지, 오히려 이 세계의 결말 뒤의 세상을 보고 싶다는 말까지 할 정도였다.
죽어 사념만 남기더라도.
‘안나’의 기지가 아니었다면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지구라는 세계에서 준비할 시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지식의 신을 움직이게 만드는 건 단 하나였다.
새로운 지식.
즉, 호기심을 자극해야만 했고.
“여기서 종말을 함께하겠다고요? 웃기는군요. 지식의 신이라더니… 지혜 따위는 없는 게 아니에요? 이봐요. 잘 생각해봐요. 저희와 함께하면,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세계도 경험할 수 있을뿐더러 종말 이후의 세계까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을 텐데요? 혹시 이세계로 넘어가는 방법을… 모르는 거 아니에요?”
당찬 음성이 떠올랐다.
피식, 웃음이 절로 흘렀다.
동행의 허락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하기야 그조차 ‘어둠’ 안의 세계에 대해서 아는 건 적었으니, 자신들과 함께해서 얻을 지적 이득은 확실했을 것이다.
막상 술식을 계산하기 시작한 지식의 신은 적극적이었다.
새로운 경험과 호기심의 충족까지.
짧은 만남이었지만, 지식의 신은 왜 자신을 지칭하는 호칭이 ‘지식’인 것인지 그 능력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그 결과는 어떤가.
이계로의 문을 열었고, 자신들은 새로운 생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각자가 짊어진 무게가 다르기에 적응도도 다르다는 게 지식의 신의 판단이었지만.
본인은 그 적응마저도 기대하는 투로 제일 먼저 통로를 넘었다.
“기대하는 것을 가장 크게 반영할 테니, 걱정 말고 넘어라.”
그것이 무슨 말인지 깨달을 때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열다섯의 아들.
오 년의 세월.
격변의 처참함이나 처절한 시간마저 다 겪고 나서야 홀로 떨어진 지옥에서 살아남았을 때.
그때가 바로 지식의 신이 언급했던 ‘반영’이 떠오른 때였다.
자신은 이 모든 계획의 중심에 서 있는 다니엘을 보호하고 싶었다.
친구보다 더 가깝게.
웃기지 않은가.
그래서 된 게 아비라는 것이.
하지만 그렇기에 더 고마웠다.
자신이 목숨만 버리면.
‘다시… 공략할 수 있다.’
정우는 예전의 고리를 끊을 수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단 한 가지.
지식의 신의 선택에서도 짐작하지 못한 게 있었다.
왜 뱀파이어와 이 성을 ‘준비’했으면서도.
정우에게 굳이 ‘패륜’을 각오하게 만든 것인지.
‘…어쩌면, 관계를 뛰어넘는 단호함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지.’
그렇기에 검을 휘두른다.
목숨마저 내어 줄 수 있는 이를 상대로.
하지만.
처음부터 지금까지, 휘두르는 검마다 스스로가 찔린 듯한 가슴의 통증은 도무지 사라지지가 않았다.
* * *
던전 안의 몬스터는 던전 브레이크를 통해 지구에 등장한다.
일반인이 몬스터의 생김새나 전투의 장면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바로 던전 브레이크 때였다.
그것도 망원 카메라의 촬영 거리가 닿는 부분에 한정적이었지만.
어쨌든 인간은 몬스터의 존재를 확인했다.
하지만 던전 브레이크의 몬스터는 일정 거리 이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때문에 일반인이 확인한 몬스터는 외곽까지 출몰하는 흔하디흔한 종류뿐이었다.
특히나 지금의 뱀파이어처럼, 기이한 마력이 영역 전부를 뒤덮고 있는 경우엔 그 어떠한 영상 장치도 내부를 찍지 못했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정우는 문득 떠오른 생각의 끈을 기어이 붙잡았다.
왜 던전 브레이크는 영역이 한정되어 있을까, 하는.
세이렌의 영토는 서울보다 넓은 영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처음엔 그리 넓지 않은 지역에서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마력이 퍼지고 마력이 지구에 녹아들면서 영역이 넓어졌다고 보기엔.
점차 영역을 넓혀가던 어둠의 영역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어둠의 영역은 말 그대로 모든 걸 어둠으로 바꾸었다.
벌레가 괴물이 되고, 강아지가 맹수가 되는.
‘삶이 죽음으로 바뀌는 어둠.’
그곳엔 생기가 없었다.
하지만 던전 브레이크는 아니다.
어둠의 영역처럼 입장과 동시에 기이한 마력이 전신을 갉아 먹는 경우는 없다.
자신조차 죽음을 생각하게 만들었던 그 기이한 압박감은 어디에도 없었다.
던전 브레이크(Dungeon Break)는 표현처럼 던전이 깨어지며 그 안에 있던 것들을 밖으로 토해 내는 것에 불과했다.
소설에서 보는 것처럼 이계화는 없다.
차라리 던전에서 몬스터와 마력만을 밖으로 내보냈다는 게 어울릴 정도다.
세이렌의 영토 역시 자신들 입맛대로 바뀐 지역이 있긴 했지만, 그 와중에도 반파된 건물이나 폐허가 된 잔해는 존재했다.
차라리 그 모습은 아예 던전이 덧씌워졌다기보다는 지구의 환경에 몬스터만 등장했다는 게 어울릴 정도였다.
왜 그런 걸까.
왜 영역이 존재하고, 그 영역은 점차 넓어지는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생각 도중에 정우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정확히는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주시했다.
아라크네의 다리로 만들어진 반지.
지식의 신만큼은 아니지만 정우는 상당히 많은 지식을 쌓은 인물이었다.
마법사란 족속은 원래부터 탐구하는 자였으니까.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아라크네는 본 적이 없어.’
심지어 실의 활용도가 이 정도로 높은 거미는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마녀들도 당한 거겠지.’
기록이 일상인 그들도 거미의 실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허무하게 당해 버린 것이었다.
‘이 마력은 특이해.’
아라크네의 마력.
그건 확실히 이질적이었다.
정우는 마녀의 숲을 떠올렸다.
더미를 조종하며 반복되는 던전을 구사해 놓았던 아라크네의 영역.
‘설마…….’
정우의 눈이 번들거린다.
텅 빈 허공을 살피는 눈동자엔 기이한 열기가 가득했다.
“…왜 날 보지 않는 거지?”
로드의 물음에도 대답하지 않은 채, 허공을 이리저리 살피던 정우의 눈동자가 한 차례 크게 떨렸다.
콰앙!
막지 못한 일격에 얻어맞고는 쓰러진 정우의 입술은 한 줄기의 피를 토하면서도 진하게 말려 올라갔다.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