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마탑 (9)
‘깊다….’
확실히 깊은 뿌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리의 몸을 토양 삼아 뿌리를 내린 세계수의 열매는 지독하리만큼 끈질겼다.
불로 태우듯 지지고.
냉동시키듯 얼리면서.
조금씩 리의 마력에서 분리하는 작업은 꽤나 힘든 일이었다.
‘…그럼에도 괜찮아.’
정우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라크네의 마력 실의 유용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순간.
정우는 그것의 마력 패턴을 흡수하고 놈의 특성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보상을 받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이때를 위한 걸지도 모르겠군.’
정우의 마력이 속도를 높였다.
허공에 떠오른 실의 가닥들이 퍼져 리의 전신을 누볐다.
심장에까지 이른 뿌리를 제거할 땐 거친 숨을 토해 냈고, 장기를 칭칭 감은 뿌리를 들춰낼 땐 숨조차 조절해야만 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정우는 실수하지 않았다.
마땅히 해야 하는 작업인 것처럼.
수없이 해온 작업인 것처럼.
달인의 그 무언가처럼, 마력의 실을 다루는 정우의 집중력은 점점 더 고양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뚝!
처음으로 정우의 손이.
침대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던 마력이 멈추었다.
움찔!
그 변화에 리정환이 저도 모르게 기척을 냈다.
정우는 그 기척을 느끼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잡초처럼 무분별하게 자랐던 그것의 형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뿌리가 제거당한 그것은 다시금 원래의 형태로 돌아와 있었다.
‘크기는 조금 작아졌지만… 세계수의 열매다.’
예상 밖의 소득이었다.
정우는 안정을 되찾아 가는 리를 보며 피식, 한숨을 흘렸다.
휘청.
‘……힘들긴 한 모양이군.’
“…괜찮으십니까?”
침대 모서리를 붙잡은 정우를 보며 리정환이 다급히 물었다.
정우는 손을 살짝 휘저었다.
“잠깐이면 회복될 거예요.”
어차피 마력이 문제였다.
이곳은 리의 안위를 위해 여러 겹의 방어 마법을 설치했고, 특정 마력 패턴을 제외한 마력의 억제까지 추가해 놓았다.
저주, 디스펠 따위는 덤이었다.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리와 리정환.
둘의 마력 패턴을 따라 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암살자의 그것으로는 회복은 더디기 짝이 없었기에.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정우는 지친 육신을 한층 더 자극했다.
끼릭.
몸속의 고리가 반응한다.
크게 꺼내 쓰지 않았던 그것이 정우의 육신을 휘돌았다.
불과 1분가량 만에 청량함을 되찾은 정우의 안색이 평상시처럼 돌아왔다.
‘조금만 더 익숙해지면 되겠어.’
웃긴 일이었다.
대마법사인 안나가 자신을 가장 부러워했으며 경외했던 부분이 바로 마력의 제한이 없는, 외부의 마력의 사용법이었다.
정우는 외부의 마력을 끌어다 쓰면서 무한에 가까운 마력으로, 여타 마법사들과는 전혀 다른 마법 체계를 이룩했다.
마르지 않는 샘물.
정우에게 있어서 마력은 그것과 같았다.
그에 반해 서클 마법은 정우에게 있어선 개념만 익히고 있는 전혀 다른 체계였다.
심지어 그 체계가 자신의 것보다 뛰어나지 않은, 평범 그 자체이기 때문에 오히려 익숙하지가 않았다.
비행기를 타다가 오토바이를 타야 하는 처지랄까.
배우고 익히고 써야 하는 방법 모두가 달랐다.
‘그래도 꽤 익숙해졌어.’
리의 회복은 자신에게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마력의 운용은 자연스러워졌고, 고리는 더욱 견고해졌으며, 마력의 실의 가치를 새삼스럽게 깨달았으니까.
더불어 세계수의 열매까지.
‘메아리가 좋아하겠군.’
정우는 세계수의 열매를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뻐근한 목을 풀며 정우는 몸을 돌렸다.
두 눈이 커진 리정환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자신의 뒤편을 보고 있었다.
화색이 돌기 시작하며.
마력이 휘몰아치기 시작하는.
“……아버지!”
리의 모습만을 두 눈에 가득 담고 있을 뿐이었다.
* * *
긴 꿈을 꾼 것만 같았다.
무언가에 가로막혀.
무언가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잊고 물속에 가라앉은 채로, 긴 꿈을 꾼 것만 같았다.
이따금씩 호흡을 하기 위해 수면에 오르는 고래처럼.
기억이 선명해질 때마다.
“주군에 대해서 또 내뱉고 내뱉었습니다.”
“아, 또 이러네. 그거 고치느라 몇 년 걸렸었지?”
“8년…….”
“이번에도 8년이나 걸려야 해?”
정우의 말에 리.
이상준이라는 이름의 제이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좋아. 그래서?”
해후는 짧았다.
그보다는 먼저 묻고 싶은 게 가득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자신을 기억하고 있는지.
기억이 남은 건지.
“준비하고 또 준비했습니다. …아니, 했어.”
정우는 눈가를 좁혔다.
이제 무슨 진실 비슷한 것에 다가가는 느낌이었다.
때문에 그는.
의심이 들었으나 확신은 없었고, 확신이 생겼으나 계속해서 의심하던 문제를 꺼냈다.
“이 사태…….”
상체를 기울인 정우의 눈동자가 탁하게 빛났다.
“내가 아는 ‘그들’이 만든 거지?”
“……맞아.”
잠시 머뭇거리던 이상준이 긍정했다.
예상한 말.
하지만 그렇다고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는 내용.
그렇기에 정우는 한 가지를 더 물을 수밖에 없었다.
“왜……?”
“왜 그랬냐고?”
“…그래.”
이상준의 얼굴을 말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병상에 누운 티가 팍팍 나는, 추레한 모습이었지만.
두 눈의 안광만큼은 여전히 힘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두 눈에 담긴 건, 북한이라는 나라를 손에 쥔 거인의 그것보다는 죄책감이 느껴지는 가해자의 그것과 비슷했다.
이마에 주름이 생겨났던 이상준이 입을 연 건, 과거를 회상하기 충분한 시간이 흐른 뒤였다.
“널… 구하기 위해서.”
흔들리는 음성을 듣는 순간 정우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필이면…….’
자신이 떠올렸던 최악의 가정이었으니까.
양발이 잘려 도주하지 못하고, 두 손이 묶여 저항하지 못하고, 두 눈이 멀어 가늠하지 못하는 상황.
확실한 건 ‘친구’였던 자가 이 일의 원흉이었다는 것이다.
‘원흉? 아니… 시작이지.’
자신의 자리를 찬탈한 자.
익숙하지만 이제는 더없이 어색해져 버린….
‘날 보던 그 눈알의 주인이… 내 친구들까지 떠밀었구나.’
자신을 위해서는 제 목숨까지도 바치려던 친구들이었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두려워하지 않던 녀석들이었지만, 놈들이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것이 있었다.
‘내 죽음……. 그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한 거야?’
정확하게 떠오르지 않는 기억들 속에서도 이 법칙을 구성하기 위한 방법을 언급한 이가 떠올랐다.
이런 용도는 아니었지만 결국엔 타 세계에까지 악영향을 미치게 만든 원인 제공자가.
“…내, 연구를 어떻게 이렇게 이용한 거지?”
정우의 말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자신의 자리를 찬탈하며 이 모든 사태의 시발점이 된 자는 따로 있었지만, 지구에까지 영향을 미치도록 여러 체계를 만들어 둔 이는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어둠의 영역.
그곳을 연구할 때의 자신 말이다.
“아니. 아니지. 대체 ‘지식의 신’과는 어떻게 접촉한 거지?”
대답도 전에 고개를 저으며 새로운 질문을 건네는 정우의 말에 이상준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지식의 신?”
“넌 모르나?”
“……몰라. 누군가를 죽이거나 지키는 것 외엔 아무런 지식도 없었던 나니까.”
정우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기억은? 예전 기억은 다 찾은 건가?”
“…얼추. 대부분의 기억은 온전해.”
“하나…. 아니, 두 개만 더 묻자.”
“얼마든 좋으니 계속 말해.”
“상태도 안 좋으면서 허세 부리기는….”
정우가 이상준의 어깨를 툭 치자 이상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제대로 누워.”
정우의 단호한 눈빛에 피식 웃은 이상준이 입을 열었다.
“그때 같네.”
“언제?”
“라무드 사막 유적을 공략하다가 중상을 입었을 때. 그때도 네가 이렇게 단호한 표정으로 쉬고 있으라고 했지.”
“…아. 이제 기억이 나네. 뭐, 유적을 지키는 가디언만 처리하면 끝나는 일이었으니까.”
자연스럽게 환기된 주제 덕분인지 분위기가 살짝 가벼워졌다.
정우나 이상준이나 둘 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며 무거운 화제 곁을 맴돌았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럴 수는 없는 법.
“말해. 대답할 준비가 됐으니까.”
이상준의 말로 분위기가 다시 바뀌었다.
마른침을 삼킨 이상준이 정우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예전부터 그랬다.
공작가의 자제로 태어나 남부럽지 않은 권력을 손에 쥐었고, 어린 나이에 학자들과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며 천재성을 입증했으며, 마력의 사랑을 받아 대륙 칠 대 마탑주들 모두의 구애를 받았다.
그리고 청탑을 선택하여 마법을 배웠고, 용병 등의 일을 하며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천재(天災).
천재(天才)와는 또 다른 그런 느낌으로 친구들과 자신은 다니엘을 그렇게 불렀었다.
자연재해보다 더 거대한 천재성으로 무장된 이였음에도 약함에 눈 돌리지 않고 억울함에 손 내밀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가진 힘과 권력을 지혜롭게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며, 그 지혜의 대부분을 백성들에게 쏟았던 이였다.
누구보다 왕에 적합한 인물이었으며.
결국엔 자신의 영지를 크게 에워싸는 거대 도시를 만들어, 어둠과 싸우는 최후의 도시의 주인이 된 사람.
그는 자신의 말에 자괴감을 가질 것이며.
‘단 한 명도 놓지 않겠지…….’
그들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그 누구도 손에서 놓지 않으려 발버둥을 칠 것이었다.
그는 그게 마음이 무거웠다.
타인을 위한 삶.
다니엘은 절대자였지만 그런 삶을 살아왔던 사람이었다.
또 그렇게 살게 놔두자니 마음이 무거웠지만.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순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이상준의 귀에 정우의 음성이 들렸다.
“난… 배신당한 건가?”
“…….”
이상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정우는 대답을 들었다는 듯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 펴.”
오히려 이상준을 위로한다.
“예상은 했었으니까.”
“…예상을? 어떻게? 그 기억은 없을 텐데?”
“있더라고. 그리고 놈과도 마주친 적이 있지.”
“…마주쳤다고?”
이상준이 다급히 상체를 곧추세우다가 움찔거렸다.
세계수의 열매는 그의 생명력을 거의 한계에 달할 때까지 빨아들였다.
그 여파는 아무리 피부에 혈색이 돌고 있다고는 하지만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반응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정우의 말은 예상 밖의.
‘말도 안 돼.’
충격이었다.
놈에 대한 기억이야 그럴 수 있었다.
‘봉인’해 놓았다지만 힘을 되찾으면 되찾을수록 봉인 따위는 가볍게 찢어 버릴 테니까.
그는 그 정도의 힘을 가진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두 눈이 날 보고 있더군. 그 후로는 그런 적이 없지만… 놈에 대해서 인지한 순간이었지.”
놈은 아니다.
놈의 거대한 힘은 차원을 넘기엔 너무도 부피가 컸다.
작은 통로로 몸을 구겨 넣기에는… 그 어떤 것도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잠깐.”
생각을 잇던 이상준이 멈칫했다.
“두 눈이라고?”
정우의 긍정을 본 이상준이 이를 갈았다.
놈은 차원을 넘지 않았다.
그저 확인만 했을 뿐.
통로로 눈을 가져다 대어 그 안쪽의 상황을 살폈을 뿐이다.
‘문제는 놈이 다니엘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얻어걸린 건지 모른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이상준은 물을 수밖에 없었다.
정우의 계획을.
“…모아야지.”
“뭘?”
“네가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겠지. 이런 일을 벌인 대가는 톡톡히 치르도록, 잡아 와야지.”
피식.
이상준은 웃음을 터트렸다.
결심이 그렇다면야 문제 될 건 하나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판단은 일렀다.
과거와는 달리 지금의 정우는 이런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알아봐야지.”
“……뭘?”
“왜 내 자리를 찬탈한 건지. 내가 다시 찬탈해야 맞는 건지에 대해서.”
“해야… 한다면?”
정우가 이상준을 가만히 주시했다.
이상준은 정우의 눈동자에서 결정을 읽고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네 세력 좀 빌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