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변화 (4)
얼이 빠진다는 것이 이런 것이었다.
황폐한 바다만 존재했던 그곳에, 홀로그램 같은 나무가 자랐다.
묘목에 불과했지만, 그것은 분명히 나무였다.
“…지팡이가….”
“나무로 자랐어?”
“대체….”
경악이 섞인 감탄사가 난무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묘목 위로 지직, 소음과 함께 무언가가 떠올랐다.
메시지의 그것과도 비슷한 형태의.
일종의 홀로그램 같은 무언가가 떠올랐다.
퀘스트와는 또 다른 형태의 그것.
바로.
23:59:57
“시간?”
시계였다.
“…갑자기 이게 뭐죠?”
“저거 빼야 하는 거 아니야?”
“저게 뭔지 아는 것 같던데, 설명이 가능하오?”
어지간한 경험을 다 겪어 본 셋조차 지금의 상황엔 당황을 금치 못했다.
물론, 당황한 것은 정우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계획하고 계산했지만, 막상 이 계획은 실행에 옮겨진 적이 없었다.
세계수의 가지라는 단어를 봤을 때부터 가이아가 떠오르긴 했었다.
하지만.
‘대체 이게 어떻게…….’
이런 결과가 등장할 것이라고는 그도 예상하지 못했다.
정우의 눈동자가 이를 증명하듯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경악도 잠시.
정우의 머릿속은 오히려 냉정을 되찾아 갔다.
세계수 가지로 만들어진 지팡이에서 자란 묘목은 세계수였다.
‘정확하게는 세계수의 모방이지만….’
세계수는 세계를 아우르는 나무.
정령의 모태가 되며, 인간보다 먼저 멸망해 버린 엘프(Elf) 종의 생명과 힘의 근원이었다.
세계를 아우른다는 표현은 분명히 과했다.
하지만 드래곤 하트보다 마력 보유량이 많은 세계수는, 모조리 소실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전 세계를 뒤덮을 정도의 영향력을 떨쳤었다.
덕분에 인간 사이에서도 정령사가 더러 적잖게 탄생했을 정도로.
하지만 어둠의 영역은 기이할 정도로 세계수를 적대시했다.
때문에 가장 먼저 집어삼켜진 것은 여섯 그루의 세계수 중 하나.
어둠의 영역이 어디서부터 태동하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가장 처음 먹힌 건 그 존재만으로도 엘프에겐 신처럼 군림하던 세계수 한 그루였다.
세계수가 사라질수록 엘프는 영락했고, 기어이 정령의 탄생조차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자유와 존중의 관계였던 정령에 대한 억압.
바로 정령이 깃든 아티팩트였다.
‘어쩌면… 세계수의 가지도 여섯 개일지도 모르겠어.’
세계수의 가지로 만들어진 지팡이가 벌써 두 개였다.
복수로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것의 등장.
정우는 이 사실을 머릿속에 박아 두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이 24시간.
이때가 매우 중요하다고.
“그럼 이동을…….”
정우가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하데스가 쥐고 있던 지팡이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슈슉!
“……!”
“사라졌다!”
등장하자마자 사라진 지팡이의 행방엔 모두 관심을 끊지 못했다.
정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번째 지팡이.
손에 쥔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익숙한 패턴을 얼른 확인했다.
‘…없다.’
하지만 느껴지지가 않았다.
내심 답답한 마음이 생길 찰나.
“……어?”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탄성이 이어졌다.
유서린의 눈이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강세기와 김하란.
두 명의 S급도 멍하니 자신의 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보고 있었다.
열람의 시간이 끝났는지 놀라는 표정으로 서로를 돌아보고 있었다.
정우는… 드물게 의아한 표정으로 셋을 보았다.
“또 다른 퀘스트가 떴어요.”
“나도 마찬가지다.”
“…….”
“…한정우 플레이어는 안 떴나요?”
“네….”
“어? 왜….”
“무슨 퀘스트가 뜬 건가요?”
“‘격변’에 대비하라.”
“같은 퀘스트요.”
“…격변에 대비하라?”
정우가 격변이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왜 자신에겐 해당 퀘스트가 뜨지 않은 건지 의문이 들었지만, 격변이라는 단어를 꺼냈던 이가 자신이라는 점이 떠올랐다.
어쩌면 자신은 이미 격변을 준비 중일지도 몰랐다.
유서린은 고개를 돌렸다.
“일단 빨리 움직이죠. 외부에서도 이곳의 클리어를 확인했을 테니까요.”
“강세기 플레이어는 어떻게 할 건가요?”
“일본 놈들과 합류하긴 해야겠지.”
“불편한 내용이긴 하지만, 기억을 살짝 조작해 주죠.”
“…어떻게 조작할 거지?”
“그건 걱정하지 마시고, 일본 플레이어들은 자신들이 이 세이렌 영토의 공략에 별반 힘을 쓰지 못했다고 기억할 거예요. 유일하게 강세기 플레이어만 그럭저럭 활약을 했다고 해두죠.”
“외교도 할 줄 아는군.”
“한국의 공을 높게 할 필요가 있어요.”
“저희로서는 당연한 사실이긴 한데….”
“그걸 대외적으로 떠들게 만들어 드리죠.”
“후후. 총리의 표정이 기대가 되는군요.”
“총리를 최대한 묶어 둬요. 제가 세뇌의 아티팩트를 손에 넣을 테니까.”
“좋아요. 아, 하데스는요?”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삼 일만 데리고 있죠.”
“…꼭 협회로 데리고 와 줘요. 그는 매우 중요하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유서린에게 고개를 끄덕인 정우가 시선을 돌려 김하란을 보았다.
“김하란 플레이어는 따님에게 가 계세요.”
“으음. 부탁하겠소.”
끄덕.
정우는 몸을 돌려 걷다가 아차, 유서린을 다시 보았다.
“로건 말이에요. 죽은 걸로 하죠. 아마 그래야 할 거예요.”
유서린도 아차 하며 정우의 의견에 동의했다.
정우는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려.
‘들었지, 메아리?’
-……절 쉬게 놔두시질 않네요. 끄응. 알았어요. 최면만 걸면 되죠?
‘한국인들도 걸어. 내 존재에 대해서 발설하지 않도록.’
-……이거 끝나면 좀 쉴 거예요.
‘그래. 푹 쉬어.’
그렇게 말한 정우가 미안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쉴 수 있다면…, 뒷말이 삼켜졌다.
* * *
“신호가 잡히네요. 저 협회에 연락부터 할게요.”
유서린은 협회장에게 직통으로 통화를 요청했다.
“세이렌 영토의 공략에 성공했어요.”
-…허! 수고했다. 수고 많았어!
“죽을 뻔하긴 했는데, 다행히 큰 상처는 없어요.”
-다른 사람들은?
“마찬가지예요. …아, 이진수 플레이어가 중상을 입긴 했는데, 치료를 받아서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후우. 다행이구나. 다른 문제는?
“그렇지 않아도 설명 드릴 게 있어요.”
유서린은 미간을 찌푸렸다.
“일본 측에서는 저희를 크게 도울 생각이 없었어요. 아무래도 이번 기회에 저희의 전력을 줄일 생각이었겠죠.”
-……!
“이 세이렌 영토는 저희가 보고를 받았던 것보다 이상했어요. 머맨은 은신을 하고, 세이렌은 지하수를 통해서 고속 이동이 가능했거든요.”
-그건… 확실히 들은 적이 없군.
“그리고… 보스 외에도 S급 몬스터가 존재했어요.”
-S급이 둘이란 소리인가?
“네. 맞아요.”
-허…….
“그리고…….”
무거운 표정으로 말을 잇던 유서린의 눈에 힐끗, 눈치를 보는 강세기가 들어왔다.
유서린은 방향을 살짝 틀었다.
“인사하세요. 옛 친구분이니까요.”
-……설마, 세뇌를 벌써 풀었나?
“풀었어요. 제가 한 건 아니지만….”
강세기는 비타 속 친구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미안, 하다.”
-정말로 세뇌가 풀린 게 맞나?
“맞아…. 이렇게 정신이 맑은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
-빌어먹을 놈. 그러게, 과신하는 버릇 좀 없애라고 하지 않았나!
“……할 말이 없다.”
-그래도… 다시 정신을 되찾았다니 다행이야. 강세기.
“나도… 널 적대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망할 놈.
“후, 후후…….”
강세기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난 일본에 있을 거다.”
-…한국으로 안 돌아오고?
“어. 내가 이곳을 먹어 줄게.”
-총리를 칠 생각인가?
“죽여야지.”
-고민을 해보는 게 어때?
“…찢어 죽이고 싶은 마음은 가득하지만, 일단 사회적으로 먼저 죽일 거야.”
-오…. 드디어 머리를 쓰기 시작했구나.
“하!”
강세기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영상으로나마 서로를 보는 눈빛은 부드럽기만 했다.
“아, 그러고 보니 내가 말해도 되겠군.”
웃던 강세기가 유서린을 보았다.
무엇을 말하는 건지 알아차린 유서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놀라는 표정을 보는 건 드문 일이었기에, 흥미로운 표정으로 비타를 주시했다.
“하데스를 잡았다.”
-……?
“풉.”
유서린이 멍한 아버지의 표정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근엄하면서도 대단해 보이는 아버지의 허술한 면은 어지간해서는 보기 힘들었으니까.
-…누구를 잡았다고?
“나이가 들더니 귀가 먹었나? 하데스. 그 망할 네크로맨서 말이야.”
-……!
그제야 유지석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강세기의 세뇌가 풀렸다는 것보다 더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하데스가 왜 거길 가?
“나도 모르지. 그런데 확실히 잡긴 잡았어.”
-대체 어떻게…….
“한정우. 그가 잡았어. 혼자서.”
-허, 허허. 지금 무슨 소리를….
“한국의 한정우 플레이어 말이야. 그 친구가 하데스를 잡았다고.”
-그 친구가 어떻게? 아직 A급도 채 되지 못했던…….
경악한 유지석을 보며 유서린이 말했다.
“S급이 되었으니까요.”
-…다, 시 말해주게?
“한정우 플레이어가 S급이 되었어요.”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말이 되고 안 되곤 중요하지 않아요. 덕분에 목숨을 건졌고, 이곳도 클리어할 수 있었으니까요.”
유서린의 말에 강세기도 고개를 끄덕였다.
둘을 번갈아 보던 유지석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진짜인가 보구나.
“진짜예요. 속일 이유가 없잖아요.”
-이거… 말도 안 되는 일이라서….
“믿기지 않는 심정은 이해해요. 저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렸으니까요.”
유서린은 하늘에서 등장해 자신을 구하던 정우를 떠올렸다.
두근.
죽음을 염두에 두던 순간에 등장한 정우는, 동화 속의 백마 탄 왕자님 같았다.
‘무슨 생각을….’
고개를 저은 유서린이 하늘을 보았다.
째깍.
들리지는 않지만 들리는 착각이 드는 효과음의 정체가 문득 눈에 들어왔다.
“아…!”
탄성을 내지른 유서린이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경악과 당황 등의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유지석을 향해.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변화’가 시작되었어요.”
-……!
벌떡 일어나는 유지석의 반응에 놀란 건 오히려 유서린이었다.
-변화? 무슨 변화!
채근하듯 묻는 유지석의 모습에 그녀는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음을 직감했다.
“이곳을 클리어했는데, 한정우 플레이어가 가지고 있던 지팡이가 이동하고서는 퀘스트가 떠올랐어요.”
-퀘스트?
“격변에 대비하라. 퀘스트명부터 소름이 끼치지.”
강세기가 끼어들었다.
-격변… 격변.
유지석은 격변이라는 단어를 몇 번이나 곱씹었다.
얼마 전부터 지속해서 등장하던 단어였다.
질 고메즈는 조금 전에 느꼈던 파장이 한국이나 일본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우연찮게 일본에서 발생한 일에 대해 듣게 되었다.
일본.
그곳에서 무언가가 시작되고 있었다.
격변이든 변화든.
의미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불길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한정우 플레이어는?”
-하데스의 신변을 삼 일 동안만 확보하겠다고 해서 넘겼어요. 아마… 취조에 들어갈 거 같아요.
유지석은 이마를 짚었다.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할 타이밍을 놓쳤다.
“…강세기. 부디 현명한 판단으로 처리하길 바란다.”
때문에 유지석은 강세기의 분노가 엉뚱한 방향으로 틀어지지 않기만을 바라며 조언을 건네는 것을 끝으로 통화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