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세이렌 여왕 (5)
떨리는 눈동자를 본 정우는 그래비티(Gravity)를 중첩했다.
마녀의 증폭에 고리까지 공명시키자.
S급의 플레이어조차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능력을 보인 세이렌 여왕의 목을 짓눌렀다.
뱀의 하체가 굽어지고, 여왕의 어깨가 아래로 축 처진다.
정우는.
세이렌 여왕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맞군.”
정확히는 세이렌 여왕의 팔에 걸쳐져 있는 팔찌를 주시했다.
예상이 맞았다.
엘튼.
그의 성물이 세이렌 여왕의 팔에 걸려 있었다.
드득!
아티팩트를 주시하는 정우를 힐끗 본 여왕의 눈가가 잘게 떨렸다.
더불어 아득, 이를 갈며 고개를 치켜든다.
가중된 중력을 이기고 점차 고개를 드는 세이렌 여왕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더불어 지면의 물이 창처럼 솟구쳤다.
슈슉.
블링크로 공간을 넘은 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계산이 틀렸다?’
계산대로라면 자신이 지금 서 있는 자리는 여왕의 뒤편이어야 옳았다.
하지만 자신이 선 곳은 여왕의 옆.
의아함을 표시하기도 전에 여왕의 마법이 사방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세이렌이 물을 조종한다? 희한하군.”
들어본 적도 없고, 경험한 적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저주가 물질적인 능력을 지니는 것 또한 결코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수면 아래에서 발작하듯 움직이는 물뱀을 본 정우가 손을 휘저었다.
스스.
연결되는 통로를 통해 빠져나온 정령이 입을 쩍 벌리며 분노를 표했다.
잠시라도 자신의 힘을 억누른 세이렌 여왕을 향해 적의를 불태웠다.
그러는 사이.
세이렌 여왕도 그래비티를 전부 이겨 낸 채로 고개를 빳빳이 들어 정우를 노려보았다.
“네 의미는…….”
그분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공물을 바치는 인간과 달리 이 인간은 자신의 적이었다.
자신의 의미였다.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스슥, 스스스!
세이렌 여왕의 주변으로 마력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캬, 캬캭!
그녀의 주변에서 허리를 꺾은 채로 바닥을 짚고 겨우 버티던 머맨들이 그녀의 힘을 등에 업고 상체를 세웠다.
뾰족한 삼지창 끝에 오러가 맺힌다.
네 마리의 머맨은 족히 A급 던전의 보스 수준이었다.
머맨의 왕과 비교하면 크나큰 손색이 있었지만, 나쁘지 않은 수준.
하지만 지금의 정우를 막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여전히 뒤편으론 얼음을 녹이는 불기둥이 사방을 달구고 있는 상황이었다.
적들이 다가오지 못하는 상황에서.
정우는 네 마리의 머맨과 세이렌 여왕을 앞에 두었다.
‘이상하군.’
정우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공격하지 않았지?’
그래비티로 세이렌 여왕을 압박할 때, 정우는 추가 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정우가 세이렌 여왕의 마력에 대응한 건 회피였다.
공간 이동은 좌표가 필요했다.
근거리 공간 이동인 블링크는 시각이 곧 좌표였다.
그게 뒤틀렸다는 건, 이 공간에 대한 세이렌 여왕의 장악력이 급증했다는 것을 뜻했다.
저릿.
피부의 솜털이 곤두섰다.
정우는 세이렌 여왕을 이채롭게 보았다.
세이렌의 수준은 명확했다.
저주. 그 외엔 하등 별것 없는 능력까지.
저주만 이겨 내면 몇 등급이나 하락하는 게 바로 세이렌이었다.
과거 세이렌의 던전에서 정우가 세이렌을 가볍게 학살했던 것처럼.
세이렌 여왕은 저주 외의 힘을 얻었다.
저주의 강화라고 봐야 옳았지만, 어쨌든 저주 해제가 통하지 않는 능력을 손에 거머쥐었다.
메아리와 같은 능력.
그리고 메아리와는 다른 능력.
물로 만들어진 창을 거머쥔 세이렌 여왕은 육체에 근육이 붙기 시작했다.
머맨처럼 우락부락한 근육은 아니었다.
꽤 아름다워 보이는 근육이 완성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와 동시에.
번쩍!
정우는 고개를 꺾었다.
자신의 볼을 스치고 지나가는 날카로운 예기에 주륵, 피가 흘렀다.
따끔한 느낌과 함께 정우 역시 지팡이를 집어넣고는 창을 꺼냈다.
튜토리얼에서 얻은 삼단창이었다.
빙글.
회전한 정우의 창이 세이렌 여왕의 목을 찔러간다.
깡!
여왕이 가볍게 그것을 쳐 내자 정우는 몸을 돌리며 창을 가로로 회전시켰다.
틈을 노리고 달려들려던 머맨의 삼지창과 부딪쳤다.
서걱!
세이렌 여왕의 것과는 달리 가볍게 부러지는 삼지창의 단면이 허공을 빙글 회전하며 머맨의 당혹스러운 얼굴을 반사했다.
그리고 그 짧은 사이.
서걱!
창의 단면처럼 잘린 머리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까드득!
정우는 허리를 숙였다.
다리를 쭉 뻗어 자세를 낮춘 정우의 머리카락을 스치는 세 개의 삼지창의 예리한 기세를 느끼며 그는 창을 짧게 잡고는 위로 쳐 냈다.
세 개의 삼지창이 위로 솟은 사이.
표독스러운 표정의 세이렌 여왕이 상체를 숙이며 창을 내질렀다.
물의 정령이 그것을 제어하려고 해보았지만, 세이렌 여왕의 힘이 정령을 압도하고 있었다.
‘머맨을 상대해.’
정우의 말에 치욕이라는 듯 몸을 한 차례 떤 정령이 방향을 바꾸었다.
세이렌 여왕에게선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던 걸 분풀이라도 하듯 매우 폭력적인 기세로 머맨을 상대하고 있었다.
정우는 뒤로 몸을 날리며 세이렌 여왕의 창을 막았다.
‘…생각보다 묵직하다.’
세이렌이 아니라 머맨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일격이 무거웠다.
거리를 벌린 정우의 손이 펼쳐진다.
‘매직 미사일.’
수십 개의 매직 미사일이 일제히 포격을 가했다.
세이렌 여왕이 포효하며 물로 그것들을 요격했다.
촤아악!
매직 미사일과 부딪쳐 부서지는 물이 아래로 떨어졌고.
정우는 그것을 은폐물 삼아 쇄도했다.
‘힘껏 찌르기.’
별로 써본 적이 없는 스킬이었지만, 향상된 신체 능력과 마력 응용력으로 인해.
쿠구구!
“……!”
정우의 그것은 족히 일격필살의 느낌으로 주변의 마력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세이렌 여왕의 판단은 빨랐다.
물의 창을 없앤 그녀는 중첩한 저주로 막을 만들며.
푸와악!
정우가 아닌 바닥의 물을 폭발시켰다.
순간적으로 중심이 휘청거린 정우였지만, 자세를 더욱 낮춰 끝까지 창끝을 고정시켰다.
힘껏 뻗는 창.
그리고 폭발하는 일격.
폭발로 치솟은 물을 가르고, 세이렌 여왕이 만든 저주의 막을 강타한 일격이 드릴처럼 요란한 소리와 함께 막을 깎아 냈다.
중첩되었다지만 세이렌 여왕의 저주의 힘은 메아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때문에 그리 오래 걸리지 않게 막을 부수었지만.
세이렌 여왕은 길고 곧은 꼬리를 흔들어 자리를 피해 낸 상태였다.
더불어 감긴 눈.
중얼거리는 입술까지.
정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일대를 장악하는 불길한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퍼트렸던 아라크네의 마력이 걸려든 먹잇감을 전달하듯 파르르 잘게 떨어댔다.
이 일대의 마력 변환.
그것을 감지한 것이다.
정우는 창을 내던졌다.
통로를 통해 자연스럽게 아공간으로 사라지는 창을 대신하여 정우의 손에 들린 것은 지팡이.
정우의 장악력이 가일층 상승했다.
하데스와는 달리 정우는 지팡이에 대한 페널티가 없었다.
네크로맨서.
정령력과 상반되는 사기를 주로 다루는 하데스는 여러 보조적인 효과를 얻는 대신 여러 손해를 입어야 했다.
그중 가장 심각한 것이 바로 내상이었지만, 정우는 그 어떠한 페널티도 받은 적이 없었다.
덕분에 온전히 지팡이의 버프를 누리는 정우의 기세는, 일대를 장악한 세이렌 여왕의 그것에 뒤처지지 않았다.
휘잉-!
두 종류의 마력이 부딪치며 바람이 일었다.
그리 상쾌하지 않은, 꽤나 불쾌한 바람이었다.
어둠의 공간.
결코 반갑지 않은 마력으로 가득 차 있는 공간을 제대로 활용하는 건.
“……!”
세이렌 여왕이 아니었다.
감았던 그녀의 눈이 부릅떠진다.
표독스럽던 표정이 한없이 일그러졌다.
“너의 의미는…….”
그분의 말이 또다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부정하기 위해 움직인다.
군대를 양성했고, 인간의 모든 걸 배웠다.
이 영역을 만들고 감히 자신에게 찾아왔던 인간의 말을 수용했던 것도.
전부 다 그분의 말을 부정하기 위해서였다.
세이렌 역사상 이 정도로 강한 여왕이 탄생한 적이 있을지 의문일 정도로 강해졌음에도.
수없이 많은 군대를 거느리고 장군을 탄생시킬 정도로 강해졌음에도.
“제물이노라.”
죽어 버리는 것이 목적이라니.
그것이 자신의 의미라니!
세이렌 여왕은 부정하고 또다시 부정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기 시작했고 정우와 대등한 영역을 가져왔다.
두 존재는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두 존재의 주변은 이미 가까이만 다가가도 모든 것이 갈가리 찢겨나갈 정도의 무서운 전투 지역이었다.
정우와 세이렌 여왕의 시선이 마주쳤다.
하지만 둘의 시선은 조금 달랐다.
어딘지 모르게 정우는 무거운 눈빛이었고.
세이렌 여왕은 분노와 부정으로 가득 찬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아아.’
정우는 순간적으로 멍한 탄성을 내질렀다.
불쾌함.
그리고 두려움.
두 종류의 감정이 깃든, 오묘한 탄성이었다.
‘이건…….’
세이렌 여왕의 마력은 묘했다.
몬스터 특유의 날카로움과 물의 기운의 차가움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물을 닮은 그것은, 의외로 물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닮아 있었다.
다름 아닌.
‘신성력의 흐름…….’
정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주춤거리는 정우에게서 기회를 포착한 세이렌 여왕이 미간을 일그러트리며 집중했다.
점차 한쪽으로 기우는 승기.
세이렌 여왕의 표정이 점차 밝아졌다.
제물?
본능은 이자가 그분이 말한 인간이 맞다고 소리쳤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정의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모든 걸 저주한다.
저 존재 자체를 저주한다.
자신을 고작해야 제물 따위로 취급한 저 저급한 존재를 저주했다.
수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서서히 자신의 영역이 넓어졌다.
그녀는 안심했고, 불안해했다.
이 인간이 그분이 말한 존재가 아니라면.
진정으로 자신보다 강한 자가….
자신을 제물 삼아 등장한다면?
일말의 불안감을 지운 세이렌 여왕의 기세가 점차 증폭되었다.
위기는 곧 기회였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깨달았다.
인간의 죽음은 자신에겐 승리였으며, 달콤한 과실을 따먹을 기회였다.
이번 역시 의문과 불안이 가득한 전투였으나.
나는 이번에도 승리하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돌연 인간의 존재감이 사라졌다.
눈앞에 있음에도 느껴지지 않는 기척은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
그 어떠한 저항력도 없이 자신의 영역이 파훼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기를 쓰고 마력을 뿜어내도.
버티는 것보다 무너지는 게 빨랐다.
그것은 마치 독과 같았다.
어느새 파고들어 모든 것을 중독시키는….
두 눈을 부릅뜨고 당황한 모습으로 비명을 지르던 세이렌 여왕은.
아아…….
그분이 말하던 때가 지금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 모든 현상이 중독이 아닌, 흡수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빌어먹을.
허탈한 미소를 지은 세이렌 여왕의 비늘이 파스스 풍화되듯 떨어진다.
제어권을 빼앗겼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한 건지, 그녀는 알 수 없었지만.
단 한 가지.
자신이 제물이 되었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천천히 손을 뻗는다.
지금이라도 저 인간의 목을 꺾고, 제물에서 벗어날…….
딸그락.
세이렌 여왕은 자신의 팔에서 떨어진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증폭되던 마력이 가라앉는다.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눈동자가 자신을 꿰뚫고 지나갔다.
그녀는.
고개를 떨어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