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세이렌 여왕 (4)
하늘에서 쏟아지는 낙뢰는 천재지변 그 자체였다.
세상의 종말이 이러할까 싶을 정도로, 낙뢰는 자비가 없었고.
콰콰콰쾅!
무자비한 파괴력으로 지상을 강타하고 있었다.
세이렌 여왕은 다급히 손을 휘저었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얇은 막이 허공에 둘러졌다.
‘…물질적인 힘을 지녔다는 건가?’
얇은 막의 흐름을 읽은 정우가 침음을 삼켰다.
대체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지만.
세이렌 여왕은 지금.
‘메아리의 방법을 사용하고 있군.’
메아리가 걸었던 그 길목에 서 있었다.
강력해진 저주는 그 자체만으로도 파괴력을 가진다.
그것을 구체화하여 집약한 것이 바로 검은 안개였다.
세이렌 여왕이 만든 막은 검지 않았다.
흰색에 가까운 회색.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정우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놀람은 잠시.
“내리쳐라.”
마치 판결을 내리는 판사의 판사 봉처럼.
정우의 명령에 화답한 마력이 주변의 마력을 변화시킨다.
그 변화는 무척이나 빨랐다.
마치 이지스가 경악했었던, 스킬의 마력 운용 변환처럼.
정우가 흩뿌린 마력은 보통 마력이 아니었다.
아라크네의 마력.
‘마력의 실을 타고 흘러라.’
정우의 전격 마법은 실상 아라크네의 마력 실을 타고 흐르는 전류였다.
고리를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세이렌 여왕을 비롯한 세이렌과 머맨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려면, 마력의 효율적인 운용은 필수였다.
‘조금 더 조절해.’
때문에 정우의 마법은 파괴력이 부족했다.
운이 나쁘게 직격을 당한 몇 마리만이 까맣게 타버리고 말 정도의 파괴력.
하지만 이곳은 세이렌의 본거지였다.
물가에만 머무르는 특성은 여러 이유로 약화되었지만, 세이렌 여왕이 존재하는 이곳만큼은 여전히 물가에 가까웠다.
습기도 많았으며.
자작하게 물이 바닥에 고여 있었다.
‘날뛰어라.’
정우는 물의 정령을 불렀다.
수면 아래를 유영하던 물뱀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크롸-!
들리지 않는 포효를 내지른 물뱀은 마치 이무기처럼 몬스터들 사이를 비집고 움직였다.
헤엄치듯 움직이는 물뱀을 잡기 위해 다급히 손을 뻗었지만, 몬스터들의 손은 빈 허공만을 낚아챌 뿐이었다.
날뛰라고 한 것치고는 정령으로 인한 피해는 없었다.
지금까지는.
드드드.
아주 깊은 지면으로부터 시작된 진동이 느껴졌다.
몬스터들은 그 진동을 느끼고는 아래를 내려 보았다가 다급히 고개를 치켜들고는 낙뢰를 피하는 데 열중했다.
지진이 나더라도 당장의 낙뢰가 더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낙뢰의 파괴력이 강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놈들도 알고 있었지만, 낙뢰의 수가 너무 많았다.
하나만 제대로 맞아도 죽는 건 마찬가지였기에 당장의 위협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게 놈들의 실책이었다.
더군다나 물이라는 매개체가 너무도 익숙한 놈들이었기에 물뱀의 출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도 있었다.
드드득!
진동이 거세진다.
우왕좌왕하던 몬스터들이 낙뢰를 맞으면서도 고개를 아래로 돌릴 정도로, 진동은 예사 범위를 넘어섰다.
낙뢰에 맞아 타들어 가는 몬스터의 수가 늘어났다.
전기에 감전된 듯 부르르 떠는 수도 늘어났다.
하지만 몬스터들의 시선은 지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
‘와라.’
정우의 생각을 읽은 듯, 수도관이 폭발이라도 한 것처럼 막대한 양의 물이 솟구쳤다.
그 파괴력을 견디지 못한 몬스터 몇 마리가 갈가리 찢겨 나갔다.
정우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강세기나 유지석이나 마법에 한해서는 대마법사의 경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대마법사란 호칭을 달고 있는 이는, 질 고메즈가 유일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단 하나의 성질만을 통달한 그들과는 달리, 질 고메즈는 사대 원소의 마법을 전부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작 네 개의 원소 마법을 다룬다는 이유로 대법사의 칭호를 물려받았다.
정우는 시스템을 떠올렸다.
확실히 플레이어 시스템은 인류의 구원자 같은 느낌이 강했다.
각성을 담당하며 플레이어의 개입을 불허하는 G급 던전.
튜토리얼이라 불리는 그 체계는 공고했고, 그 안에서 배우는 것들은 확실히 미래를 위한 교육의 개념에 가까웠다.
하지만 F급부터.
실질적으로 몬스터를 섬멸해야 하는 입장에서 본 던전은 전혀 교육적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며 체계가 잡혀서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교육이 아닌, 던전 본연의 모습은 말 그대로 침략자에 가까웠으니까.
플레이어는 그런 체계에서 지구를 지킬 유일한 방법이었다.
다만.
직업이 정해진다는 것.
그에 따른 스킬을 습득한다는 것.
이계에서도 한 원소에만 특화된 마법사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대부분의 기초 마법은 사대 원소를 기반으로 습득됐고, 보조 마법까지 다루며 성장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그렇게 성장하다가 자신에게 걸맞은 원소를 주로 다루는 게 전형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플레이어는 다르다.
강세기는 얼음에 특화된 게 아니라.
‘얼음만을 다뤄.’
같은 맥락으로 유지석은 바람 마법만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건 유지석이나 강세기의 문제가 아니었다.
플레이어란 시스템의 문제.
정우는 그것을 결함이라고 여겼다.
물론, 그에 따른 반작용이라고 해야 할까.
장점도 있었다.
단 하나의 성향만 익히기 때문에.
그리고 스킬이라는 보조적인 장치 덕분에.
‘성장이 매우 빠르지.’
이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성장세가 두드러졌다.
S급은 마스터이다.
10년도 채 되지 않은 세월 만에 마스터가 된 케이스는.
‘내가 유일해.’
다니엘만이 유일했다.
하지만 이곳은 아니다.
급하게 성장시킬 이유가 있었다는 듯.
S급의 수는 상당히 많았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정우는 솟구치는 물기둥을 보며 강세기를 떠올렸다.
하나의 특성에 특화되어 있다는 건 단점이지만 장점이기도 했다.
냉기(冷氣).
‘나쁘지 않다.’
콜 라이트닝(Call Lightning)을 유지한 채로, 정우가 또다시 마력을 변환한다.
여러 개의 고리가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외부의 마력과 연결하여 만들어 낸 마법은.
“프로즌 필드(Frozen field).”
강세기를 대표하는 스킬이었다.
물기둥의 표면이 얼어붙기 시작한다.
한껏 솟구쳤다가 아래로 낙하하기 시작한 물방울이 얼어붙는다.
어느덧 사라진 낙뢰 대신에 하늘을 가득 채운 건.
큼지막한 우박들.
몬스터들이 다급히 방향을 틀며 우박을 피하려고 했지만.
“……!”
쩌적.
찰박거리는 물이 얼어붙어 뱀과 같은 몸통을 옭아매고 있었다.
“블리자드(Blizzard).”
그리고 완성된 마법은.
모든 걸 찢어발길 정도의 막대한 위력으로, 몬스터의 목숨을 노리고 떨어졌다.
* * *
그녀는 여왕이었다.
하지만 태생부터 여왕인 것은 아니었다.
그저.
“……눈을 뜨거라.”
누군가가 자신을 불렀을 뿐이다.
거부할 수 없는 명령에 그녀는 눈을 떴다.
수면 아래서 잠을 자고 있는 동족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선택받았다는 것이 그녀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그녀는 눈앞의 인간을 보며 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인간 외의 무언가의 흔적을.
인간은 자신을 가만히 주시했다.
그녀는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고개를 조아렸다.
잠들어 있는 일족 사이에서 눈을 뜬 건 자신뿐이었다.
질문도, 답변도.
누구에게도 조언을 들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애당초 그래야 했던 것처럼 고개를 조아렸다.
“이번엔… 존재하는구나.”
반가운 투였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인간의 반가운 말투는 자신을 향한 게 아니었음을 직감했으니까.
인간은 자신에게 여러 사실을 알려 주었다.
능력을 증폭하는 방법.
능력의 사용법.
저주받은 육체에 대한 보안법까지.
“새 시대엔 새 능력이 필요한 법이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인간이 머문 시간은 고작해야 이틀이었다.
하지만 그 이틀 만에.
“꽃을 피웠구나.”
그녀는 왕관을 머리에 쓸 수 있었다.
“이것을 사용하거라.”
인간이 아티팩트라 부르는 신의 선물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소중히 받아들었다.
무엇을 하면 좋습니까?
그녀는 말을 건네지 못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고요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며 말할 따름이었다.
“네 의미는…….”
그 후로 그녀는 자신의 일족을 다스렸다.
새로운 세계에 발을 딛고.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인간의 살점으로 주린 배를 채우며.
한 영역의 강대한 지배자로서, 인간에게서 받은 지도대로 일족을 교육시켰다.
인간과 싸우고.
그들의 전투 방법을 습득하고.
이곳의 마력을 통해 새로운 능력을 체득하며 보낸 시간 동안.
그녀는 의문에 휩싸였다.
과연….
자신을 가르친 인간.
‘그분’이 말한 상황이 언제 도래하는 것인지.
그렇게 의문이 쌓여만 가던 도중.
그녀는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확신의 순간은 꽤나 강력한 플레이어 집단을 몰살시켰을 때.
일본의 최후 공략이 실패로 돌아간 바로 그 시점이었다.
그녀는 이곳을 철옹성으로 만든 뒤.
인간이 말한 자신의 운명을 뒤틀어 버리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일족의 마력을 모아 하나의 알을 완성했다.
‘…강하다.’
하지만 자신은 혼자였다.
군대.
자신에게 필요한 건 군대였으며, 자신이 필요한 건 그 군대를 이끌 장군이었다.
그분의 능력은 강대했다.
강해진 지금으로서도 감히 끝이 보이지 않는.
마치 심해와 같은 존재.
살펴볼 수도, 가늠할 수도 없는 그런 존재였다.
하지만.
지성이 조금씩 생겨나고, 생각이 조금씩 깊어질수록.
그녀는 그분의 말을 부정하고 싶어졌다.
자신을 일깨운 목적이.
자신이 이토록 강대한 힘을 쥘 수 있도록 가르쳐 준 목적이.
캬아-!
그녀의 저주는 강력했다.
자신을 잡으러 온 인간은 자신의 저주에 저항하지 못한 채 짧은 발악을 끝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제 목을 물어뜯고 머리를 뽑아내는 순간까지도 황홀한 미소만 짓고 있을 정도로, 자신의 저주는 위대했다.
그래.
그녀는 여왕, 그 자체였다.
손끝을 비튼다.
응축된 저주가 사념을 담아 허공을 가로지른다.
그 끝에 다다르는 건.
전격과 얼음.
두 종류의 마법을 사용한 이후, 다시금 새로운 마법을 꺼내 드는 한 인간을 향해서였다.
그녀는 직감했다.
그분이 말한 순간이 지금이라는 것을.
저자를 보는 순간, 머릿속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명령과 적의는.
이전엔 없던, 전혀 새로운 것이었으니까.
점점 더 강해지는 적의.
그와 더불어 점점 강해지는…….
‘적…!’
포효를 내질렀다.
지팡이를 든 채로 허공에 떠서 오만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저 인간에게.
분명 이곳의 마력을 이용하여 강해진 건 자신이었다.
인간은 이곳에서 약해졌고, 자신의 저주를 받아 더욱 약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하지만….
‘왜!’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자신의 손짓이 찢겨 나가는 것을 보고.
난생처음 느껴보는 열기가 지면을 불태우며 솟구치는 것을 보면서도, 시선은 결코 ‘적’에게서 떼지 않았다.
강해지는 건 자신이 아니다.
이 순간에도 강한 면모를 보이는 건, 저 인간이었다.
화염을 쏟아 내고.
물뱀을 불러내 자신을 억압하기 시작한.
‘……그, 분.’
깊이는 달랐으나 어딘지 모르게 여왕은 인간의 눈에서 그분의 흔적을 발견했다.
심해.
바다를 터전으로 삼는 자신들조차 다다르지 못하는, 한 줌의 빛도 존재하지 않는 깊은 바닷속.
어느새 공간을 뛰어넘어 자신의 머리를 짓누르는 막대한 마력을 쏟아 내는 인간을 보며.
그녀는 그분의 말을 다시금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네 의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