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연결
“정우 씨, 일정이 정해졌어요.”
“일정이요?”
“네. 기절해 있을 때 답장을 받았거든요.”
유 대리는 의기양양했다.
“뭔데요?”
“혹시 ‘닥터 브라운’을 알아요?”
“…모를 리가 없……. 혹시, 닥터 브라운을 만나는 건가요?”
“빙고!”
유 대리는 운전대에서 왼손을 떼어 브이를 그렸다.
“플레이어 전문 박사잖아요. 던전과 플레이어의 상관관계 등에 대한 여러 연구도 진행했고… 현재 미국 플레이어 협회에 자문 의원으로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어라? 상당히 잘 아시네요?”
“유명하니까요.”
알 수밖에 없었다.
플레이어가 되면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 중 하나였으니까.
정우는 유 대리에게 찬사를 보냈다.
“히힛! 아무튼 이번엔 잘하면 정우 씨의 이상 현상의 원인을 밝혀낼 수 있을지도 몰라요.”
차를 모는 유 대리를, 정우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유 대리님.”
“네?”
“…왜 이렇게 열심이신가요?”
“제가요?”
“네.”
정우의 물음에 유 대리는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결론은 간단했다.
“비서니까요.”
제 밥줄이기도 하고요, 유 대리의 말에 정우는 애매하게 웃었다.
“일단 이거부터 처리하고 연결해드릴게요.”
“연결이요?”
“일단은 화상 통화로 진행할 거예요. 정우 씨의 데이터는 저희에게도 있으니까 그걸로 대체할 거고요. 물론 데이터는 이미 보냈어요. 그걸 보고 판단한 거죠. 닥터 브라운도.”
유 대리는 빠르게 주차했다.
차에서 내린 둘의 걸음이 빨라진다.
“그나저나… 이미 회의가 진행 중일 거예요.”
“벌써요?”
유 대리가 보고를 한 지 20분도 채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럼요. 협회는 꽤 유능하다고요.”
그렇게 자부심을 뽐낸 유 대리를 따라 정우는 회의실로 향했다.
“자세히 설명하게.”
인사조차 생략한 본론에 유 대리는 차분히 정우의 사건과 말을 설명했다.
“놈들은 이 근처에 있다.”
“은신이 필요한 일이라면 잠입일 텐데….”
“결계사까지 동원되어 잠입할 만한 장소가 있나?”
“으음. 그게 애매한데….”
“일단 길드에도 연락을 취해야겠군.”
“그렇지 않아도 경계를 하라고 연락을 했지만, 협조 요청을 해야겠네요.”
회의실에 모인 여섯의 인원은 빠르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중에는 구면인 인물도 있었다.
어느 정도 대화를 마친 그는 애매하게 앉아 있는 정우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저번엔 진짜 간이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이렇게 살아 있는 모습을 보니, 다행이군요.”
“반갑습니다. 박 주임님.”
일어나 악수를 한 정우를 향해 박 주임이 물었다.
“이번에도 위험했다고 들었어요. 이거… 사건이 끊이질 않아 신경이 쓰이네요.”
정우는 그저 웃었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사건이 끊이질 않았다.
“덕분에 저희가 알지 못하는 사건을 파악했어요. 놈들의 목적만 파악하면 될 것 같아요.”
박 주임은 정우를 한껏 띄웠다.
“원래는 한정우 씨에게 이것저것 물을 게 있었는데… 유 대리가 워낙 유능해서요. 저희가 해야 할 일까지 두 분이서 생각했다면서요? 덕분에 진행이 매우 빨라졌어요. 일단 협회를 대신해서 위험에 처하게 만든 건 사과할게요.”
박 주임과 인사를 마친 정우는 회의를 조금 더 보다가 회의실에서 나왔다.
뭔가 나름의 가닥을 잡아가는 이들의 회의를 방해할 생각이 없었다.
이미 자신이 필요한 단계가 지나갔기도 했고.
“같이 가요.”
뒤따라 나온 유 대리가 다시 기사를 자청했다.
“맞다. 이걸 말씀 안 드렸네요.”
“……?”
“일단 정우 씨에게는 경호팀 인원이 붙을 거예요. 아니, 이미 붙었죠. 여기 오는 동안에도 제 차를 뒤따르고 있었을 거예요.”
“…경호요?”
“일단은 놈들의 타깃이 정우 씨였으니까요. 당연한 처사죠.”
정우는 납득했다.
“A 섹터에도 연락을 취해 놓을게요. 걱정 마세요.”
자신의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말을 잇는 유 대리에게 정우는 감사 인사를 건넸다.
“A급이니까요. 이 정도 호위는 기본이에요.”
정우는 조금 망설이다가 다시 트레이닝 센터로 향했다.
“집에는 안 가보셔도 되겠어요?”
“지금은 차라리 여기에 있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오히려 어머니와 동생이 위험해지겠죠.”
“좋은 판단이에요!”
차가 정차하자 유 대리가 내리려는 정우를 불렀다.
“닥터 브라운과의 화상 통화는 모레예요.”
“알겠어요. 혹시 닥터 브라운과 대화를 할 때…….”
말끝을 흐리며 망설이는 정우를 보며 유 대리가 손가락을 흔들었다.
“G-00 말하는 거죠? 물어봐요. …하지만 기대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G-00는 닥터 브라운도 진즉에 관심을 가졌던 케이스였다는 것만… 기억해 주시면 돼요.”
그 말에 정우는 납득했다.
묘한 실망감이 들었지만, 무려 5년 동안이나 세계 유일의 사례로 남았던 던전이다.
닥터 브라운을 포함한 유수의 저명한 연구자들의 관심은 당연했다.
“일단은 정확한 대답을 듣지 못했으니까, 한번 들어보는 것도 좋죠. 내일은 컨디션 조절 잘하시고, 센터 밖으로는 나가지 마요.”
“네.”
“아마… 이야기가 잘 끝나면 한 가지 선물을 받을 수도 있겠네요.”
“선물이요?”
“아직은 확정된 게 없어서… 나중에 이야기할게요.”
모레 봐요, 유 대리는 정우의 어깨를 슬쩍 밀었다.
정우가 내리자마자 차는 출발했다.
사라지는 차를 본 정우는 한숨과 함께 센터로 들어갔다.
* * *
정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커다란 화면을 마주할 뿐이었지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그의 기대감처럼 점차 강도를 높여갔다.
닥터 브라운과의 대화는 꽤나 즐겁게 진행되었다.
자동번역기를 통해 서로의 의사소통은 아무런 무리가 없었고, 정우는 여러 질문에 대답하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잠깐의 휴식 시간.
정우는 G-00에 대해 언급했다.
모니터 너머로 자신을 보는 닥터 브라운의, 이름처럼 갈색빛 도는 눈동자를 주시하던 정우의 고개가 아래로 숙여졌다.
“미안하네. 그때도, 지금도… 나는 아직 플레이어 체계에 대해 제대로 알지를 못하네.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짐작뿐이지….”
권위자인 그조차 증명해 낸 것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게 현실이었다.
이미 예상하던 바였지만 당사자에게 직접 듣고 나니 기분이 묘한 정우가 애써 웃었다.
“하지만 자네의 상태를 봐줄 사람은 아네.”
“……!”
실망감에 숙여졌던 정우의 고개가 확 치솟았다.
“제임스 밀러에게 연락을 취해놓겠네.”
“……제임스, 밀러라면….”
“유명한 인물이니 잘 알 걸세. ‘백의 연금술사’로 불리는 이니.”
“……!”
“듣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네. 자네의 마력이 성장하지 못하는 게, 마치 여러 부여 마법을 거부하는 특정 물건 같다는…. 아, 그렇다고 자네가 물건이라는 소리는 아니니 오해는 말게.”
“오해하지 않습니다.”
“허허. 그렇다면 다행이고. 아무튼 간에 간만에 흥미로운 사례를 접했으니, 나 또한 다른 경로로 여러 방법을 찾아보겠네.”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미국으로 한번 넘어오는 게 좋을 걸세. 아무래도 제임스 밀러와는 직접 만나보는 게 좋을 테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우는 의자에서 일어나서까지 고개를 숙였다.
그 뒤로도 몇 가지 화담이 오갔고, 닥터 브라운의 여러 가설이 언급되었다.
“그나저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네.”
“네. 말씀하세요.”
“자네… 한국 협회장과 무슨 관계인가?”
여러 관계를 부정한 정우를 향해 닥터 브라운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통화를 종료했다.
그러고 보면 자신도 궁금했다.
짧은 과거의 인연 아닌 인연이 전부인 자신에게 왜 이런 대우를 해주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유 대리님이 노력해서 닥터 브라운과 연결된 줄 알았더니… 협회장님도 얽혀 있었구나.’
정우는 유 대리에게 이 사실을 숨기기로 했다.
괜히 실망할 것 같아서였다.
“제가 따로 연락을 취해 볼게요. 일정을 잡아야 하니까요.”
제임스 밀러에 대해 언급하자 유 대리는 유능하게도 그와의 일정을 잡았다.
“언제든지 가능하다네요?”
“제임스 밀러가요?”
“네. 요즘엔 일이 없나 보죠.”
유 대리가 농담 삼아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바쁜 인물 중 하나인 그가 일이 없다니.
유 대리조차 자신의 말에 실소를 터트릴 정도로 재미없는 농담이었다.
“그럼, 바로 가능하실까요?”
“지금요?”
“네.”
정우의 말에 유 대리는 잠시 고민했다.
“…으음. 챙길 게 많은데….”
“저는 트레이닝 센터에 옷이 있으니까, 그거 가지고 바로 출발하면 돼요.”
“아뇨. 정우 씨 말고 저요. 아무리 그래도 이것저것 챙길 게 많아서….”
“……같이 가시려고요?”
“당연하죠. 비선데.”
유 대리가 자신만 놓고 갈 생각이었냐고 눈썹을 치켜세웠다.
묘한 박력에 정우가 부정하자, 유 대리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퍼스트 클래스는 부담되실 테니, 비즈니스석으로 끊어놓을게요.”
“…….”
“어머. 비서의 동석은 원래 플레이어의 책임이라고요.”
유 대리의 말에 정우가 잠시 비행기 푯값을 계산하느라 멍한 표정을 짓자 그녀가 손을 휘저었다.
“됐어요. 됐어! 협회에서 부담하니까 걱정하지 말고 짐이나 싸요. 아니지. 저 짐 금방 싸 올 테니까 기다려요!”
유 대리가 또각 소리를 내며 달리기 시작했다.
어딘지 모르게 들뜬 그녀의 뒷모습에 정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 *
유지석은 창밖을 보았다.
어두운 밤.
바쁨의 상징인 야경이 강남의 전역을 수놓고 있었다.
그런 야경을 보며 유지석은 정우를 떠올렸다.
제임스 밀러를 만나러 가겠다는 보고는 진즉 올라왔다.
그것에 승인을 낸 사람이 바로 본인이었으니, 정우의 일정을 모를 리가 없었다.
“성장하지 않는다… 라.”
아니다.
유지석은 대충 정우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와 비슷한 경우였던 사람이 있었으니까.
한때는 친우였지만, 어느 일을 기점으로 적이 되어 버린 자.
“…마왕.”
유지석의 미간에 골이 깊어졌다.
마왕을 떠올리면 입맛이 쓸 뿐이다.
이토록 타락하게 놔두지 않을 기회가 있었다.
당시엔 기회란 걸 몰랐을 뿐, 시간이 지나고 보니 아쉬움으로 그득했다.
따르릉.
유지석은 전화를 받았다.
-브라운이오.
“제임스 밀러를 소개하셨습니까?”
-알면서 그러는군. 내가 아는 한 가장 유능한 인물이니, 방법을 찾을 것이오.
“저야 박사님을 믿습니다.”
유지석은 예의를 차렸다.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음에도 닥터 브라운의 노고를 인정했기 때문에 예의를 잃지 않았다.
-누구요?
“한정우 말입니까?”
-미스터 유가 이렇게 관여하는 사람은 처음 보오. 미스 유에게도 이 정도는 아니지 않았소?
“…….”
-혹시… 그것과 관계가 있소?
“네. 맞습니다.”
유지석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 역시, 그렇군. 그랬어. 하기야 미스터 유가 관리를 할 정도의 이유라면, ‘이중 던전’이 아니고서야 설명이 되질 않지.
닥터 브라운의 음성이 부드러워졌다.
-미세스 질에게 맡길 셈이오?
“아닙니다.”
유지석은 부정했다.
-대마법사의 후계자는 아니다? 음…. 하기야, 마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하긴 했소.
“이유를 짐작하시겠습니까?”
-정확하게 연구해보고 싶은 마음은 있소. 하지만… 내게 있는 게 미스터 한과 미스터 유에게는 없는 것 같았소. 그래서 깔끔하게 포기했소.
“말을 돌리는 건 여전합니다. 시간이라면 한정우도 충분할 겁니다.”
-아니. 없소.
이례적인 단호한 닥터 브라운의 말에 유지석이 숨을 멈췄다.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그리고 짧게 묻는다.
“왜, 입니까?”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숨소리가 다소 거칠어졌다.
-…이중 던전 때문이오.
“그게 문제가 됩니까?”
-미스터 유는 왜 이중 던전을 클리어한 사람이 나타나기를 바랐소?
“아시지 않습니까. 이중 던전에서 나오는 정보가 필요했습니다.
-그렇지. 하지만 이중 던전을 클리어한 사람은, 10년 전 그대들 이후로 등장한 적이 없었소. 미스터 유가 G-00에 상당한 관심을 쏟고 있는 것도… 이중 던전을 의심했기 때문이 아니오?
“…….”
유지석은 닥터 브라운의 말을 고심했다.
10년.
이중 던전의 공략자가 나타나지 않은 부재의 시간.
유추와 추론. 가정과 가설만 난무하게 만든, 정보의 부재.
유지석을 비롯한 퀘스트 진행자들은 이중 던전을 클리어한 공략자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미스터 유에게 먼저 연락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오.
보이지 않는 닥터 브라운의 얼굴이 긴장으로 물드는 걸, 유지석은 느껴 버렸다.
그래서 그의 말을 곱씹었다.
유지석 역시 한국 플레이어 협회를 운영하며 닳을 대로 닳은 노련한 인물.
곧 닥터 브라운의 말의 진의를 깨닫고는 경악한다.
숨소리가 떨리고, 야경을 보던 눈에 경련이 인다.
창밖의 평화로운 도시가 일순간 신기루처럼 흩어져 버리는 느낌이었다.
“…혹시, 새로운 격변을 염두에 두시는 겁니까?”
부정의 의미를 듬뿍 담은 유지석의 물음에.
-음…. 그렇소.
닥터 브라운은 너무도 확고하게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