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 더러운 마도국 놈들!
* * *
황도를 향해 이동하고 있는 에일린과 그녀의 부하들.
그러나 이 순간, 그들의 발걸음은 테베를 막 떠났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기 그지 없었다.
마족들에게 당한 원한을 갚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도시를 떠났던 그들이었다.
그러나, 목표지역에 있던 자들은 마족이 아니었으며, 정작 그들이 찾으려 했던 마족들은 도리어 행방이 묘연해진 상황이었다.
이처럼 한 차례 기세가 꺾여버린 상황에서 그들이 영 의욕은 내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그리고, 그렇게 한참 가라 앉은 분위기에 사로 잡혀 있는 이들 중에는 무리를 이끌고 있는 에일린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근본적인 이유는 다르지만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썩 의욕을 내지 못하고 있는 그녀.
비록 황도로 발길을 잡을 때 까지만 해도 그녀는 어느 정도 일에 성실하게 임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지나고 냉정하게 머리를 식히게 된 지금.
그녀는 보다 또렷하게 느끼게 된 상실감으로 인해서 급격하게 기분이 다운되어 있는 중이었다.
‘토라레님이 떠나버렸어… 슈드 그 망할년이 토라레님을…’
사실상 마족들의 손에서 토라레를 구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출전에 임했던 에일린.
그러나, 정작 그 토라레는 마족이 아닌, 그에 대해서 나름대로 합당한 권리를 지니고 있는 슈드의 손에 넘어가버린 상황이었다.
물론 사랑하는 남자가 위험에 빠진 것 보다야 그쪽이 훨씬 나았지만 그럼에도 적어도 한 동안은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으며 그와의 잠자리도 가질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녀를 우울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때…
“저… 에일린님?”
“응?”
그녀가 있는 곳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한 무리의 부하들.
이에 이 무리의 실질적인 리더를 맡고 있는 그녀는 자신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그들을 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지요? 무언가 중요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 저… 그게… 말입니다.”
“으음…”
에일린의 질문에 잠시 주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병사들.
이에 대해서, 에일린은 일단 업무의 일환으로 입가에 자비로운 미소를 지어 내보이며 그들에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부담 없이 하십시오. 비록 대 신관이라는 자리에 있지만 저 역시 신의 종으로서 여러분들의 말을 귀 기울일 의무가 있으니까요.”
혹여 무슨 고해성사라도 하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야기를 하는 에일린.
이에 병사들은 마음의 부담을 조금 덜 은 듯 그녀를 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사실 말입니다 대신관님. 여기까지 오면서 저희들이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무언가 이상한 것 같습니다.”
“이상하다니.. 무엇이 말인가요?”
“일전에 저희들이 만났던 그 마녀들 말입니다. 비록 당시에는 주변이 어두워서 잘 보지는 못했지만 어쩐지 그 중에 제가 일전에 테베에서 보았던 마족과 비슷하게 생긴 자가 있던 것 같습니다.”
“네? 그게 무슨…”
“저.. 저도 그렇습니다. 물론 마족 같은 뿔은 달려있지 않았지만 분명 똑똑히 기억 합니다. 제 친구를 죽였던 그 녀석의 얼굴과 똑같이 생긴 마녀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 말은… 설마?”
부하들의 증언을 들으면서 무언가 떠오르기 시작한 에일린
그것은, 그녀도 익히 알고 있는 종족 위장 마법에 대한 것이었다.
환영 마법을 응용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머리에 뿔을 달거나 귀를 늘리는 것으로 마족이나 엘프로 위장을 하는 마법.
얼굴의 형상까지 바꾸는 데는 제법 고등 마법이 필요하지만, 이런 자잘한 특징만을 바꾸는 것으로 종족을 위장하는 것은 의외로 그렇게 까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특히 고도로 훈련을 받은 마도국의 마녀들이라면 이 정도 종족 위장 마법은 거의 필수라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 그리고 이것 말입니다. 이번에 있었던 마족들의 습격 현장에서 발견한 것인데, 그 마녀들도 이것과 비슷한 브로치를 착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 합니다.”
긴장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브로치 하나를 꺼내 보이는 여신관.
그것을 받아 든 에일린은, 그제서야 비로서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랬군요… 역시 어쩐지 조금 수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제가 아무리 늦게 도착했다 해도 설마 마족들이 그렇게 빨리 저의 감지망을 벗어났을 리가 없는데…’
은은한 분노가 느껴지는 어조로 이야기를 하는 에일린.
결국 이 모든 것이 처음부터 슈드 그자에게 놀아난 결과였다는 사실은 그녀로 하여금 진심 어린 분노를 느끼게 만들기 시작했다.
‘그 녀석... 단순히 토라레님을 데려가기 위해 일을 꾸민 것이라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어. 그 년의 또 다른 목적은 혼란을… 마족들의 습격이라는 연막으로 우리 제국에 혼란을 주려는 것이었던 거야.’
이미 한차례 원정이 대 실패로 끝났으며 엘프 교국과의 전쟁까지 벌이고 있는 팔콘 제국.
이런 상황에서 만약 마족들이 이쪽에 도발을 감행한다면 제국 입장에선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게 된다.
제 아무리 대륙 최강의 나라인 팔콘 제국이라 해도 이 시점에서 다시금 바다 건너 원정군을 꾸리는 것은 무리.
그렇게 건드릴 수 없는 곳에 위치해 있는 적들이 도발을 감행하는 것은 제국의 혼란을 가중시킬 수밖에 없는 일이었으며 이는 불안전한 정국을 더욱 악화시키는 단초가 될 것이 분명했다.
“마도국 놈들… 설마 뒤에서 이런 더러운 수작 질을 부릴 줄이야.”
“큭…”
“설마 마족도 아닌 같은 인간을 상대로 그런 짓을 벌이다니…”
상황을 확정 짓는 에일린과 그녀의 말에 짙은 분노를 표출하는 병사들.
이어서 에일린은 자신의 앞에 있는 병사들을 보며 진한 분노가 깔려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아무래도… 저희가 갈 길을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마도국에서 이런 더러운 수작을 벌였다는 사실을 한 시라도 빨리 폐하께 알려야겠습니다.”
“찬성입니다. 놈들의 만행을 제국 전역에 알리고 그에 마땅한 대처를 해야 할 것입니다.”
“더러운 마도국 놈들… 감히 우리 제국을 속이기 위해 이렇게 까지 일을 저지를 줄이야.”
그렇게, 방금 전까지 지니고 있던 마족들에 대한 분노를 마도국을 향해 돌리기 시작하는 병사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순수하게 분노에 사로잡혀 있는 병사들과는 달리.
에일린의 마음 속에는 단순한 분노의 감정뿐만이 아닌 기쁨의 감정 또한 함께 자라나기 시작했다.
‘이건…어떻게 보면… 잘 된 일일지도 몰라. 슈드가 그런 더러운 짓을 벌였다면 이를 빌미로 놈을 정식으로 처단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
다른 두 녀석이 증발해버린 뒤 유일하게 그녀에게 남아 있는 최후의 연적.
그 동안 마땅한 구실이 없어서 손을 대지 못하고 있는 그녀를 마침내 지워버릴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생각을 하면서,
에일린의 마음 속에는 그대로 진한 미소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
용사 헥토르.
이 순간 마족들을 이끌고 제국의 황도로 향하고 있는 그는, 지금의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불과 수주 전까지만 해도 그가 반드시 멸망 시켜야 한다 생각해 왔던 마왕국과 마족들.
그러나 지금의 헥토르는 바로 그자들을 돕기 위해 진심으로 전력을 다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 길이 확실히 맞는 것인가?”
“물론이다. 저 언덕만 넘어가면 바로 황도다.”
“으음…”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 그를 바라보는 마족 군단장 샤뮤엘.
하지만, 그녀가 자신에게 어느 정도의 신용을 지니고 있던 상관없이, 이 순간 헥토르는 그저 꿋꿋하게 성심 것 길안내를 해 나갈 뿐이었다.
동시에 샤뮤엘의 입장에서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의심은 거두지 않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일단 헥토르의 행동 자체에는 어느 정도 느슨한 신뢰를 지니고 있긴 했다.
지금까지 그의 행적을 보면 자신의 동료들을 끔찍이 아꼈으며, 이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버릴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 동료들이 마왕국에 인질로 붙잡혀 있으며, 그가 허튼 수작을 부릴 경우 곧바로 처형하기로 되어 있는 만큼 그가 함부로 행동하지 못할 것이라는 건 일단 믿을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런 샤뮤엘의 냉철한 계산과는 별개로.
이 순간 헥토르가 이렇게 까지 이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데엔 그것과는 또 다른 이유가 존재하고 있었다.
‘설마 내가 살면서 이렇게 까지 진심으로 마족들을 도우려 하는 날이 올 줄은…’
수주 전의 자신이 보았다면 분명 정신이 나갔느냐면서 모가지를 따려 들었어도 할말이 없을 행위였다.
비록 소중한 동료들의 목숨도 중요했지만, 그 이전에 헥토르는 용사로서의 자부심 또한 적잖이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만약 저자들이 동료들의 목숨을 인질로 이런 명령을 내렸다면 아마도 도주에 자결을 해서라도 스스로의 명예를 지키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헥토르에게는 더 이상 그런 용사의 명예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도 헥토르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는 그 순간의 기억.
이 임무에 대한 부탁을 받기 직전.
마왕국의 감옥에 갇혀 있던 그와 그의 동료들의 눈 앞에 나타난 충격적인 장면은.
헥토르로 하여금 종족 연합의 대의 따위는 허상에 불과했으며, 인간들 보다는 차라리 마족이라는 존재들이 더욱 신뢰할 수 있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또렷하게 깨닫게 해주었다.
‘용사의 말로라… 그런 점에서 보면 어쩌면 나라는 녀석은 참으로 운이 좋을 지도 모르겠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