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 빠른 손절을 하는 자들
* * *
“으음…”
“크흠..”
서로를 마주보고 앉은 채 대놓고 불편한 기색을 보이고 있는 두 무리의 사람들.
이 순간 그들의 얼굴에는 지금의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다는 감정이 또렷하게 보이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감정을 대놓고 입 밖에 내는 자는 없었다.
팔콘 제국의 대표 아킬레스 데클리먼트,
엘프 교국의 대표 스키피오 아프누스.
이 순간 각국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두 사람과 그들의 부하들은, 이 어색하면서도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한동안 무거운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저 거만한 엘프 놈들을 이 기회에 확실히 참교육 시켜줄 수 있었거늘…’
‘신의 뜻을 받드는 고귀한 우리 엘프들이 저런 인간 따위에게 숙이고 들어가야 하다니…’
불과 수 일 전까지만 해도 상대의 모가지를 따버릴 생각을 지닌 채 칼날을 갈고 있던 두 사람.
그러나, 현 시점에서 그들은 그렇게 바짝 갈아두었던 칼을 잠시 집어 넣은 채 대화를 나눌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몰려있었다.
4만 에 달하는 주력병력이 궤멸 당하고, 점령지의 70% 이상을 한 순간에 날려버린 역사상 유래 없는 대패를 맞이한 종족연합군.
롭에서의 피해를 복구하기 위한 준비가 채 진행되기도 전, 단 수주일 만에 그들이 입은 피해는 너무나도 치명적이기 그지 없었다.
이번 전쟁으로 인해, 그들은 안티옥 에서부터 시작해서 갈라디아, 디모데, 에베소, 빌리보 등 큼직큼직한 영토를 모조리 잃어버렸으며 병력의 규모마저 형편없이 줄어들고 말았다..
이는 지난 수 년간 이어진 전쟁의 성과가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된, 말 그대로 최악의 상황에 최악의 위기가 닥쳤다 할 수 있었으며
이와 관련해서 두 쪽으로 갈라졌던 팔콘 제국과 엘프 교국은 이처럼 일단 급하게 대화를 재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 하지만, 이미 서로를 향해 칼날을 보인 만큼 그들 사이에서는 더 이상 과거의 유대 같은 것을 일절 찾아볼 수 없었다.
단순히 상황에 의해서 협상을 진행하는 ‘적’이 있을 뿐.
그렇게 잠시 기 싸움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먼저 입을 연 쪽은 아무래도 지리적으로도 그리고 국력상으로도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는 엘프 교국 측이었다.
“그럼, 어디 이야기를 시작해 봅시다.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해결할 일은 빨리 해결하는 것이 정답이 아니겠습니까?”
“...그러지요. 허면 어차피 그쪽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알고 계실 터.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스키피오의 말에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아킬레스,
이 순간, 비록 훗날 다시 겨루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은 가장 급한 불부터 꺼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일전의 패배로 인해 현재로선 그 존립조차 위태로워진 상태인 종족 연합군.
비록 모든 점령지를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워낙 극심한 패배를 맛본 결과 그들은 더 이상 자체적으로 전선을 유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진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사실상 이번 전쟁의 가장 큰 투자자라 할 수 있는 팔콘 제국과 엘프 교국은 이 이상의 손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신속하게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본국에서 대대적인 지원을 해 상황을 추스르고 계속해서 전쟁을 진행할 것인가.
그도 아니면, 지금까지 이뤘던 성과를 포기하고 남아 있는 병력과 자원이라도 건지기 위해 퇴각을 종용할 것인가 하는 결단을 말이다.
‘일반적인 경우였다면 당연히 정답은 전자겠지… 무수한 희생을 치르고 손에 넣은 상륙 거점을 잃어버리는 건 너무 뼈아픈 손실이댜.’
‘평소였다면 교황성하 께서도 전쟁을 이어나갈 것을 선택했겠지. 지금까지 우리 엘프들이 치른 피의 값이 너무 컸으니까.’
전쟁의 관점에서 본다면 전략적인 입장에서 상륙 거점의 가치는 아주 큰 만큼, 본래라면 굳이 대규모 침공을 재개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점령지를 보호할 수준의 지원은 하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이 순간, 두 사람의 주인인 황제와 교황은 이미 답을 정해둔 상황이었다.
“퇴각하지요.”
“동의합니다. 지금 즉시 배를 띄워 저 마왕의 영토에 있는 병력을 귀환시키지요.”
지난 수년간 일궈 놓았던 모든 성과를 포기하겠다는 양국 대표의 선언.
얼핏 보면 이는 어리석은 선택이라 할 수 있었다.
한번의 실패로 인해 발생한 타격은 크지만, 그렇다 해서 모든 것을 무로 돌리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지금 급한 것은 수년간의 전쟁으로 인해 피폐히질 대로 피폐해져 한 동안은 내정에 전념해야 하는 마왕국이 아닌.
이 순간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적’ 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어차피 지금까지의 전쟁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나라는 마왕국이다. 저들은 한 동안 자신의 영토에서 벗어나 무언가를 꾸밀 여력이 없어.’
‘종족연합을 꾸려 놈들을 두들겨준 결과, 아제 더 이상 마왕국은 예전과 같은 강국이 아니게 되었다. 거기다 놈들을 실질적인 악의 축으로 만들어 놓은 이상 그들은 우리들의 위협이 되지는 못해.’
애초에 그들이 마왕국과 마족들을 악의 세력으로 몰아 넣고 종족연합을 결성한 가장 큰 이유는 자국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서였다.
연이은 흉년과 질병, 그리고 귀족들의 부패로 인해 흉흉해진 민심을 바로잡기 위해서 그들은 소위 말하는 성전을 선포하였으며 이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근래 들어 국내 상황이 안정화 되고 다시금 국력을 정상 궤도로 올려놓은 지금 상황에선 그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저하된 상황.
더 이상 정치적인 입장에서 딱히 전쟁을 이어나갈 필요성이 없는 상황에손해까지 발생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설픈 물타기가 아닌빠른손절 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지금 그들의 앞에는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져 위험이 되질 못하는 마왕국 따위가 아닌, 더 크고 강력하면서 실질적인 위험이라 할 수 존재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만약 여기서 전쟁을 이어나가고 지원군을 보내려 한다 해도, 이 엘프놈들이 이 기회를 이용하지 않을 리가 없겠지…’
‘지금 우리의 앞에는 마왕국이라는 허상이 아닌 팔콘 제국이라는 진짜 적이 자리를 잡고 있다. 지원군을 보낸다면서 병력을 빼는 그 순간 놈들은 분명 대대적으로 공세를 펼칠 것이야.’
이미 서로에게 칼을 뽑아 들기로 작정을 한 두 세력.
특히 팔콘 제국 황제의 경우, 이 기회에 오랜 경쟁 상대였던 엘프 교국을 확실하게 지워버리기로 결정을 내린 상황이었다.
당장 눈 앞의 대규모 전쟁을 앞둔 상황에서, 더 이상 종족연합 같이 쓸모를 다한 소재에 연연을 해 손해를 감수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마도국과 수인국 측의 허가는 이미 받았으니 곧바로 진행하도록 하지요.”
“동감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그 동안 고생해온 병사들을 가족들의 품으로 돌려 보냅시다.”
그렇게 마음 속으로는 상대를 향해 칼날을 겨눈 채,
아킬레스와 스키피오는 입가에 미소를 담은 모습으로 상대와 악수를 하였다.
기회가 되면 반드시 이 자식의 목은 자기가 따버리고 말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
안티옥에서 상황을 추스른지 며칠 후.
그곳에 주둔해 있는 3만의 마왕군은 선택을 내려야 했다.
“이 기회에 남아 있는 적의 잔당들도 싹 쓸어 버리시지요?”
“동감입니다. 아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는 반면, 적들은 위축될 대로 위축되어 있습니다. 이 여세를 몰아 이 나라에 있는 적들을 한 명도 남김 없이 소탕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단호한 목소리로 전투속행을 주장하는 삼손과 그의 무리들.
반면, 이와 관련해서 일라이어스와 벨제뷰티는 조금은 신중함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폐하, 비록 저희들이 큰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무리한 전투로 인해 아직 병사들이 많이 지쳐 있습니다.”
“거기다 적들은 지금 궁지에 몰려 잔뜩 독이 올라 있을 것입니다. 이런 때 무리하게 공격을 했다간 오히려 낭패를 볼 것입니다. 차라리 적들의 방심을 유도하고 아군에게 휴식을 줄 겸 지금은 일단 물러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일라이어스, 그게 무슨 말인가! 전쟁이란 흐름이다! 이 여세를 몰아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하면 앞으로 일이 어떻게 흘러갈 지 모른단 말이다!”
“그 흐름에 잘못 휩쓸려 갔다간 오히려 폭포 밑으로 떨어지는 낭패를 볼 수도 있다는 걸 모르십니까?”
어쩐지 이전에 보았던 것과 비슷한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삼손과 일라이어스.
이와 관련해서, 난 어쩐지 이 다음에 또다시 그리 바라지 않는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고…
“용사! 자네의 뜻은 어떤가?”
불행히도 이런 불길한 느낌을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무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텐데 한 마디 해 주시지요.”
‘아니.. 딱히 하고 싶은 이야기 없는데.’
"일전에도 혁혁한 공적을 세운 용사가 아닙니까. 이번에도 좋은 생각이 있을 터이니 공유를 해주시지요."
'그런 거 없어. 이런 식으로 화살 돌리지 마.'
삼손 뿐만이 아니라 일라이어스까지 나서서 나에게 대답을 요구하는 상황.
동시에 마왕 역시 그런 나를 바라보면서 무언가 말을 해보라는 눈치를 주기 시작했고…
이와 관련해서,
난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최대한 바르게 적당한 대답을 꺼내기 위해 머리를 굴릴 수 밖에 없었다.
어쩐지 너무 자연스럽게 상황을 결정 짓는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에 큰 부담을 느끼면서..
“폐하, 소신의 생각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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